“그의 비평집은 친절한 해부학이면서 동시에 시론이고, 현대시사이며 시학 사전으로 삼아도 될 정도다”
흔들거리는 시, 빠져나가는 시, 그러니까 표현할 수 없다고 생각했던 것을 애써 표현하고자 한 집념의 소산인 이 시라는 텍스트, 바로 이 처지가 이상한 단어들의 집합과 의혹 어린 무수한 표정들이 걸어다니는 텍스트들을 헤집고서, 고유한 발화의 논리를 찾아내고자 하는 사유의 힘이 비평의 본질이다._‘책머리에’에서
프랑스 현대시를 전공한 불문학자로 한국 현대시에 대해 활발한 현장비평을 펼치고 있는 고려대학교 불문과 교수 조재룡의 평론집 『시는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가 출간되었다. 저자는 2011년에 첫 평론집 『번역의 유령들』을 펴낸 바 있지만, 제목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그 첫번째 평론집은 개별 작품분석과 시인론 등 현장비평에 대한 글들보다는 번역과 비평의 접점을 추적하는 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번에 출간된 『시는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2003년 평론가로 활동하기 시작한 이후, 그가 꼼꼼하게 읽어내려간 현대시에 대한 본격적인 현장비평을 담은 평론집으로는 첫번째 책이라고 할 수 있다.
데뷔 이후 11년 동안 누구보다 활발하게 활동한 그간의 발표한 글들을 묶어서일까. 아쉬운 마음을 다독이며 책의 수록 목록에서 제외한 글들이 여러 편임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800페이지에 가까운, 그 두께부터 남다른 면모를 보인다.
총 6부로 나누어진 이번 책의 구성을 살펴보면, 1부에서는 2000년대에서 2010년으로 넘어오는 우리 시의 지형을 살펴보고 주체화, 알레고리, 취미 기준론 등 현대시에서 읽어낼 수 있는 이론의 지평을 짚어본다. 2부는 그의 전공이기도 한 ‘리듬’에 대한 세 편의 글을 묶었다. 그리고 이 기본적인 이론을 발판 삼아 이수명, 이준규, 조연호, 함기석, 김언, 김민정, 김중일, 김이듬, 권혁웅, 김록, 이영주 등의 시인들의 시세계를 세밀하게 살펴본 시인론이 3, 4부에 걸쳐 이어지고, 5, 6부에는 함기석, 송승환, 여태천, 정한아, 김성규, 임곤택, 최정례, 남궁선의 시집을 다각도로 살펴보는 ‘시집 읽기’가 실려 있다. 그리고 끝으로 에콜의 형성 과정과 그 지형 속에서 우리 시의 위치를 가늠해보는 글을 보론으로 담았다.
“시는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는 제목은 이 책의 서두에서 저자가 밝히고 있거니와 아인슈타인이 입자의 위치나 운동량의 값은 확률로밖에 예측할 수 없다는 하이젠베르크의 견해에 동의하지 않으면서 남긴 말, “신은 주사위 놀이를 하지 않는다”에서 가져온 것이다. “인간의 언어활동, 특히 가장 주관적인 언어활동이랄 수 있는 시를 마주할 때, 의미 자체의 무한성에 주목하여 개성적인 길을 찾기보다는 그것을 그저 우연의 산물로 치부하는 경향에 크고 작은 불만이 있었더”고 저자는 말한다. “문장의 원인과 결과, 텍스트를 움직이는 리듬이나 통사의 구성과 그 메커니즘을 헤아려 찾아낼 의미의 흔적들에 특수성의 자격을 부여하는 일이 비평의 몫”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여 그는 성실하고 꼼꼼하게 시와 시인에게 밀착하여 시인이 풀어놓은 시적 세계를 포괄적으로 담아낸 총체적인 ‘론’을 쓰고자 하는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여 “친절한 해부학이면서 동시에 시론이고 현대 시사이며 시학으로 삼아도 될 정도”인 이 한 권의 책을 펴냈다.
“한국 현대 시인들 곁에 이렇게 세밀한 관찰자, 문장가, 비평가, 시론가, 시학자가 있어서 다행”이라는 시인 김혜순의 말은 어쩌면 이 책에 대한 상찬이라기보다 앞으로 조재룡이 펼쳐 보일 비평 세계에 대한 기대가 아닐까.
조재룡의 비평을 읽고 있으면 끝없이 길고 어두컴컴한 골목길에 들어서는 것만 같다. 대개는 지번 앞에 ‘산’이 붙어 있는 그런 골목길이다. 샛길 많고 가파른 이 미로를 가닥 잡아 찾아들어가려는 그의 손에는 물론 여러 장의 지도가 들려 있지만, 집집마다 머물러 그 문을 밀어보기도 하고 두드려보기도 하고 그 틈새를 엿보기도 하는 그 품새가 지도를 이용하기보다는 차라리 수정하려는 것 같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우리는 그 골목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몰랐을 것이며, 지금 이 시간의 삶과 미래의 삶이 동거하는 그들 집에 누가 사는지 관심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는 이론가이면서 현장 답사자이며, 실증주의자이면서 투시자이다. 그가 오기 전까지는 한국시의 거대한 파노라마가 이렇듯 세밀화로 그려진 적이 없었다.
_황현산(문학평론가)
그의 비평엔 오랜만에 먼 나라에서 돌아와 고국의 시인들이 내지르는 참혹한 함성을 들은 목격자의 격정이 흘러넘친다. 이 비평가만큼 우리나라 젊은 시인들의 ‘활자들의 광란과 문장들의 궐기’를, ‘정직한 얼굴과 의연하고도 순결한 몸짓’을 속속들이, 낱낱이, 다각도로 함께해준 비평가가 있을까. 소설가들조차 단문을 쓰는 시대에 그의 비평은 한국어의 외연을 확장한 만연체다. 그의 문장은 마침표 없이 한없이 축적하고, 함축하며, 변이하고, 솟아오른다. 그는 지금 여기의 한국시가 타자를 살아내며, 타자에게로 입사하고, 이접하는 모든 과정을 함께하며 그렇게 하는 자신의 글쓰기를 비평적 이행이라고 믿는다. 이 이행의 과정 속에서 한국시사 속에서 본연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헤매던 무수한 전거들(리듬, 산문시, 시와 정치 등등)이 새롭게 제시된 지평 속에서 함의를 받아 다시 돌올하게 매김되는 현상도 목격하게 된다. 그러기에 그의 비평집은 친절한 해부학이면서 동시에 시론이고, 현대시사이며 시학 사전으로 삼아도 될 정도다. 그의 비평을 읽고 나면 한국 현대시가 텍스트의 폐쇄성에 갇혀 있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시 스스로가 끝없이 시 바깥을 향하는, 한없이 깊고 높은 시적 경험의 지평을 넓히고 있었음을, 개방성에 대한 의지로 목청껏 울부짖고 있었음을 목격하게 된다. 한국 현대 시인들 곁에 이렇게 세밀한 관찰자, 문장가, 비평가, 시론가, 시학자가 있어서 다행이다.
_김혜순(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