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도 말해지지 않은 ‘소설의’ 고독을 위하여
―한국문학을 바라보는 가장 따스한 성찰, 문학자 정홍수의 새로운 평론집
흔들리는 사이로 언뜻 보이는 푸른빛
흘러가버린 게 누구였더라
기쁨과 외로움이 하나가 되는
집으로 가는 길에 생각에 잠긴다
좋은 일 같은 거 없어도 좋아
있으면 좋겠지만
―<카페 뤼미에르> 중에서
‘다정다감하다.’ 이 표현은 문학비평에 어울리는 수사인가? 텍스트에 대한 비판적 자세를 끊임없이 견지해야 하는 평론의 장에서 ‘다정’이나 ‘다감’이라는 단어는 언뜻 보기에 조금 이상해 보인다. 하지만 정홍수의 평론을 말할 때 이 표현을 제한다면, 우리는 과연 그의 평론에 대해 제대로 이야기할 수 있을까? 당연한 말이지만 이는 그의 평론이 자칫 감상적으로만 흐른다든가, 엄밀함이 부족하다든가 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오히려 그의 글은 텍스트에 밀착하여 그 내밀한 속내를 드러내는 데 가장 합당한 비평언어를 늘 누구보다도 먼저 발견해왔다. 그의 눈길이 닿은 소설들은 저마다의 빛깔을 발산하며 새롭게 태어나 우리를 향해 손을 뻗는다. 그는 ‘소설의 고독’에 대해 말하지만 소설은 그로 인해 고독하지 않다. 햇수로 18년, 1996년 등단 이후 한결같은 애정으로 무수한 작품들을 진심 어린 감동 안에서 읽어왔으니, 이제 여기 그 아름다운 글들을 한데 모은다. 2008년 출간된 『소설의 고독』 이후 두번째다. 좀더 풍성하고 넓어진 그의 목소리가 기껍고 반갑다.
정홍수는 원로세대의 작가들은 물론 젊은 작가들의 최근 발표작까지 훤히 알고 있는 평론가다. 총 4부로 구성된 이 평론집의 1부는 그 전체적인 시각의 결과물이라 할 만하다. 황석영과 김원우로부터 복거일, 공선옥, 권여선, 김연수, 김애란, 김사과 등의 소설을 통해 한국소설의 여러 양태와 흐름을 살펴본다. ‘창비적 독법’과 리얼리즘론에 관한 단상을 박민규 소설의 독해를 통해 내보이기도 하였다. 또한 주목받는 젊은 평론가인 신형철과 권희철의 첫 평론집들에 관한 의견도 담았다.
모든 작가는 삶에 대한 자신들만의 느낌을 가지고 전체로서의 인간 사회와 마주한다. 작가의 세계관을 포함하고 있는 그 느낌은 그러나 부분적이고 어느 정도는 편파적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작가들마다의 고유한 미적 충동과 함께 이 부분적이고 편파적인 시선은 종종 어떤 중립적이고 논리적인 사회학도 가닿지 못하는 인간 현실에 대한 창의적인 발견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 생각해보면 문학은 언제나 세계는 살 만한가 하는 탄식의 질문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러나 인간을 둘러싼 숱한 제약과 구속의 현실이 인간 진실의 체념할 수 없는 현재이며 가능성이기도 하다는 역설을 잊지 않으면서 그렇게 해왔다.(「현실의 귀환, 그리고」, 52~53쪽)
2부는 여러 지면에 발표했던 작가론과 작품론 들을 주로 모았다. 윤성희, 황정은, 이기호, 이승우, 조해진, 김금희, 신경숙, 구효서, 함정임, 박완서, 이청준 등 여러 작가들의 작품세계에 관한 깊이 있는 시선을 살펴볼 수 있다. 현장비평에 오래도록 발 디뎌온 그의 작품읽기는 가히 한국문학의 지형도를 그려볼 수 있을 만큼 방대하다. 나아가 단순히 한 권의 책에 관한 비평에 그치지 않고, 우리 사회가 지나고 있는 한 시대의 마음에 관해 탐구한다.
자본의 지배를 부정하고 그 외부를 상상하는 길이 인간 개개인의 자유와 해방의 기획이자 동시에 공적 연대의 과제로 역사적 가능성의 지평에 놓여 있던 세계를 우리는 기억한다. 가깝게는 지난 80년대의 한국사회가 그러하지 않았는가. 그런데 그 지평은 지금 잘 보이지 않는다. 사람들의 가슴을 뜨겁게 지피던 연대의 감정은 상당한 정도로 불씨를 잃었다. 물리적 고난과 마음의 가난을 껴안던 인간적 고양감이나 자존감은 속물적 생존의 냉소에 자리를 내준 지 오래다. 그것들은 다 어디로 사라졌는가.(「비인간의 세상, 끝나지 않은 기다림」, 178쪽)
3부는 상대적으로 주로 짧은 단평들을 모았다. 배수아, 정미경, 김주영, 이병천, 김진규, 전성태, 고종석, 박솔뫼, 조경란, 김훈 등의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길지 않은 분량으로 편안히 써내려간 글들이 부담 없이 읽힌다. 특히 세상을 떠난 소설가 김소진에 관한 짧은 글은 어디에도 발표된 적 없는 미발표작으로, 그의 따스한 성찰이 잘 배어나는 글이라 따로 언급할 만하다.
김소진에게 민중은 이념적 표상이 아니라 그가 자라면서 보아왔던 길음동 산동네의 살아 있는 이웃들이었고, 무엇보다 자신의 무능한 아버지와 억척같은 어머니였다. 그리고 그들은 눈앞의 이해에 휘둘리고, 인간적 정리를 따지기도 하면서 그들 나름의 개인의 드라마를 충실히 살고 있었다. 그러나 또한 그들은 세상의 요란한 흐름 밖으로 거듭 밀려나고 사라져가고 있기도 했다. (……) 김소진에게 길음동 산동네 사람들의 삶을 복원한다는 것은 동시에 그토록 부정하고 싶었던 무능한 아버지의 자리를 그 자신의 현재적 운명으로 다시 사는 일이기도 했다.(「기억의 육체」, 377쪽)
4부는 그가 창비주간논평 등에 써온 문학에 관한 글들과 『씨네21』에 발표한 영화평론 등을 담았다. 문학을 넘어 영화에까지 닿는 정홍수의 편력을 확인해볼 수 있다. 치밀하고 감성적인 문체가 영화를 만나 어우러지는 빼어난 친화가 돋보인다.
그들이 어떤 말을 흉내내며 자신의 말인 것처럼 반복할 때, 그들은 세상 안에 있다. 가령 그때 재학은 ‘파고 파도 아무것도 나오지 않을’ 그 너저분하고 쓸쓸한 방에서 가을의 세상 속으로 걸어나온 것이다. 그래서 그 가을날 저녁 짜증나는 후배이자 사랑의 경쟁자 문수와 마시는 술집 ‘아리랑’의 술자리. 이때 그들은 선희를 가운데 둔 ‘우리’다. 다만 모르고 있을 뿐. 비스듬히 옆에 앉은 술집 주인 예지원의 존재, 선물처럼 도착하는 치킨, 사라진 꿈의 자리에 서 거듭 돌아오는 흥겹고 구슬픈 노래, 그리고 쌓여가는 소주병. 그들은 지금 부딪치고 있다. 손짓까지 하며 “파고, 파고, 가고, 가고” 하는 문수는 바로 그 순간 선희에 대한 사랑을 ‘파고’ 있으며 어딘가로 ‘가고’ 있지 않은가. 취해서이겠지만 두 사람은 노래를 듣고 있는 것 같지 않다. 그리고 이상하게 그 노래는 영화 밖에 있는 것 같다. 그게 슬프다.(「노래는 저 너머에 있다」, 43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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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나는 우리 아이들의 나이에, 꽤나“ 떠겁던”(그의 발음) 시절에 만났는데,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그 보다 뜨거운 사람을 많이 알지 못한다. 하물며 그때의 체온을 지금까지 비슷하게 유지하고 있는 사람은 거의 알지 못한다. 그때는 그런 뜨거움이 서로의 온도 차를 떠나 모두 한 방향으로 향할 것이라고 믿었고, 또 믿고 싶었다. 그럼에도 그의 방향은“ 우리”의 방향과 늘 1도나 2도 정도 틀어져 있었고, 그 각도 차 에서 생기는 부채꼴 안으로 술이 어지간히도 들어갔던 것 같다. 그러나 그때로부터 삼십여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가 자기 체온을 유지하는 비밀이 바로 그 각도 차에 있음을 그때는 미처 몰랐고, 알 수도 없었다. 그 시절 우리가 너무도 사랑했던 말, “아래로부터”를 그가 지금 이런 식으로 실천할 줄도 미처 몰랐다―저 멀리, 저 너머에 있다고 생각했던 것을 세상의 또 한 바닥, 텍스트의 바닥에 난 흐릿하고 팍팍 한 길을 따라가며 찾고 있을 줄은. 하긴, 예전부터 위에서 내려다보고 그린 어설픈 조감도는 신용하지 않던 사람이기에, 그는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아래로부터, 자기 발로 디뎌본 길의 지도를 그려나갈 수밖에 없을 것이다. 변함없이, 이 온도로 뜨겁게. _정영목(번역가)
쉼 없이 출간되는 신작을 그때그때 부지런히 찾아 읽는 평론가, 원로세대에서 신진세대까지 주요 작가 한 사람 한 사람의 문학 세계에 대해 속속들이 친숙한 평론가, 당대 소설에서 무엇이 낡았고 무엇이 새로운가를 훤히 알고 있는 평론가, 한국소설의 문제를 소설 일반 또는 문학 일반의 차원에서 다룰 줄 아 는 평론가. 이런 평론가들을 하나로 합쳐놓는다면 그는 아마 정홍수일 것이다. 나의 어휘와 개념의 빈곤을 느끼게 하는 작품을 만났을 때, 혹은 자신 있게 판단하기 어려운 현상에 접했을 때 언제나 나는 그가 뭐라고 말했을지 궁금하다. 그러나 그의 비평이 믿음직한 것은 그것이 근면한 독서와 사색의 산물이 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의 비평은 놀랍도록 다감하고 겸손하고 자애로운 태도로 작품과 대화하며 문학 이라는 이름의 윤리적, 미학적 의식에 대한 헌사가 되기를 주저치 않는다. 문학을 읽고 쓰는 일이 바로 양심이고 사랑이고 혁명이라고 믿었던 그의 세대의 열광과 우수를 마음 깊은 곳에 품고 그는 쓴다. 나는 정홍수 비평만큼 겉으로 털털하나 속으로는 끈끈한 문학자의 순정을 알지 못한다. _황종연(문학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