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나 내 동시의 스승은 어린이시”
우리 동시단의 산증인, 권오삼 시인의 열두 번째 동시집 출간
1975년 12월 <고향의 봄>을 쓴 이원수 선생의 추천으로 동시단에 나온 지 46년. 한때 동시에서 멀어지기도 했으나 그럼에도 동시 쓰는 시인으로 평생을 살아왔다고 할 수 있을 만큼 동시에 쏟아 부은 열정은 남다르다. 이오덕 선생이 주축이 된 어린이문학협의회와 뜻을 같이했고 한국동시문학회를 이끌기도 했으며, 지금은 동시창작연구소를 운영하며 ‘어린이’가 주인인 동시를 향해 끊임없이 정진하고 있다.
시인이 동시를 쓴 지 근 반백년, 우리를 둘러싼 외부 환경만큼 인식의 틀도 바뀌었다. 동시의 일어서고 기울어짐을 함께하면서 그가 결코 놓지 않은 것은 하나, 아이들이다. 1983년 첫 동시집 『강아지풀』을 낸 뒤 초반의 작품집은 시인의 말대로 의식이 앞서 그 표현에 있어서는 아이 독자를 조금 밀어 둔 경향이 있었을지라도 자기반성을 거듭하며 아이들에게 다가갔다. 스스로를 “2000년대의 신인, 습작생, 문학청년, 머리가 굳어 새로 공부를 해야 하는 나”라고 지칭하며 시를 갈고 닦았고, 어린이시를 찾아 읽는 한편 학교 현장에서 일하는 이들의 도움을 받거나 직접 아이들을 찾아가 아이들에게 자신의 작품을 읽히며 동시의 마음가짐과 몸가짐을 가다듬었다.
시인은 늘 동시의 첫 번째 독자는 어린이라고 강조해 왔다. 동시가 현실의 문제든 자기 체험이든 무엇을 담더라도 어린이가 이해하기 쉽게, 재미있게 써야 한다는 것이다. 이 다짐은 동시집 『너도 나도 엄지척』 첫머리에 ‘동시나라 헌법’으로 박혀 있다. 마치 인장처럼. 그래서 그의 시는 관념이 아닌 현실과 직관. 머릿속에서만 발아하고 퍼져 나간 시상이 아닌, 직접 몸으로 체험한 것의 결과이다. “보고 듣고 느끼는 걸 마음으로 써낸 것.”
더는 손댈 수 없는 퇴고의 한계점은 어디까지일까. 그것은 아마도 시인 나름대로 설정한 시적 기대치와 시인이 무엇보다 예민하게 받아들이는 아이들의 호응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지 않을까. 시인은 변화무쌍한 아이들의 세계를 머리로 상상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직접 체험하고 살아 있는 리얼리티를 작품의 중요한 요소로 삼는다. 또한 ‘언제나 내 동시의 스승은 어린이시’라고 했다. 그 치열한 시간의 숙성을 거친 퇴고의 결과와 아이들에게 보다 가까이 다가가고자 하는 시인의 열망이 이 동시집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_조수옥(시인)
눈 쏟아지는 날의 유령들도, 비 오기만 기다리는 우산들도, 페트병 속 바람도, 건널목 신호등도, 우리 동네 이웃들도 너도 나도 엄지척!
권정생문학상, 방정환 문학상을 수상하고 초등 국정교과서에 여러 편의 시를 올렸던 권오삼 시인. 과거와 동시대를 아우르며, 한층 무르익고 탄탄해진 권오삼 시인의 시 세계는 동시집 『너도 나도 엄지척』에 펼쳐져 있다. 서시 「별이 빛나는 밤」을 포함하여 총 51편의 작품이 실려 있는데, 자연 속에서 생활 속에서 시인이 관찰한 것, 겪어 아는 것, 함께 나누고 싶은 순간들을 만날 수 있다.
산이 있고 나무가 있고 강이 있고
바다가 있는 이 푸른 지구에는
대가리를 쳐들고 물살을 가르며 헤엄쳐 가는
물뱀이 있고
바다 속에는 잠수함처럼 소리 없이 돌아다니는
상어가 있고
사막에는 모래바람을 맞으며 터벅터벅 걷는
낙타가 있고
하늘에는 떼를 지어 날아다니는
새들이 있는데
지금 나를 보고 있는 별 아이야
너희 별에는 무엇이 있니
_「별 아이에게」 전문
지구의 ‘나’는 권오삼 시인, ‘별 아이’는 독자로 놓고 봐도 재밌다. 시인은 우리에게 자신의 가까이 살아가는 이들을 생동감 있게 소개한다. 비 오는 날이면 활짝 존재감을 드러내는 우산이나 꼬리를 쏙 내밀며 올챙이들로 변신하는 빗방울들, 컵에 따르자마자 신이 나서 뽀글대는 콜라, 길 가는 사람의 발걸음을 붙잡는 쥐똥나무 꽃향기, 길고양이처럼 웅크린 빈 페트병 속에서 추위를 피하는 떠돌이 바람…… 모두 만날 수 있다. 여기저기 기웃대며 향기로운 냄새와 반짝이는 것들을 훔치러 다니는 “도둑 아저씨”(시인 자신)가 욕심껏 데려온 보물들이다. 머릿속에서 관념만으로 꾸며낸 존재들이 아니라 보고 듣고 냄새 맡고 관찰하고 감각하여 데려온 이들이다.
갯개미취, 갯버들, 갯무, 갯바랭이, 갯질경이……
—척 보면 안당께, 고향이 바닷가 아니면 냇가란 걸.
두메고들빼기, 두메냉이, 두메부추, 두메솜방망이……
—그래, 너그들 고향은 저 두메산골이잖아.
_「이 식물들의 고향은 어디일까요?」 부분
눈 내리는 거리
버스 정류장 한구석에
길고양이처럼 웅크리고 있는
빈 페트병
갈 곳 없는
떠돌이 엄마 바람이
추위를 피하려고
페트병에 들어가
웅크린 채 잠들어 있다
아기 바람 품에 꼭 안고
_「빈 페트병」 전문
“시의 탄생은 늘 가까운 생활 속에 있다. 어떤 사실은 날(생)것 그대로 받아 적어도 시가 된다. (…) 쉽게 쓴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시인이 일상에서 무엇을 포착하고 무엇을 드러내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져 새로운 장면으로 다가온다.”_조수옥
권오삼 시인에게 시의 소재는 동나는 법이 없다. 그의 창작 비법은 관찰, ‘꿰뚫어 보기’이기 때문이다. 시인은 모든 감각을 언제나 깨어 있는 상태로 열어 놓아 대상을 만날 준비를 한다. 그래서 시인에겐 소나기가 비를 뿌리다 말고 그냥 가는 순간도, 눈을 밟을 때 발밑에서 나는 뽀드득 소리도, 함박눈 내리는 날의 사람들 모습도 예사롭지 않다. 그것들은 저마다 그럴싸한 이유와 재미난 이야기를 입고 뜻밖의 모습으로 변신한다. 시인이 부리는 익살은 대상에 활력을 불어넣고 독자와의 거리를 희석시키며, 따듯한 시선은 대상을 품어 안는다. 시인에게 잡히어 드러난 시적 순간들로 인해 동시는 살아나고 세상은 확장된다.
권정생문학상에 『똥 찾아가세요』를 선정한 심사위원들(박상률, 서정홍, 박혜숙)은 권오삼 시인을 “치열한 도전 정신, 몇 시간이고 놀이터에 쪼그리고 앉아 아이들 삶 속으로 다가서려는 열정, 익숙함을 거부하고 낯선 것을 향해 서슴없이 손을 내미는 자세”를 가진 시인이라고 하였다. “우리말의 리듬과 어감을 되살려 내고, 끊임없는 실험을 통해 동시의 영역을 넓혀 가는 권오삼 시인의 행보야말로 후배 작가들에게 귀감이 되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고.
그래서 권오삼 동시의 한창은 언제나 지금이고, 지금이 가장 무르익은 때다. 시인의 바쁜 눈동자는 동시 읽는 아이들에게 세상의 보배로운 보물들을 계속 발굴해 내어 줄 것이고, 권오삼 시인의 곁엔 언제나 아이 독자가, 아이 독자 곁엔 언제나 권오삼 시인이 있을 것이다.
『너도 나도 엄지척』을 덮었다면, 이제 “너희 별에는 무엇이 있니”라는 시인의 물음에 엄지척 하고 우리가 발견한 보물들을 보여 줄 차례인지도 모르겠다.
유쾌하고 밝은 기운이 꿈틀대는 그림
오랫동안 어린이책에 그림을 그려온 이주희 화가가 『너도 나도 엄지척』에 활기를 더했다. 캐릭터들의 살아 있는 표정, 산뜻한 색채, 유쾌하게 풀어낸 장면들 덕에 『너도 나도 엄지척』에는 밝은 기운이 꿈틀거린다. 동시 읽는 또 하나의 즐거움을 너끈히 담당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