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사
김밥처럼 차분하고 무표정한 고비 씨. 어느 날 잔잔한 그의 삶에 방울토마토만큼 작은 돌멩이가 던져졌다. 돌멩이가 만든 작은 동그라미는 점점 커지며 새로운 순간들을 가져온다. 그의 변화를 지켜보는 내 마음에도 작은 동그라미가 그려진다. 단조롭게 굳어 가는 일상에 가벼운 노크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덕후’가 세상을 구하는 요즘, 아직 덕질할 대상을 찾지 못한 당신이라면 노인경 작가를 추천한다. 그는 왕성한 생산력으로 지루할 틈 없이 이야기를 던진다. 장르의 경계를 짓지 않을 뿐 아니라 매체의 안팎을 넘나들며 예상치 못한 즐거움을 주는 작가다. 이번에 노인경이 준비한 이야기는 자린고비 이야기이다. “자린고비라니?” 의아한 마음이 든다면 당신은 충분히 준비가 되었다. 고비 씨의 완고한 일상이 깨어지듯 당신의 의문도 아름답게 깨어질 것이다.
_수신지(일러스트레이터 • 만화가, 『며느라기』 작가)
두터운 팬층을 가진 그림책 작가 노인경이 풀어놓는
삶의 색채, 향기, 온도에 관한 이야기
팽팽하게 당겨져 있던 고비 씨의 일상에
톡, 방울토마토만 한 작은 돌멩이가 떨어진다
어려서부터 가난과 한식구처럼 살아온 고비 씨. 다행히 남들보다 잘하는 걸 일찍 찾아서 그림을 그려 돈을 벌며 살고 있다. 성실히 일하고, 특별히 자기 의견을 내지 않으며, 마감일을 정확히 지키는 것이 자린고비 씨의 원칙이다.
고비 씨의 식사는 하루에 두 끼, 김밥이다. 최대한 얇게 썰어 달라고 해서 최대한 천천히, 속을 하나, 하나, 빼서 먹는다. 옷은 어쩌다 보니 속옷까지 모두 까만색이다. 까만색은 물감이 튀어도 안 보인다는 장점이 있다. 어른이 되어 다행인 점은 옷이 작아져서 못 입는 일은 없다는 것이다.
그는 어디든 걸어 다니며, 목적지에 도착하면 버스나 지하철을 타지 않아서 아낄 수 있었던 돈이 얼마인지 계산해 본다. 과일이나 채소는 시장의 떨이 바구니를 이용하는 것, 여름에는 냉방 시설이 잘된 도서관을 이용하는 것, 겨울에는 난방 텐트를 이용하는 것 모두 그의 지혜이자 요령이다.
고비 씨에게는 오래 함께 일해 온 파트너가 있다. 정기적으로 그에게 그림을 의뢰하는 편집자이다. 어느 날 편집자가 방울토마토 한 팩을 건넨다. 너무 많이 샀으니 나누어 먹자는 말과 함께.
달콤하고 시큼하고 단단했다.
맛이 너무 생생해서 당황스러웠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고 생각하는 고비 씨가 단호하게 거절하자 편집자는 대신 그림을 그려 달라고 부탁한다. 그림을 그리는 일은 돈 드는 일이 아니니 자투리 종이에 작게 그리자고 결심한 고비 씨는 방울토마토를 받아 들고 집으로 온다. 찬물에 씻어 입에 넣은 방울토마토의 맛은 당황스러웠다. 마치 생전 처음 먹어 보는 맛처럼 달콤하고 시큼하고 단단했다. 껍질이 이에 닿아 터지는 소리와 과육의 질감, 코를 자극하는 싱싱한 감각이 고비 씨의 작은 방을 가득 채운다. 다음번 미팅에서 고비 씨는 편집자에게 그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림을 그릴 때 나는 주로 수채 물감을 쓴다.
수채 물감은 물에 녹여 오래오래 사용할 수 있어서 좋다.
『자린고비』를 이끌어가는 그림은 부드러운 연필선과 묽은 단색의 수채화이다. 노인경은 패턴 스타일과 팝업으로 구성한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 색연필과 트레이싱지의 겹침을 이용한 『숨』, 픽셀아트로 그린 『코끼리 아저씨와 100개의 물방울』 등 하고자 하는 이야기에 따라서 다양한 스타일을 구사해 온 작가다. 이번에 그가 선택한 흐릿하고, 번져 가며, 어쩌면 단조롭게 진행되는 그림 스타일은 오히려 골똘한 고비 씨의 생각과 하루하루의 시간, 흘러가는 계절감을 담백하게 담아낸다. 최소한의 선과 색 안에서 독자는 자기의 삶을 굴리기 위해 걸음을 내딛는 이의 결연한 표정을, 빈틈없던 일상에 순간순간 침입하는 기쁨과 새로움을, 나와 타인의 이야기가 겹쳐 울릴 때 생겨나는 조용한 떨림을 더 가까이 느낄 수 있다.
나는 책상에 앉아 오늘치의 그림을 그린다.
내 이름은 자린고비다.
긴 겨울 끝에 찾아온 어느 봄날 오후에, 고비 씨는 점심을 먹으러 와서 떡볶이를 주문한다. 매일 먹던 김밥이 아닌, 계란이 반 알 들어 있고 빨갛게 익은 양배추, 파, 어묵이 든 떡볶이는 사천오백 원이다.
“아… 좋네요.”
매일 먹던 김밥이 아닌 떡볶이를 주문해 분식집 아주머니를 당황시키고, 푸짐한 한 그릇의 행복을 느끼고 나서 고비 씨는 일어선다. 시간과 노력을 다해 하루치의 그림을 그리고, 걸어야 하는 만큼의 거리를 걸어 집으로 돌아간다. 고비 씨의 하루는 여전하지만 조금 변했다. 그의 삶을 둘러싼 모든 풍경들이 아름답다.
책을 먼저 읽은 수신지 작가(일러스트레이터 • 만화가, 『며느라기』 작가)는 “어쩐지 마음이 차분해지는 날 처음 가보는 장소에서 이 책을 읽는다면 그날을 오래오래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성실히 살아가는 우리의 삶에 필요한 것은 바로 좋은 기억의 모습을 한 책갈피들일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