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가쁘게 달려온 우리를 멈춰 세우며
주위의 풍경을 새롭게 바라보게 하는 김도연 신작 소설집
1991년에 등단한 후 삼십 년 넘는 동안 소설집, 장편소설, 산문집 등 다양한 장르를 오가며 부지런히 작품활동을 이어온 김도연 작가의 다섯번째 소설집 『빵틀을 찾아서』가 출간되었다. 화려하거나 값나가지는 않지만 자신만의 작고 가벼운 콩을 보듬어가며 일상을 꾸려가는 우리 주위의 사람들의 모습을 담아낸 『콩 이야기』(문학동네, 2017) 이후 오 년 만에 선보이는 이번 소설집은 한 해 동안 숨가쁘게 달려온 연말의 우리에게 더없이 적절하게 느껴진다. 손때가 묻은 빵틀, 낮은 집, 커다란 눈동자의 말 등 김도연은 이 아홉 편의 소설을 통해 마치 오래된 사진을 복원하듯 쉽게 지나치기 쉬운 풍경을 다시 찬찬히 우리 앞에 펼쳐놓는다. 그 풍경은 때로는 밤낮으로 탁구에 깊이 몰두해 있는 인물을 코믹하면서 진지하게 담아내는 모습으로(「탁구장 근처」), 때로는 투자한 친구의 사업이 실패하는 바람에 엉뚱하게 투자금 대신 셰퍼드 두 마리를 건네받고는 속수무책으로 셰퍼드와 함께 산길을 헤매는 우스꽝스러운 모습으로(「셰퍼드」) 나타난다. 자신이 이해할 수 없는 일이 벌어지더라도 덜컥 화를 내거나 따지기보다는 그 흐름에 몸을 맡기는 인물의 모습은 각자의 시간을 통과해 한 해의 끝에 다다른 우리에게 애틋한 울림을 줄 것이다.
“뭘 찾으러 왔다고?”
동그란 칸에 담긴 밀가루 반죽이 서서히 부풀며 빵이 구워지듯
빵틀을 찾아 이 집 저 집을 방문하는 사이 피어오르는
고소하고 애틋한 아홉 편의 이야기
표제작인 「빵틀을 찾아서」는 이번 소설집에서 유일하게 어린아이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작품이다. 그치지 않을 듯 비는 끊임없이 내리고 누나들은 자신을 따돌리고 놀러나간 탓에 ‘나’는 혼자서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 심심해하며 시간을 죽이던 중 문득 아이디어가 떠오른 ‘나’는 엄마에게 소리친다. “엄마, 빵 구워먹자!”(10쪽) 하지만 웬걸. 빵틀을 누가 빌려갔다는 것이다. ‘나’의 집은 마을에서 유일하게 빵틀을 갖고 있기 때문에 겨울철이나 농한기면 이 집 저 집에서 서로 줄을 서가며 빵틀을 빌려갔다. 그렇다보니 한 번 빌려준 빵틀은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어떨 때는 한 달 만에 돌아오기도 했다. 어떤 집에서 빌려갔느냐는 ‘나’의 물음에 엄마는 확신 없이 “누구더라? 월남집에서 빌려갔나?”(같은 쪽)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 말을 시작으로 비 오는 날 ‘나’의 ‘빵틀 찾기’가 시작된다. 과연 ‘나’는 무사히 빵틀을 찾을 수 있을까?
이어지는 여덟 편의 소설은 지방을 배경으로 중년의 화자가 가족과 생활을 곰곰이 곱씹으며 그동안의 삶을 반추하는 전반부의 작품과 꿈과 현실의 경계를 넘나드는 김도연 특유의 환상성이 발휘된 후반부의 작품으로 나눌 수 있다. 전반부의 계열을 대표하는 「전재와 문재」는 열흘이나 되는 긴 추석 연휴 동안 일어나는 일들을 그리는 동시에 작가로 살아가는 일의 만만찮음을 은근히 내비친다. 소설가인 주인공은 날마다 작업을 하기 위해 향하던 도서관이 연휴를 앞두고 문을 닫자 무슨 일을 하면서 긴 연휴를 보내야 할지 고민한다. 그런 와중에 추석 전날에 ‘소설 심사’를 맡게 되면서 그는 집에 늦게 가도 될 핑계 하나가 생겼며 다행스러워한다. 하지만 그렇게 생각한 것도 잠시, 여러 권의 책들 가운데 단 하나의 수상작을 선정하는 일은 어쩐지 그를 불편하게 만든다. “똑같이 책을 냈는데 상을 받는 사람과 받지 못하는 사람으로만 세상이 나뉜다는 생각이 밀물처럼 쳐들어”(45쪽)오면서 그간 자신이 어떤 작품을 써왔고 어떤 평가를 받아왔는지 돌이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게 되었기 때문이다. 하루도 허투루 보내지 않고 늘 애써서 살아왔지만 막상 뚜렷한 결과물을 손에 쥐고 있지 않다는 생각은 그가 심사를 마치고 전재 터널과 문재 터널을 넘어 집으로 가는 동안 더 짙어진다. 하지만 막상 집에 도착해 오랜만에 가족과 친척들과 둘러앉아 옛이야기를 나누면서 그는 자신 안에 어떤 평안함과 애틋함이 뭉근하게 피어오르는 걸 느낀다.
중년 화자를 내세운 또다른 작품인 「말벌」은 주말농장을 배경으로 일어나는 한 편의 소동극이다. 박과 장과 강은 각각 배추와 고추와 고구마를 키우며 가까워진 사이이다. 여기에 빠질 수 없는 건 바로 술. 세 사람은 일을 하다가 지치면 슬그머니 박의 원두막으로 모여들어 중년의 고됨과 부침을 안주 삼아 술판을 벌인다. 그날도 세 사람은 평소처럼 원두막에 앉아 한창 술을 마시던 중이었다. 뜻대로 풀리지 않는 인생을 한탄하다가 박은 얼떨결에 손에 들고 있던 막걸리병을 내던졌고, 막걸리병이 원두막 천장에 매달린 말벌집을 때리는 순간 허공이 노랗게 변하더니 말벌들이 달려들기 시작한다. 박은 허겁지겁 원두막에서 뛰어내려 달려나가지만 그사이 벌에 쏘였는지 그만 의식을 잃고 쓰러지고 만다. 그런데 정신을 차리고 다시 눈을 떴을 때, 박은 무언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챈다. 무엇인가에 묶여 있는 듯 손과 발이 제대로 움직여지지 않는데다 마치 자루 속에 갇혀 있는 듯 답답함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밖에서는 구슬픈 울음소리가 들려오기까지 한다. 곰곰이 생각하던 박은 그 소리가 바로 자신의 죽음을 슬퍼하는 아내와 자식들의 곡성이라는 걸 깨닫는다. 그러니까 박은 지금 관 속에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죽은 사람도 소리를 듣고 생각을 하고 가려움을 느끼나”(「105쪽」). 자신이 지금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건 아직 죽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닌가. 그 생각이 든 순간 박은 온 힘을 다해 힘차게 이마로 관뚜껑을 들이박기 시작한다. 박은 과연 관 밖으로 나올 수 있을까? 박은 정말 죽지 않은 게 맞을까?
후반부에 놓인 네 편의 소설은 여기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꿈과 환상을 적극적으로 작품에 녹여낸다. 「OK목장의 여름」은 흰구름아파트에 거주하는 인물이 어느 날 집행관으로부터 문서를 받으며 시작된다. 문서의 내용은 이렇다. 집주인이 집을 경매에 내놓았다는 것. 그는 곧바로 집주인에게 연락을 하지만 집주인은 전화를 받지 않는다. 쿵덕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고 다른 방법이 있는지 찾아보지만 좀처럼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는다. 그도 그럴 것이 걸어서 십 분 거리에 있는 ‘OK목장’에 다니는 그에게는 흰구름아파트만큼 살기에 좋은 집도 없기 때문이다. 사면초가에 처한 그의 답답한 심정을 대변하듯 그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이 근무하는 OK목장으로 수상한 사람이 찾아오는 묘한 꿈을 꾸기 시작한다.
「말 머리를 돌리다」에는 양떼 대신 말 한 마리가 등장한다. 성공해 고향으로 내려와 말 목장을 운영하는 초등학교 친구 Y가 오랜만에 동창회를 하자며 친구들을 자신의 목장으로 불러모으고, 젠체하며 으스대는 Y의 말을 듣기 싫어 그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와 목장을 기웃거리다가 마방에 들어선 참이다. 그리고 그곳에서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갈색 말 한 마리를 마주한다. 그가 조심스럽게 말의 눈을 쳐다보며 볼을 긁자 말은 순순히 그의 손길에 볼을 맡긴다. 용기가 생긴 그는 한 발 앞으로 다가가 말의 등에 안장을 얹고 등잔에 왼발을 올려놓은 후 훌쩍 뛰어오른다. 난생처음 말 위에 올라타게 된 그는 심호흡을 크게 한 뒤 등자에 얹어놓은 발로 말의 옆구리를 차며 소리를 친다. 말을 타며 충만한 자유로움을 느끼던 것도 잠시, 아무리 해도 말이 멈추지 않고 끊임없이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한다. 마치 꿈속과 현실의 경계를 가르듯이. 인간관계와 직업, 거주 환경 등 어느 한 문제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없는 우리에게 『빵틀을 찾아서』는 이처럼 아무렇지 않은 듯 쾌활하게 환상을 부려놓으며 잠시 그곳에서 벗어날 수 있게 해주는 활로로, 또는 핍진하게 일상을 그려내어 삶을 제대로 마주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온다.
★
이번 소설집에 수록된 아홉 편의 소설을 다시 들여다보니 등장인물들은, 아니 나는 덩치만 커졌지 아직도 빵틀을 찾아 찢어진 우산을 쓴 채 마을의 집들을 방문하는 소설 속 소년에게서 벗어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까 이 소설들은 소년이 미처 예상하지 못한, 어른이 되어서도 빵틀을 찾아 떠도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그 표정과 풍경은 지난하기 이를 데 없다. 그런데…… 대체 빵틀은 어디에 있는 것일까. _‘작가의 말’에서
■ 책 속에서
그게 세상의 순리란 생각이 들었다. 장강(長江)의 뒤 물이 앞 물을 밀며 바다로 흘러가는 것. 멈추고 싶어도 멈출 수 없는 인생사였다.(「전재와 문재」, 54쪽)
그 역시 이 낯선 도시로 이사온 지 이제 사 년이 되어가고 있었는데 어디에서도 아는 사람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만큼 이 도시는 그와는 아무런 인연이 없는 곳이었다. 그가 이곳을 거주지로 택한 이유 역시 아는 사람이 없으니 부대끼지 않고 조용하게 살아갈 수 있겠다는 판단에서였다.(「탁구장 근처」, 63쪽)
이젠 노안 때문에 돋보기 없인 자그마한 글자는 읽을 수도 없었다. 차라리 멀리 있는 게 보이지 않고 가까이 있는 게 보였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수시로 들었다. 한때는 가까이 있는 건 무시해버리고 멀리 있는 것들을 좇느라 세월을 탕진했다. 그 세월을 건너오면서 그래도 깨달은 게 있다면, 멀리 있는 것은 아무리 달려가도 언제나 신기루처럼 멀리 있어 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한때는 잡을 수 있을 거라 고집했는데 그건 착각이었다.(「말벌」, 102쪽)
부모님의 농사일을 이어받겠다는 생각은 단 한 번도 한 적이 없었다. 그런데 왜 나이들어, 비록 자그마한 밭이지만 도시의 한 귀퉁이 농장에서 농사를 시작했는지 스스로도 납득하기 힘들었다. 농장에 들이는 시간과 돈, 힘이라면 차라리 시장에서 사서 먹는 게 낫다는 걸 모르지 않음에도 말이다. 정말 이상했다. 그런데 농장에 오면 왠지 마음이 편해졌다.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말벌」, 114쪽)
“끌어주는 사람 없이 초보자가 무모하게 타는 건 대단히 위험해. 까딱 잘못하면 말에서 떨어질 수 있거든. 어떤 사람은 말에서 떨어져 전신이 마비된 경우도 있다니까. 타는 방법도 제대로 배워야 하지만 그보다는 잘 떨어지는 방법을 먼저 배워야 돼. 그래, 낙법! 뭐랄까…… 우리네 인생도 그런 거잖아.”(「말 머리를 돌리다」, 195쪽)
“야야, 달리는 말은 달리게 놔두는 게 세상사 진리야. 억지로 멈추게 만들면 탈 나는 것도 세상사 진리고.”(「말 머리를 돌리다」, 215쪽)
우공이산(愚公移山), 그래, 우공이 산을 옮기는 일을 자신이 직접 하고 있다는 자부심마저 들었다. 우공이 삽과 곡괭이를 사용해 집 앞의 산을 옮기려 했다면 봉태는 포클레인의 운전석에 앉아 묵묵히 산을 옮기는 거였다. 그런 깨달음에 도달하게 되면서 비로소 대학에 간 친구들이 부럽지 않았고 넥타이를 매고 회사에 다니는 사람들 앞에서도 떳떳하게 행동할 수 있었다. 언젠가부터 봉태는 처음 만나는 사람들이 무슨 일을 하냐고 물으면 산을 옮기는 일을 한다고 말한 뒤 수줍은 미소를 지었다.(「마을에서 제일가는 사나이」, 250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