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시리즈
한국 문학의 눈부신 결산
소설집 9종, 앤솔러지 시집 1종 출간
이 책은 경기문화재단 주관 ‘2022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으로, 경기도에 거주하는 문인들에게 창작지원금을 지원, 그들의 작품을 시리즈로 출간하는 기획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올해 출간되는 시리즈는 9명의 소설가들이 참여한 소설집 9권, 13명의 시인들의 신작시를 묶은 앤솔러지 시집 1권으로 구성돼 있다. 삶에서 온몸으로 건져 올린 발칙하고 싱싱한 언어들, 시대를 통찰하는 빛나는 감수성이 오늘의 소설, 시의 면면을 보여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올 한 해 우리 문학의 흥미로운 결산 중 하나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아주 오랫동안 나는 미래가 주는 온기와 평화를 그리워했다.”
미래를 보내며 미래를 기억하는 사람들―「스물여섯 개의 돌로 남은 미래」
「스물여섯 개의 돌로 남은 미래」는 주인공 ‘나’가 옛 연인 구가 돌보던 고양이 ‘미래’의 장례식장에 찾아가 미래를 애도하고 과거를 추억하는 이야기이다. 역 매표소에서 일하던 ‘나’는 열차 기관사인 구와 사귀었다가 지금은 헤어진 상태다. 소설에서 그녀는 자신이 매표소 직원이 된 이유를 이렇게 설명한다.
기차를 타고 여행 가고 싶어서 매표소 직원이 됐다. 어딘가로 떠나는 사람들에게 목적지를 팔 수 있으니까. 목적지가 있다는 것 자체로 삶이 그리 공허하지는 않을 테니까. 나는 삶의 목적지를 가지고 싶었고, 언제든 떠날 수 있는 삶을 살고 싶었다. _26쪽
하지만 그런 삶은 허락되지 않았다. 그녀는 결혼을 약속했던 한 남자에게 배신당해 파혼을 하고, 타인에 대한 신뢰감을 상실한 채로 지내게 된다. 그러다 우연히 길고양이 밥을 주는 구를 만나게 되었고, 온전한 믿음이 비로소 회복되려는 찰나 짧은 연애 끝에 헤어진다. 시간이 흘러 구는 고양이 미래를 보내는 마지막 자리에 그동안 미래를 돌봐주었던 그녀와 구의 새 여자친구 지안을 초대한다. 미래의 죽음을 애도하는 자리에 과거와 현재의 시간이 위태위태하게 포개진다.
나는 그 누구에게도 무엇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럼에도 그 어느 때보다 열렬하게 믿음과 신뢰를 회복하고 싶었다. 그래서였을까. 구가 믿음이니, 신뢰니 하는 말을 하면 마음이 조금씩 환해졌다. 어쩌면 나는 그 말 자체를 사랑했던 것이 아니었을까. _14쪽
나는 박제된 미래를 상상했다. 가슴이 저렸다. 생명력이 없어서 가슴 아팠고, 미래가 보이지 않아 암담했으며, 그렇게 해서라도 살아가고자 하는 현실이 가여웠다. 누군가를 보내야 한다는 것은 대안이 없는 일인지도 몰랐다. _22쪽
“너무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공적인 거리”
삶에 맞춤한 관계의 무게를 견디는 법―「사소한 사실들」
두번째 수록 단편 「사소한 사실들」은 식당 창고방에 살고 있던 주인공이 아는 언니가 룸메이트를 구한다며 올린 글을 보고 연락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녀는 현재 식당 청소와 설거지를 해주는 대가로 주인 이모가 무료로 제공한 식당 창고방에 살고 있다. 하지만 그녀가 거기 머물 수 있는 시간은 밤 열한 시부터 아침 여섯 시까지에 불과해서 쉬는 날엔 “도서관을 배회하거나 공원을 배회”하며 하릴없이 시간을 보내야 하는 처지다. 그녀가 도착한 옥탑방 셰어하우스는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비좁고 불결한 곳이지만 그녀는 낙담하거나 실망하지 않는다.
괜히 어깨가 으쓱했다. 방에서 나갈 단서를 찾은 것만 같았고, 거처라고 이름붙일 만한 공간을 찾은 것만 같았다. 아침마다 사라지는 공간이 아니라 늘 머물러 있는 공간을. (중략) 그것이 무엇이든 그저 나는 좋았다. 청소만 하면 해결될 일이니까. 정말 무서운 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_50~51쪽
‘셰어하우스’는 하나의 집을 여러 사람이 공유하는 주거 형태를 뜻한다. 원룸 생활에 비해 넓은 생활공간을 누릴 수 있다는 장점이 있지만 다른 사람과 함께 거주하다 보니 사생활에 대한 보호는 어느 정도 포기해야 한다. 작품 속에서 그녀와 언니, 그리고 그녀의 룸메이트 민은 그 절묘한 거리를 용케 유지한다. “불만 켜지면 사라지는 바퀴벌레처럼” 서로를 피하다가도 이따금 함께 치킨에 맥주를 마시거나 삼겹살을 구워 소주를 마시며 서로의 온기를 나눠 갖기도 한다. 그녀는 셰어하우스 생활에 따르는 딱 이만큼의 거리감에 안도한다. 이 미니멀한 관계의 간소함은 언제든 이동할 수 있어야 하기에 진지하고 무거운 관계에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는 그녀의 처지와 닮아 있다.
하지만 이들의 짧은 동거는 보증금을 천만 원 올려달라는 주인 아주머니의 재계약 조건으로 인해 위기를 맞고 그녀는 익숙한 낙담에 빠진다.
“창고방으로부터 탈출했다고 생각했는데 제자리걸음이었다니. 달리고 달려도 결코 벗어날 수 없는 환경, 이게 내 삶이라는 사실을 잊고 지냈다. 내게 집이란 장바구니에 담을 수 없는 소망일 뿐이었다. 이제 소망 따위는 꿈꾸지 말아야지.” _74~75쪽
모처럼 맞이한 안온한 정착 생활이 신기루처럼 사라질 위기에 처한 그때, 그녀는 언니와 민에게 난데없는 제안을 한다. 그것은 바로 함께 싱가포르 여행을 떠나자는 것. 이 난데없는 제안은 과연 이루어질 수 있을까.
온기와 허기, 친밀감과 거리감 사이를 잇는 성장 서사
이 소설집은 온기와 허기, 친밀감과 거리감 사이를 잇는 개인의 성장 서사이자 오늘날 고립감과 소외감을 경험하고 있는 전 세대를 향한 이야기를 품고 있다. 주인공들이 겪고 있는 삶의 균열은 지금 우리에게도 유효한 문제이다. 작중 타인에 대한 “믿음과 신뢰를 회복”하고 싶었다거나 “사람과의 정겨운 대화에 굶주려 있었다”는 ‘나’의 고백은 우리 모두의 마음 한구석에 쉽게 “채워지지 않았던 허기”가 도사리고 있음을 깨닫게 만든다.
어쩌면 그게 아닐지도 몰랐다. 혼자였기 때문이었다. 혼자여서 삶이 무서웠고 혼자여서 삶이 막막했으며, 혼자여서 함께 살아갈 방법을 알지 못했다. 이들과 함께라면 삶을 조금 더 버텨낼 수 있을 것이다. 장바구니도 비울 수 있을 것이고, 모자라는 것을 채울 수도 있을 것이다. _78쪽
타인과의 교류, 교감이 점점 서툴고 어려워지는 이때에 불가피한 고립과 소외는 일상적 재난일지 모른다. 그리하여 작가는 이 소설집의 마지막에서 “우리가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아무튼 같이 해보자고, 서로 비교하지 말자고, 같은 고민을 하는 우리는 같은 레인에 서 있지 않느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