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시리즈
한국 문학의 눈부신 결산
소설집 9종, 앤솔러지 시집 1종 출간
이 책은 경기문화재단 주관 ‘2022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으로, 경기도에 거주하는 문인들에게 창작지원금을 지원, 그들의 작품을 시리즈로 출간하는 기획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올해 출간되는 시리즈는 9명의 소설가들이 참여한 소설집 9권, 13명의 시인들의 신작시를 묶은 앤솔러지 시집 1권으로 구성돼 있다. 온몸으로 건져 올린 발칙하고 싱싱한 언어들, 시대를 감싸 안는 빛나는 감수성이 오늘의 소설, 시의 면면을 보여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올 한 해 우리 문학의 눈부신 결산 중 하나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모든 것은 고양이 그림에서 시작됐다!
사실과 허구가 교차하는 순간―「검은 고양이」
「검은 고양이」는 문헌학자로 보이는 작중 화자가 마치 살아 있는 듯한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그림 속 고양이의 비밀을 추적하는 이야기로, 텍스트 바깥의 역사적 사실과 허구적 역사가 교차하는 과정을 흥미롭게 보여준다. 평소 고서적과 골동품을 모으는 취미가 있는 ‘나’는 자신이 모은 헌책들 가운데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홍문원』이라는 문헌에 대한 설명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 책을 읽던 ‘나’는 아편 밀매자들이 만주에서 조선으로 아편을 운반하기 위해 사용한 기상천외한 수법 중 하나, 가령 “편지나 액자 속에 마약을 넣어서 운반했다”는 기록을 접하고 벽면에 걸려 있는 그림을 바라보며 호기심을 느낀다.
편지나 액자 속에 마약을 넣어서 운반했다는 말이다. 나는 그 글을 읽으면서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았다. 믿기지 않았지만 그 그림의 뒷면에 ‘一九四一年’이라는 숫자가 적혀 있었기 때문이다.
반드시 마약 때문은 아니었지만, 나는 액자를 뜯어보고 싶었다. 그림이 방에 걸리고 나서 생긴 일련의 일들에 대한 미신적인 의심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호기심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_12~13쪽
청계천 벼룩시장에서 어느 노인에게서 산 그 그림에는 베르나르 뷔페 풍의 고양이 그림이 그려져 있고, 서명도 낙관도 없을 뿐 아니라 액자의 뒤편에는 연필로 “一九四一年”이라고 쓴 글씨가 희미하게 남아 있어 ‘나’의 호기심을 자극하기에 충분하다. 비범해 보이는 그림을 단돈 팔천 원에 구입한 ‘나’는 매우 흡족한 기분으로 집에 돌아와 액자를 벽에 걸어둔다. 그리고 얼마 뒤 기묘한 일이 벌어진다. 어느 날 그림 속 고양이가 마치 살아 있는 듯 ‘나’를 응시하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어느 날인가 일찍 잠자리에 들어 새벽녘에 잠이 깨었다. 주위는 고요했고, 창문으로 들어오는 희미한 불빛만이 방안에 있는 사물의 윤곽을 보여주고 있을 뿐이었다. 그때, 무심결에 바라본 그림 속에서 고양이의 눈이 파랗게 빛나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때의 심정이란. 분명히 파란빛을 내뿜고 있었다. 야수에게서 볼 수 있는 그런 눈빛이었다._19쪽
처음엔 원고 마감에 쫓기며 신경이 쇠약해진 탓이라 여겼으나, 이웃으로부터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었다며 누가 고양이를 키우는 것 같다는 말을 전해들은 뒤 ‘나’는 그것이 단순한 환영이 아님을 깨닫는다. 이윽고 액자를 뜯어보고 일제강점기에 쓰였던 “朝鮮光州府本 町1丁目 湖南書院 電話 350番”이라는 주소를 발견한다. 모종의 비밀과 마주하게 된 ‘나’는 뜻밖에도 거리가 멀다는 이유로 주소지의 호남서원을 찾는 일을 뒤로 미룬다. 미스터리 장르의 외양을 한 이 소설이 조금 다른 결을 갖게 되는 것은 바로 이 지점이다. 이제 ‘검은 고양이’ 그림은 우연한 사건을 계기로 허구와 현실을 잇는 장치가 되어 새로운 전개를 불러낸다. 수십 년 동안 감춰져 있던 안타까운 역사적 진실이 마침내 얼굴을 드러낸다.
그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나는 그림의 비밀을 알 수 없었을 것이다. 지난 역사의 갈피를 확인한다는 것은 흥미로우면서도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그것도 아주 우연히 맞닥뜨린 사건 속에서. _24쪽
일거수일투족은 물론 감정까지 감시당하는 시대의 비극
현실과 환상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순간―「쥐의 미로」
「쥐의 미로」는 화자인 ‘나’가 불면증을 겪으며 쥐의 환각을 보게 되면서 소설 속 현실과 인물의 환상 사이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이야기로, 카프카적인 부조리극을 연상케 하며 우리 시대의 실존적 공허감을 묘파해낸다.
시간강사를 전전하던 ‘나’는 결혼을 한 뒤 생활이 빠듯해지자, 강사 월급의 네 배에 달하는 월급을 준다며 지인이 소개한 CCTV 모니터링 일을 시작한다. 업무는 단순하다. 전국에 설치된 약 이천만 대의 감시 카메라 가운데 ‘나’에게 할당된 서른여섯 개의 화면을 매일 열두 시간 이교대로 관찰하는 것이다. 그런데 수상쩍은 점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보안 유지를 위해 관리자인 김 부장을 제외하면 감시자들은 고유의 일련번호로 불리고 서로 만나지 못하도록 통제된다.
김 부장이 앉아 있는 책상 앞쪽으로는 영화관의 스크린처럼 넓은 벽면에 수백 개의 모니터가 달려 있고, 화면이 스스로 움직이고 있었다. 그곳은 말하자면 종합상황실이었다. 조금 전에 얼굴이 클로즈업된 소년은 컴퓨터의 자동 인식 프로그램에 의해 얼굴의 윤곽, 형태, 특징, 옷의 형태와 색상, 신발의 모양과 특징 등 외모에 관한 모든 것이 자동으로 입력되고 저장된다. 그 소년이 어느 곳으로 가든, 카메라에 걸리기만 하면 카메라는 자동으로 그 소년의 행동을 추적하게 되는 것이다. _44쪽
감시자들은 서른여섯 개의 모니터와 책상, 필기구, 물 한 병 등 업무에 필요한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는 방에서 화면 속 인물의 표정을 보고 감정을 수기로 기록한다. 컴퓨터가 인물의 동선은 자동으로 추적해주지만, 감정까지는 분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소설은 독자에게 다음과 같은 수수께끼를 제기한다. 시민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고 감정까지 기록하는 이 기관의 정체는 무엇인가. 감시의 대상은 누구이며, 감시의 목적은 무엇인가.
꽤 많은 인물들이 이 카메라에 나타났다 사라졌지만, 때로 자신이 감시당하고 있음을 눈치챈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늘 카메라가 있을 만한 곳을 쳐다보기 때문에 나와 눈이 마주치는 일이 잦았다. 그렇다고 그들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다만, 카메라가 없을 만한 곳을 찾아다녀야 하는데, 외딴 산골이 아닌 다음에는 어디를 가든 카메라의 눈길을 피할 수 없었다. _48쪽
주목할 것은 일을 시작한 지 십여 년이 흐르는 동안 ‘나’는 이 기관의 조직적인 감시에 아무런 의문을 갖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의 무의식은 자신이 실험실 속 한 마리 쥐라는 사실을 감지한 듯 기이한 꿈을 꾼다. 꿈과 현실을 분간하기 어려운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는 혼몽한 상태로 쥐의 환영을 보게 된다. 쥐는 도처에 나타난다. 급기야는 며칠간 감시해온 화면 속 여성의 주변에서도 우글거리는 쥐떼를 보게 된다.
순간, 나는 너무 놀라 의자에 앉은 채 뒤로 벌렁 자빠지고 말았다. 입은 벌어져 다물어지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나오지 않았다. 충격이었다. 보면서도 믿을 수 없는 일이었다.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화장실 안에는 쥐들이 우글거렸다. _56쪽
그런데 꿈과 현실, 모니터 화면을 넘나드는 쥐의 환영보다 ‘나’를 더 충격에 빠트리는 것은 따로 있다. 화면 속 여성의 뒤편으로 아내가 의문의 남성과 만나는 장면이 찍힌 것이다. 불륜의 정황을 포착한 ‘나’는 처음으로 감시자의 규율을 깨고 방을 나서 종합상황실로 향한다. 나는 과연 모종의 음모들 속에서 진실을 찾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