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제작 「김장」은 제목에서도 그렇듯 겨울 냄새가 나는 작품이다. 도시에 살던 주인공이 김장철을 맞아 동생과 함께 시골집을 찾는 것으로 시작한다. 병후의 할머니 혼자 감당하기 어려운 겨울맞이 연례행사를 돕기 위해서다. 물론 “외가를 통틀어 회사고 가게고 아무데도 안 가는” 잉여인력이기에 김장이라는 이벤트에 차출된 셈이지만, 그로 인해 유년 시절의 기억들을 ‘음식’이라는 매개를 통해 돌아보게 된다.
나’는 외삼촌의 장롱에서 김전일 만화책 시리즈를 들춰보며, 토막 살인의 범인에 대해 떠올려보지만 결말은 끝까지 생각나지 않는다. 삼촌의 앨범을 꺼내 봐도 거기에는 하루 동안 “자살하려는 사람을 세 명이나 쳐버”린 채 말을 잃어버린, 그리하여 친인척의 관계 속에서도 소멸하여버린 흐릿한 얼굴이 등장할 뿐이다. 옆집 진수네 소는 진작에 사라졌고, 소를 돌보던 진수의 아빠도 오래전에 죽었다. 어릴 때 함께 놀았다는 옆옆집 손자 ‘성철’도 말라가는 냇가에서 목을 매고 죽어버렸다.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 옛 친구의 부고를 겨우내 생존을 위한 음식들을 만들면서 전해 듣는다.
「난쟁이 그리고 에어컨 없는 여름에 관하여」는 사진을 찍는 ‘나’가 ‘아티스트 네트워킹’이라는 그럴듯한 이름의 파티 현장을 사진으로 기록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가서 만나게 된 제이라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에서 시작한다. ‘나’는 제이의 외모적 특징을 유심히 머릿속에 기록해두며 제이라는 친구에 대해 호기심을 갖는다. 친구의 친구의 친구로 만난 제이는 맥주도, 아티스트도 싫어하는 인물로 소개되지만, 아티스트 무리들이 모이는 각종 술 파티마다 빠짐없이 발견되는 인물이다. 또 제이는 소아암 완치의 이력을 가지고 있다. 생존해 있다는 것만으로도 소아암 환자 부모들의 시선을 사로잡았던 제이는, 소아암을 앓은 흔적을 고스란히 외모로 간직하고 있다. 콤플렉스로 남을 법한 탈모로 인해 땀 흘리는 여름날의 파티 속에서 유독 눈이 가는 인물이다.
그 무렵, 화자인 ‘나’는 꿈인지 환각인지 모를 장면들을 마주하는 경험을 반복하게 된다. 작은 사람의 형체로 보이는데, 벌레나 쥐로 오인될 정도로 사이즈가 작은 어떤 형체가 집안에 침입해 들어오는 것으로 보이는 괴현상이었다. ‘작은 형체’는 전 세입자가 뚫어놓은 에어컨의 배관 ‘구멍’을 통해 나의 영역에 진입하려 하면서, 자신의 크기에 “걸맞은 작은 목소리”를 전한다. 인간의 언어를 공통으로 사용하는 유사 존재의 인간이지만, 인간의 언어로는 일관되게 설명하기 어려운 그 대상을 ‘나’는 어찌 부를지 난감해한다. 그 ‘작은 형체’는 “……엔 날개가 없다. ……은 추락”이라는 알 수 없는 말을 반복적으로 송신하고 있다. 애써 귀기울여봐도 그 작은 소리는 “……엔 날개가 없다. ……은 추락” 정도의 중얼거림으로 들릴 뿐이다. ‘나’는 그 ‘작은 형체’가 공백으로 비워둔 언어의 자리를 숙고하며, 그 위치에 어떤 언어가 들어갈 수 있을지 곰곰이 떠올려보게 되는데……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 시리즈
한국 문학의 눈부신 결산
소설집 9종, 앤솔러지 시집 1종 출간
이 책은 경기문화재단 주관 ‘2022 경기예술지원 문학창작지원’ 선정작으로, 경기도에 거주하는 문인들에게 창작지원금을 지원, 그들의 작품을 시리즈로 출간하는 기획의 결과물이기도 하다. 올해 출간되는 시리즈는 9명의 소설가들이 참여한 소설집 9권, 13명의 시인들의 신작시를 묶은 앤솔러지 시집 1권으로 구성돼 있다. 온몸으로 건져 올린 발칙하고 싱싱한 언어들, 시대를 감싸 안는 빛나는 감수성이 오늘의 소설, 시의 면면을 보여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다. 올 한 해 우리 문학의 눈부신 결산 중 하나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