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하고 존경스러운 것을 사랑하는 것은 쉽고도 쉬운 일이다.
경멸의 대상을 사랑하는 것이야말로 진짜 사랑, 진짜 윤리이다.”
인간과 문학과 시대를 거듭 끌어안는 우정으로서의 문학-장(場)
문학평론가 서영채의 네번째 평론집 『우정의 정원』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2012년 세번째 평론집 『미메시스의 힘』 이후 꼬박 10년 만의 신작 평론집이다. 한국문학장의 든든한 버팀목과 같은 존재이자, 다정한 목소리로 인문학의 세계로 인도하는 길잡이이기도 한 평론가 서영채. 그가 앞장서서 불을 밝히고 또 헤쳐 나간 문학의 궤적이 동시대 한국문학의 이정표가 된다는 사실은 이제 자명해 보이기까지 한다. 논리는 가볍게, 느낌은 단단하게, 문장은 부드럽게. 과연 ‘서영채라는 수사학’이라고 명명해도 좋을 그의 특장의 글쓰기는 문학을 닮아 그리고 글쓴이를 닮아 여전히 품이 넓고 나긋나긋하다.
이번 책의 제목 ‘우정의 정원’은 에피큐리언들의 공동체를 지칭하는 ‘케포이필리아(Kepoi-philia)’에서 왔다. 이는 “낙천적인 유물론자들의 생활공간”이자, 이곳에서의 우정은 “함께 농사지으며 지식을 몸으로 탐구하는 공동체의 공기”(517쪽)를 뜻한다. 그의 표현을 빌려 “한 발 더 나아가자면” 지난 30여 년간 서영채가 만들고 쓴 수많은 ‘지음’ 속에서 만난 이들이 모두 우정의 상대였음을, 그들과 만나 함께 축성해나간 장(場)의 또다른 이름이 바로 정원이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으리라. 잎과 가지가 무성한 아름드리 거목에서부터 연둣빛 잎을 피우기 시작한 어린나무에 이르기까지. 서영채가 10년에 걸쳐 가꾼 이 우정의 정원 속에는 고유한 아름다움을 제각기 품은 문학의 결실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편지 말미에, 제게 주신 우정이라는 단어가 감사했습니다.
곰곰이 헤아려보니, 우정 옆에 있게 될 단어들이 제법 소복하더군요. 친구, 벗, 동료, 동지. 그러니까, 같이 노는 사람, 마음을 나누는 사람, 일을 함께하는 사람, 뜻을 함께하는 사람들이네요.
에피큐리언들의 공동체 ‘케포이필리아’, ‘우정의 정원’은 제가 좋아하는 말입니다. 낙천적인 유물론자들의 생활공간이죠. 여기에서 우정은, 함께 농사지으며 지식을 몸으로 탐구하는 공동체의 공기 같은 것이 아닐까 합니다.
몸은 비록 시장에 있으나 마음으로 마시는 공기는 그 들녘의 것입니다. 우정이라는 단어가 문학과 잘 어울린다고 생각하는 순간입니다. _「우정의 정원」(517쪽)
“역사가 공동체적 기억의 기록이라면, 문학은 한 공동체의 마음의 기록이다.”
논리는 가볍게, 느낌은 단단하게, 문장은 부드럽게
날카로움보다 더욱 깊이 파고드는 부드러움의 힘
『우정의 정원』은 총 4부로 구성되었다.
이 책의 1부는 세계문학-고전의 가치를 조망하는 작업을 시작으로, 이 책에서도 가장 힘있고 야심찬 글로 채웠다. 「1990년대, 시민의 문학」은 ‘형용사-문학’, 즉 “문학이라는 단어를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로 사유하는 것” “중요한 것은 문학이 아니라 문학적인 것”(47쪽)이라는 서영채의 문학관을 집약적으로 만나볼 수 있는 장이다. 더불어 「충동의 윤리」는 김윤식이라는 한국문학사의 한 문제적 인물을 집요하게 추적하고 분석하는 동시에 헌사로까지 뻗어나가는 역작이다. ‘쓰기-기계’에서 ‘실패한 헤겔주의자’로 가닿는 김윤식에 관한 이 깊이 있는 분석은 평론가 서영채가 오랜 시간 천착해온 ‘윤리’와도 감동적으로 연결된다.
2부는 섬세한 수사학자로서의 면모를 만끽해볼 수 있는 글들로 채워졌다. 특히 「2019년 가을, 은희경에 대해 말한다는 것」은 플라톤을 경유해 은희경의 데뷔작인 『새의 선물』에서부터 근작 『빛의 과거』까지를 분석해내는 촘촘한 작가론이다. “수사학은 을들의 것”이라는, “절대적 힘을 가진 존재의 화법은 단순할 수밖에 없”(208쪽)다는 그의 문장-분석은 지금의 현실과 공명하는 것은 물론 문학의 존재 이유와도 이어지는 듯하다.
문학이 문학으로 자명해지는 순간, 테두리가 쳐지고 특정되는 순간, 문학적인 것은 휘발해버립니다. 고리타분해지고 진부해지는 것이지요. (…) 경계를 넘어 유동하는 것이라면, 그리하여 우리의 앎과 마음, 공감과 느낌의 영역을 넓히고 깊게 할 수 있다면, 그런 것이야말로 우리가 기려야 할 가치로서의 문학이겠지요. 그런 걸 일컬어 문학적인 것이라고, 액체 문학이라고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것이지요. _「1990년대, 시민의 문학」(49쪽)
3부는 최은영, 백수린, 이승우, 이문구 등의 작품론에 할애했다. 특히 「순하고 맑은 서사의 힘」 「신진기예 백수린의 작가적 가능성」은 현재 한국문학장의 최전선에 위치한 두 작가(최은영, 백수린)의 첫 단행본 해설로 먼저 선보인 글이다. 더불어 「이문구, 고유명사 문학」은 이제는 전설이 된 작가의 업적을 기리는 작품론이다. “집합적인 일반명사로서의 문학이 아니라 고유명사로서의 문학” “소설과 시와 희곡과 산문 등을 모두 빼내도 그 자리에 남아 있는 어떤 것으로서의 문학” “구체적 장르나 작품들이 들어서게 될 어떤 원초적인 자리로서의 문학”(365쪽)으로 정의한 ‘고유명사 문학’은 이문구의 작품을 설명하는 문장인 동시에 작가들이 닿고자 하는 또는 닿아야 할 지향점을 제시하는 것으로도 읽힌다.
4부는 「텍스트의 귀환」 「국학 이후의 한국문학사와 세계문학」을 필두로 세계문학으로서의 한국문학을 그려보게 하는 글들이 자리했다. 끝으로 이 책의 표제작인 「우정의 정원」을 배치했다. 「우정의 정원」은 젊은 비평가인 양순모와 함께 주고받은 서신으로, ‘과도한 환대는 물론 부러 박대도 없는’ 우정의 정원을 형상화한 글쓰기에 다름 아니다. 함께 쓴 「1990년대, 시민의 문학」이자 그것의 후속으로도 읽히는 이 서신은 서영채 문학의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한자리에 모인, 이번 네번째 평론집을 갈무리하는 글로 전혀 아쉬움이 없다.
저에게 비평은 품이 많이 드는 작업입니다. 작품 속에서 새로운 텍스트를 발견하거나 혹은 생산하는 일이 곧 비평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비판이 아니라 이해와 옹호입니다. 옹호는 물론 사전의 의도가 아니라 결과적인 것이지요. 제 이런 태도는 저널리즘이 요구하는 비평 감각과는 거리가 있지요. 장단점을 밝히는 식의 비평적 균형잡기나 가치 평가 같은 것은, 제가 글쓰기를 통해 하고자 했던 것이 아닙니다. (…) 그러니까 작품에 결함이나 흠집이 있다면 그것을 지적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흠집을 메워가며 읽는 것, 그 흠집의 존재와 의미에 대해 성찰하는 것이 제게는 글쓰기를 통한 비평 행위였습니다. 너무 고답적인 것이 아니냐고 해도 어쩔 수가 없군요. 스스로가 의미 있는 일이라고 생각한 것이 곧 그것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저에게 비평은 작품을 원료로 하여 새로운 텍스트를 만들어내는 작업인 셈입니다. _「우정의 정원」(513쪽)
■ 작가의 말
누구도 차별하지 않는 유물론자들의 공간, 우정의 정원은 내가 좋아하는 말이다. 특히 우정이라는 말이 그렇다. 고백하자면 내가 서가 사다리 위에서 만난 사람은 루쉰만이 아니다. 그들과 나눈 마음을 지칭하기에 사랑이라는 말은 너무 무겁고 존중이라는 말은 너무 예의바르다. 우정이라는 말밖에 다른 대안이 없다. 내 마음속 우정의 정원은 뜰이자 밭이기도 하다. 생각을 위한 클리나멘의 저장고가 거기에 있다. 그 너머 개활지와 숲과 산은 내 발이 짧아 갈 수 없는 곳이다. 나는 사다리를 오를 테니, 벗들이여 그 소식을 들려주시라. 내가 경청하겠다.
2022년 12월
서영채
■ 책 속에서
사다리에 오르면 삶이 하찮아진다. 문제는 사다리 밑으로 내려오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삶도 책상도 사다리 밑에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글을 쓰려면 사다리 밑의 허접함과 눈을 맞추어야 한다. 자기 자신이 그 허접함의 일부여야 하고, 자기 몸에서 나는 냄새를 버티고 견뎌야 한다. 루쉰은 그것을 했고 그럼으로써 멋진 문학이 되었다. _「책머리에」(6쪽)
눈으로 볼 수 없는 것은 눈을 감아야 보인다. 고전의 고독이 바로 그 시선을 제공한다. 고전이라는 창고가 제공하는 것은, 인류가 떠나온 고향의 흙이 담겨 있는 수많은 관이다. 삶이 아니라 죽음이다. 도처에 죽음이고 죽음의 시선이다. 거기 들어가 눈을 감으면 고전의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죽음의 눈으로 보라. 그래야 삶이 생생해진다. _「죽음의 눈으로 보라」(25쪽)
어떤 관형어도 거부하면서 동시에 문학이라는 단어를 내용 없는 공허한 틀로 만들지 않는 것, 그것은 문학이라는 단어를 명사가 아니라 형용사로 사유하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문학이 아니라 문학적인 것이라는 생각이 바로 그것입니다. _「1990년대, 시민의 문학」(47쪽)
그는 자기 몸을 글쓰는 기계로 만들었다. 기계는 마음이 없으나, 기계가 된 사람의 몸은 마음이 없을 수 없다. 그런 기계-사람의 마음속에서 으뜸가는 것은 삶에 대한 경멸이자 문학에 대한 경멸이라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구태여 기계가 되어야 할 이유가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기계가 된 김윤식은 바로 그 경멸의 한가운데로 기꺼이 들어감으로써 경멸스러운 문학의 일부가 된다. 그것이야말로 삶과 문학에 대한 진짜 사랑이 아닐 수 없다. _「충동의 윤리」(113쪽)
문학 텍스트 속에 등장하는 서사는 현실 세계의 서사를 다시 본다는 의미에서 일종의 메타 서사이며 또한 두 번 꼬임으로서의 메타 역사라 할 수 있다. 문학작품이 만들어낸 서사는 역사(허구가 아니라 사실이라고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는 것)가 아니므로 역사 서술의 바깥에 있고, 그럼에도 독서 공동체가 선택한 특정 텍스트는 그 시대 역사의 핵심을 드러낸다는 점에서 역사라는 텍스트 형성에 참여한다. 문학 텍스트 속의 세계가 역사 바깥에서 역사의 핵심을 기록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런 까닭이다. _「인물, 서사, 담론」(139쪽)
수사학은 을들의 것입니다. 을이란 말할 것도 없이 갑을관계의 을을 뜻합니다. 갑은 수사학을 익히거나 구사할 이유가 없습니다. 아이러니, 위트, 패러디, 풍자, 유머 같은 것들, 은유나 제유나 억양법 같은 것들. 힘을 가진 사람은 그런 에두르기나 비틀기 같은 기법을 사용해야 할 이유가 없지요. 힘이 있는 사람은 그냥 생각나는 대로 말하면 그뿐입니다. 말을 잘해야 할 이유가 없어요. 혼자만 알아듣게 중얼거려도 그만입니다. 뭐라 지껄이든 그것을 알아듣고 해석하는 것은 을의 일입니다. _「2019년 가을, 은희경에 대해 말한다는 것」(209쪽)
예술의 세계 그 자체보다 중요한 것은 그 속에 새겨져 있는, 그것을 만들어낸 사람의 정신, 한 사람이 소설쓰기라는 행위를 통해 보여주는, 혹은 문학하기라는 실천의 영역을 통해 보여주는 정신의 폭이자 높이다. 우리가 이문구를 고유명사 문학이라고 부른다면 바로 그런 점 때문이다. _「이문구, 고유명사 문학」(384쪽)
지어낸 이야기가 아닌 경우에도 또한 하찮은 이야기가 아니라 대단한 이야기인데도 소설이라 불리는 것은, 마치 다트강의 하구에 있던 다트머스(Dartmouth)가 강의 흐름이 바뀌어 다트강 하구에 있지 않은데도 여전히 다트머스라 불리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현재 한국의 소설 작품들 속에서 ‘하찮은 이야기(小說)’의 모습이나 ‘지어낸 이야기(fiction)’만을 찾는다면 아무것도 찾지 못하게 될 수도 있다. _「국학 이후의 한국문학사와 세계문학」(483쪽)
우연을 인정할 뿐 아니라, 자기 실천의 대상으로 삼는 것이야말로 문학의 정치, 곧 정치적 문학의 반대편 언덕에 있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그 언덕의 중심에 있는 것이 문학의 윤리임은 두말할 나위가 없겠습니다. 윤리가 곧 정치라고, 한 발 더 나아가, 윤리야말로 곧 정치라고 해야 하겠습니다. 그 정치의 바탕을 이루는 것이 반성이라 함은 더 강조할 필요가 없겠습니다. _「우정의 정원」(514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