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언가를 남기려고 시를 쓰는 건 아니다.
속절없이 살며, 살아낸 시간을 시로 쓸 뿐이리라.
인생의 꽃같이 아름다운 시절이 그 쓰는 시간에 있으리라.”
공허하고 가난한 마음일지라도
우리에게 새하얀 종이만 있다면 일상은 모든 순간 시가 된다
시집 『내가 사랑하는 나의 새 인간』『희망은 사랑을 한다』『스미기에 좋지』 등을 통해 여러 대상과 그를 향한 마음들을 탐구해온 김복희 시인이 흰 종이 앞에 선 모험가에게 되묻는다.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 그러고는 곧장 ‘시… 시란 뭘까요’라며 혼자 고민에 잠기고 만다. 그래서 김복희 시인은 시쓰기를 가르치는 선생님으로서, 직접 행하는 시인으로서 시에 대해 말해보고자 자신의 일상 위를 둥둥 떠다니거나 한구석에 스며들어 있는 시(詩)적 경험들을 하나씩 채집하기로 했다.
산문집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는 김복희 시인이 메일링 서비스 <복희도감>과 라디오 연재 등을 통해 꾸준히 써온 시에 대한 다양한 면면을 담은 책이다. 책의 첫 페이지부터 마지막 페이지까지 저자는 시를 쓰고 싶다고 말하는 모험가들에게 흰 종이처럼 새하얀 응원을 보낸다.
누구에게나 살아가며 마음속에 맺힌 이미지가 있고, 공허하고 가난한 마음일지라도 한 폭의 종이는 가질 수 있다. 그리고 삶이 흰 종이 위로 겹치는 순간, 삶은 이해하기 어려운 방식으로 시가 된다. 하지만 그 순간은 우리가 흰 종이 앞으로 가야만, 손마디가 시리도록 새하얀 세계로 내디뎌야만 만날 수 있는 세계다. 그것이 김복희 시인이 시를 쓰고자 하는 모든 이를 ‘모험가’라고 칭하는 까닭이다. 무엇이든 쓸 수 있지만, 써야만 쓰는 존재가 되는 세계. 책을 통해 저자는 조심스럽지만 다정한 손길로 우리의 등을 밀어준다.
“나에게서 비롯되어 ‘나를 닮았지만 나는 아닌’ 시를, ‘극복하지 못한 병증으로 빚어진’ 시를, 나도 타인도 베일 듯 ‘위험하게 선명한 존재지만 신비로운’ 시를 쓰고 싶으신가요? 그럼 흰 종이 앞으로 가세요. 여기서는 이제 무엇이든 쓸 수 있습니다.”
“당신들 예측불허한 생으로 인해 계속 쓰기를”
시인이 바람에 실어 보내는 흰 종이로의 초대장
1부에서 저자는 시인으로서 시란 무엇일지 자기 나름의 생각을 정리하고, 2부에서는 <복희도감> 등을 통해 들어온 시 쓰기에 대한 여러 질문들에 답변한다. 3부는 저자의 일상을 보여주며 자연스럽게 삶의 행간에서 시를 길어내는 방법을 모험가들에게 설명하니,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는 김복희 시인이 시인으로서 시간을 보내는 모든 장면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책이다.
어찌나 숨김없는지, 저자는 독자에게 시인의 삶이 얼마나 고독하고 지난한지를 솔직하게 보여준다. 다만 ‘시인 김복희는 이렇게 극복하(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라고 소소한 다독임을 함께 덧붙인다. 쓰는 사람이 능히 갖는 읽히고 싶다는 욕망과 읽어줄 이 없을 거라는 불안감을 말하면서도 어딘가에 반드시 있을 ‘절대 독자’를 믿으라는 대안을 주고, 구절 하나를 쓰기 위해 무던히 노력하지만 눈에 보이지 않아 무용해 보이는 시간들을 ‘뜬구름 채집’이라고 명명해주는 식이다.
평생 시를 쓸 수 없는 인간인 줄 알고 살아왔지만, 어쩌다 시인이 되어서도 어디 가서 자신의 직업을 ‘시인’이라고 쉬 밝히지 못하지만, 언어 사이에 말줄임표라는 쿠션을 넣지 않고서는 메시지를 보낼 수 없지만, 아직도 제멋대로 끝없이 추락하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지만… 인생은 예측불허하며, 타인과 언어로 연결되는 환상적인 순간들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알기에. 저자는 못내 반갑게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시를 쓰고 싶으시다고요?”라고.
모험가님, 진실은 언제나 하나
써야 쓰는 사람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쓰는 행위는 하고자 하는 마음만 있다면 누구나 쉽게 시도할 수 있다. 모양을 제대로 갖추지 않은 채 영수증 뒷면에 급하게 적어내려도 좋고, 핸드폰 메모장에 톡톡톡 입력해도 좋다. 그저 운을 떼면 그것이 곧 쓰기인데, 첫 발디딤이 무척 어렵다. 그래서 누군가 나의 등을 지긋이 밀어주기를 내심 바라게 된다. ‘그러면 된다’라는 말 한마디면 겁먹은 발걸음이라도 못 이기는 척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것이 저자가 이 책으로 말하고자 하는 바다.
“나는 금붕어를 주었는데, 독자는 개구리를 받는” 상황, 쓴 대로 읽히지 않아도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시를, 더 많은 사람이 쓰고 읽었으면 좋겠다는 저자의 말처럼 좋아하는 마음만 가지고 오면 된다. 그럼 이제 무엇이든 쓸 수 있다. 새해를 시작하며 우리 앞에 놓인 이 책처럼, 함께 시작(詩作)해보면 된다.
추천사
“김복희의 산문은 반죽을 떠올리게 한다. 자유자재로 모양을 바꾸면서도 언제든 부풀어오를 준비가 되어 있는 반죽 말이다. 반죽은 쭉쭉 늘어나 그와 함께 한의원, 광장, 학교에 가기도 하고 이야기의 행간을 야무지게 메워주기도 한다. 책장을 덮을 때쯤이면 글맛으로 이루어진 빵 굽는 냄새에 기분 좋게 혼미해질 것이다. 이 책은 김복희가 글로 하는 융숭한 대접이다.” _오은(시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