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빛 환한 밤, 할머니는 거기서, 나는 여기서 손을 흔들어요.
잊지 않으면 언제까지나 서로를 알아볼 수 있을 거예요.
굽어보는 달빛이 있으니까요."
#임수현 #윤정미 #할머니 #옛이야기 #신화 #탄생 #추억 #그리움 #성장
철컥철컥, 눈먼 할머니가 수놓은 환상 세계
실뭉치를 돌돌 풀면 시작되는 이야기
세 살 때
나뭇가지가 눈을 찔러
눈이 먼 할머니
눈이 멀자
보이지 않는 것까지 보게 되었고
들리지 않는 것까지 듣게 되었어요
닭들과 이야기를 나누고
죽어 가던 토끼를 살리고
뱀의 똬리를 풀어 줬어요
_「눈먼 할머니」 부분
『외톨이 왕』으로 제7회 문학동네동시문학상 대상을 수상하며 “허공으로 붕 떠오르지 않고 현실과 강하게 결속돼 있는 환상성”(이안)으로 날마다 자기 세계를 만들어 나가는 아이들을 응원해 온 임수현 시인이 두 번째 동시집을 들고 찾아왔다. “오늘은 노란 웃음을 짜 주세요!” 명랑한 아이의 음성으로 들려오는 제목을 지나면, 저 먼 보름달 뒤에서 눈먼 할머니가 철컥철컥 베를 짜다 멈추고 손을 흔든다. 시인의 작품 곳곳에 등장해 강렬한 인상을 남겼던 ‘눈먼 할머니’가 비로소 이야기 전면에 나서서 자신의 고유하고 신비로운 나라로 아이들을 이끈다. 생명을 관장하는 삼신할미를 연상시키는 이미지, 전래동화 모티프에서 한 발짝 더 나아간 서사와 유머를 장착하고서.
세 살 때 눈이 멀게 된 할머니의 사연으로 문을 여는 이 동시집은, 덕분에 얻은 비범한 능력과 다양한 표정으로 한 아이의 몸과 마음을 훌쩍 키워 낸 할머니가 주요하게 등장한다. 세상 모든 할머니들이 그러하겠지만 이 할머니 역시 조금 특별하다. 거칠거칠한 손바닥으로 배를 문지르며 노래를 불러 아픔을 낫게 하는가 하면(「뱃노래」), 앉았던 자리마다 콩 싹이 트고 호박 넝쿨이 굴러 나오게 만든다(「쑥쑥 길어지는 이야기」). 할머니의 비범함은 독 속 뱀의 목소리로, 마당 안 닭의 목소리로, 긴 나뭇가지 팔을 한 눈사람의 목소리로 전해져 어딘가 더 신비롭다. 아이의 탄생부터 오늘까지, 모든 순간을 아이와 함께했던 눈먼 할머니의 이야기 타래 속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누구라도 좀 알려 주겠니?”
할머니 사는 곳 찾아 떠나는 긴 여정
아이 손에 쥐어진 작은 지도 하나. 아이는 까마귀에게, 까치에게, 염소에게, 노루에게 물어물어 길을 나아간다. “누구라도 베 짜는 나라로 어떻게 가는지 좀 알려 주겠니?” 커다란 배낭을 메고 긴 모험을 떠나려는 아이.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 이토록 궁금해하는 아이. 궁금함에 그치지 않고 길을 나서는 아이. 더듬더듬 혼자만의 사색에 잠기다가도, 불쑥 질문 하나를 던져 세상과 교감할 줄 아는 아이. 그 아이를 위한 길고 다정한 답으로 눈먼 할머니가 사는 베 짜는 나라의 막이 오른다. “웃음 많은 아빠는 씨실” “힘센 장사 엄마는 날실” 번갈아 꿰어 짠 몽글이(「베 짜는 나라」)가 “구르고 굴러 동글동글 둥글어지며 바닷속 먼 곳을 다녀”오면(「돌멩이 이야기」) 할머니가 “꼬투리 속 잠든” 엉덩이를 토닥인 후 “좁지만 환한 문을 열어” 주고(「주렁주렁 강낭콩」), 오랜 기다림 끝에 “목을 쭈욱 빼”서(「겨울 씨앗」) 빼꼼, 드디어 세상에 나타난다. 동그란 눈도, 반짝이는 보조개도, 노란 웃음도 다 할머니 작품이다. 강낭콩같이 조그맣던 생명이 넝쿨처럼 쑥쑥 자라 두 팔을 힘차게 흔들며 언니처럼 굴기까지의 여정(「환상적이지 않니」)은 한 아이의 성장앨범을 넘겨 보는 듯 구체적이면서 보편적이다.
저길 봐!
빨간 구두 신은
물고기 떼가 첨벙첨벙
강물 위를 뛰어다니고 있어
붉게 물든 서쪽 하늘
빨간 구두를 신고
폴짝 뛰어오르면
할머니 사는 곳
훤히 볼 수 있겠지
빨간 물빛 통통 튕기며
한 번은 만날 수도 있겠지
_「빨간 구두 물고기」 전문
시인에게 ‘기원’은 중요한 화두다. 전작 『외톨이 왕』에서도 우리가 어디에서 왔는지를 곰곰 생각하게 했다면, 이번 동시집에서는 그보다 더 앞선 ‘태초’를 이야기한다. 그렇기에 눈먼 할머니의 나라 또한 중요한 공간으로 자리하며 우주의 별 하나, 구름 한 조각까지 구석구석 살펴보게 한다. 이처럼 만물의 기운을 모아 철컥철컥 짜서 마침내 반짝, 한 생명이 완성되니 세상에 태어나는 모든 작고 소중한 것들이 “반갑다 반가워”(「겨울 씨앗」) 손을 맞잡지 아니할 수 없다.
노란빛 흘러내리는 보름달의 모습으로
하얀 거품 속 파도의 모습으로
언제나 곁에 있어 주는 존재를 기억하며
금방 끝나지도, 쉽게 풀리지도 않을 성장의 여정에서 덩그러니 곁에 존재하는 것들은 하나같이 넉넉한 마음으로 아이를 지킨다. 눈먼 할머니의 존재는 직접 드러나기도 하지만, 때로는 작은 떡갈나무 머리에 쌓인 눈을 털어주는 큰 떡갈나무의 모습으로(「나란히」), 뛰어가다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우는 무언가로(「벚꽃 아이」), 아이 발에 꼭 맞는 신발을 찾으러 다니는 파도의 모습으로(「파도 신발 찾기」), 장화가 첨벙! 물을 튀기면 까르르 웃는 웅덩이의 모습으로(「웅덩이와 장화」) 형상화되어 언제 어디서나 아이를 보호하고 지켜 준다. 아이가 무럭무럭 잘 자라기를 바라는 할머니의 간절함이 아이 주변의 온갖 것들을 감화시켜 일상 속 마법 같은 순간들을 만들어 낸다. 걸으면 걸을수록, 읽으면 읽을수록 자꾸 마음이 놓이고 입가에 미소가 지어지는 이유다.
“내게도 조금 특별한 할머니가 있었습니다. 참기름을 짜고, 고구마를 캐고, 밤이면 달빛을 끌어당겨 만두 같은 아이들을 빚고 또 빚었지요. 내 볼우물도 할머니가 만드셨어요. 쟁반 같은 보름달이 뜬 밤이었어요. 할머니는 마음으로 세상을 보는 사람이었습니다. 캄캄한 눈과 더듬거리는 손끝으로 나를 키우셨지요. 할머니가 앞이 보이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은 한 번도 없었어요. 보이는 사람처럼 걷고 문고리를 찾았으며 딱 알맞은 자리의 스위치를 눌러 불을 밝히곤 했거든요. 더 놀라운 건 바늘에 실을 꿰 바느질을 하셨다는 거예요. 실 끝에 침을 발라 바늘귀를 통과하는 마법을 보고 자란 덕분에 나는 시를 쓰게 되었어요. 눈 밝은 마음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을 떠올리면서요.”
_임수현(시인)
웅장한 생명 신화를 실실 잡아당기니 돌돌 풀려 나온다. 캄캄한 눈으로 바늘에 실을 꿰어 바느질을 한 할머니를 보고 자란 덕에 시인은 한 가닥의 실에서 세상 모든 인연의 실마리를 발견해 내는 예리한 눈과 넓은 마음을 품게 되었다. 후반부에는 해설 대신 시인의 이야기 「눈 밝은 할머니가 있는 집」을 수록해 시를 쓰게 하는 관계의 힘, 추억의 힘을 시인의 목소리로 찬찬히 들려주며 환상과 일상이 조물조물 뭉쳐진 시 세계와 그 기원을 풀어 나간다. 그리운 존재를 그리워하는 법, 사랑하는 존재를 사랑하는 법을 말하며 이 여리고 단단한 마음들이 하얀 눈처럼 소복이 쌓여 한 작품이 만들어졌음을 이야기한다. “어린이의 겉이 아닌 내면에 더 가까이 다가간 동시”(이안)로 시인이 앞으로 펼쳐 나갈 작품 세계의 단단한 초석으로 굳게 자리할 시집이다.
환상과 일상을 버무려 낸 몽환적인 그림
초록 고양이와 빨간 실뭉치를 따라 계속될 이야기
초록 고양이와 분홍 하늘, 파란 나뭇잎처럼 현실을 비틀며 환상성을 극대화하는 채색으로 베 짜는 나라가 더 아름답고 탄탄하게 직조되었다. 구름 모자를 쓰고 깃털 비녀를 꽂은 할머니 캐릭터는 화가 윤정미의 손끝에서 완성됐다. “무릎에서 구름을 꺼내 비를 내리고” “저녁에는 별을 불러 모으고” “새벽에는 철컥철컥 베를 짜”는 할머니의 비범한 일과처럼 그 외양 또한 호기심과 흥미를 자아낸다. 삼라만상의 비밀을 모두 아는 듯 여유로운 웃음을 띠고 유유히 걸어가는 할머니를 보면 누구라도 그 뒤를 살금살금 걸어 보고 싶어질 것이다. “어릴 적 외할머니의 이미지들을 돌돌 뭉쳐 실로 빼서 그림을 지었다”는 화가의 말처럼, 저마다 그리운 존재를 떠올리며 이 그리움의 힘으로 씩씩하게 살아갈 수 있도록 따듯하고 단단한 용기를 불어넣어 줄 마법 같은 동시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