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도시 속 이웃을 만나러 가는 모험
슈테파니는 얼굴을 전혀 몰랐던 이웃과 친구로 지내기까지의 경험을 공유한다. 이웃도 그저 모르는 사람으로 여기며 지낸다는 게 마냥 편하지만은 않다는 걸 몸소 경험하는데, 집에서 육아만 하다가 종종 유아차를 끌고 거리를 나갈 때면 아기 엄마를 향한 따가운 시선을 느낀다. 그런 사람들 때문에 동네에 도무지 정을 붙일 수 없었던 슈테파니는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 알아가보기로 한다. 대학생 때 와인 오프너를 빌리러 옆집을 찾아갔을 때 뜻밖에도 멋쟁이 베를린 남자가 문을 열어주었고, 이를 계기로 그와 이웃사촌이 된 경험도 있었다. 문 뒤로 펼쳐진 미지의 세상을 향해 슈테파니는 한 걸음 한 걸음을 내딛는다.
닫힌 문 너머로 사내아이의 목소리가 들렸다. “엄마, 아까 그 아줌마 누구야?” 아이 엄마가 대답하는 소리도 들렸다. “몰라. 그냥 우리와 같이 커피랑 쿠키 먹으러 온 아줌마야. 좋은 아줌마지?”
해냈다! 내가 초인종을 눌렀다!
티타임으로 맺어진 관계 속에서 찾은 보물
무작정 이웃집에 찾아가 티타임을 가진다는 황당한 아이디어도 매일 정성스레 케이크를 구워 들고 하루에 한 집 방문하다보면 어느새 멋진 프로젝트가 된다. 슈테파니는 그림 형제 동화에 나오는 빨간모자 소녀처럼 바구니에 케이크, 커피, 코코아, 차, 설탕 등을 담아 가지고 떨리는 마음으로 집집마다 초인종을 누른다. 티타임이 성사되면 집이라는 사적인 공간이 주는 편안한 분위기에서 이웃은 자기 이야기를 술술 꺼낸다. 조기 퇴직하고 약초 공부를 한다는 여인 카타리나는 건초와 캐모마일 냄새가 은은하게 풍기는 냄비에서 식물성 염료를 실험하고 있다. 그는 직접 딴 쐐기풀로 만든 차를 권하고 사바나의 코끼리와 기린을 수놓은 스웨터를 보여주며, 슈테파니에게 “뭐든 직접 만드는 걸 좋아해요. 아기 엄마도 젊을 때 뭐든 해봐요”라고 응원을 보낸다. 한편 혼자서 자식을 키우며 사는 여인의 집에서 슈테파니는 그의 자녀들 사진을 본다. 처음에 딸 이야기만 하고 아들 얘기는 전혀 하지 않는 여인의 이야기를 들으며 슈테파니는 그의 비밀을 알게 된다. 그는 이웃과 함께 웃고 눈물 흘리며, 베를리너들의 다양한 집을 구경하는 재미까지 느낀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20여 년이 지난 대도시의 모습은 흥미롭다. 낡은 아파트와 재건축한 아파트가 공존하는 동네에 다양한 배경과 출신을 지닌 사람들이 살고 있다. 원주민인 이웃 아저씨는 옛날 베를린 사람들이 술을 그렇게 많이 마셨다며 술통 운반하는 마차가 지나다니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동안 신문에서 스크랩한 옛 거리 사진도 보여준다. 한 여성은 1980년대 당시 모잠비크에서 계약직 노동자로 일하러 동독에 온 남자와 사귀고, 독일이 통일된 후 그와 결혼까지 한 이야기를 들려준다. 베를린은 음악가들이 모여 사는 곳이기도 하다. 슈테파니의 남편 톰 역시 재즈 음악가다. 저자는 그랜드피아노와 매트리스밖에 없는 이웃집 안에 들어가서 집주인이 피아니스트인 걸 바로 알아본다. 음악계에 종사하는 이웃 얘기를 하다가 남편 이야기를 꺼내는데, 이 집이 옛날에 톰이 살던 곳임을 알게 된다. 슈테파니는 톰이 살던 흔적을 직감적으로 알아보면서 빙그레 웃는다.
이웃과 함께하는 워킹맘의 삶
워킹맘으로 베를린 인싸가 된 저자의 이야기는 엄마로서의 삶과 자기 자신으로서의 삶의 균형을 찾는 행복한 여정을 보여준다. 이웃집 방문 프로젝트를 시작하면서 변화한 삶은 놀랍기만 하다. 집안에서 육아만 하는 단조로운 생활을 보내다가 베이킹이라는 취미를 통해 성취감을 느끼고, 남편과는 육아 문제로 티격태격하다가도 케이크 앞에서는 둘도 없는 사이가 된다. 저자는 이웃에 먼저 다가간 결과, 다른 엄마들에게서 도움과 응원을 받기도 하며, 자식에게는 또래 친구를 만들어준다. 이제는 거리에서 마주친 사람들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인사도 건네면서 긍정적인 감정을 전파한다.
슈테파니의 베이킹 실력은 나날이 늘어간다. 처음부터 케이크를 잘 만든 건 아니었다. 팔미에를 까맣게 태우기도 하고 ‘실험적인’ 케이크를 이웃집에 들고 가기도 한다. 처음에 남편 톰은 마블케이크를 보고 “당신이 만든 케이크가 어떤지 내가 잘 알지! 케이크가 아니라 벽돌을 구운 줄 알았어”라고 말했는데 꾸준한 노력 덕분에 슈테파니는 어느새 베이킹에 도가 터 애플파이와 마블케이크는 손쉽게 만든다. 이제 톰은 “정말 못 말리는 애플파이 귀신”이 되어 이웃집에 가져갈 케이크에 손을 대기도 한다.
그의 이웃집 방문 결과는? 가장 짧은 방문 시간은 12분, 가장 긴 방문 시간은 180분인데, 집주인이 처음에 정말로 30분밖에 시간이 없다고 말한 경우의 평균 방문 시간은 150분이다. 집에서 편의점까지 가는 데 걸리는 시간은 이웃집 방문 시작 전 평균 3분이었지만, 시작 후에는 길에서 이웃과 수다를 떠느라 평균 30분이 걸린다. 방문한 집에 사람이 가장 많았을 때는 21명으로, 한 아이의 생일파티가 열리고 있었다. 이웃집 방문 100회를 앞두고 그동안 먹은 케이크 수는 163개이며, 이중 직접 구운 건 150개다. 가장 자주 먹은 케이크는 마블케이크이며, 치즈케이크와 애플파이가 그 뒤를 잇는다. 하지만 저자는 정확하게 재고 싶지 않은 수치도 있다. 그건 바로 자신의 늘어난 체중이다.
■ 책 속에서
사람들이 무심코 하는 행동 가운데는 시간이 한참 흐른 뒤에야 비로소 그 의미를 깨닫게 되는 것이 있다. 고급 아파트도 자세히 들여다보면 축축한 곰팡이 소굴이라는 사실이 드러난다. 모든 고급 아파트가 곰팡이 소굴이라는 말이 아니라, 앞으로는 좀더 자세히 살펴보겠다는 말이다. 사람을 평가하고 재단하기 전에 먼저 그 사람과 알고 지내는 법을 연습할 것이다. 언젠가, 내가 ‘인간도’에서 검은띠를 따는 먼 훗날에는 어쩌면 사람을 재단하는 행위를 그만두리라. _56쪽
앞치마를 두른, 볼 빨간 여인이 문을 열어주었다. 이 사람은 우리집 거실 벽 반대편에 사는 사람인데, 이제야 처음 보게 되었다.
“안녕하세요! 저는 이 동네에서 프로젝트를 하고 있어요. 200일 동안 200가정을 찾아가 티타임을 하는 프로젝트예요. 제가 직접 구운 케이크를 먹고 커피를 마시며, 어떻게 지내는지 이야기를 나누는 거죠. 이 동네 이야기며, 여기가 얼마나 변했는지 같은 이야기를요. 저와 함께 치즈케이크 한 조각 드시겠어요?”
“나쁠 거 없죠!” 여인이 반겼다. _56~57쪽
밖으로 나오자 이슬비가 내리고 있었다. 비를 맞으면서도 기쁘고 흡족했다. 이웃집 방문이 벽을 뚫고 쳐들어가야 할 만큼 힘든 일은 아니라는 생각에 마음이 놓였다. 내가 이토록 기분좋은 이유는 카타리나의 친절한 대접 때문일까? 아니면 다른 사람의 모습에서 내 삶의 모습을 발견했는데 그 모습이 그럭저럭 봐줄 만했기 때문일까? 아무튼 이제는 무엇이든 시작해볼 의욕이 생겼다. 따듯한 수프를 먹고 뱃속이 든든해졌을 때처럼. _61~62쪽
나는 내 프로젝트를 사랑한다. 내 돋보기와 만화경을 사랑한다. 매일 같은 시간에 만난 사람들이 각자 다른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다. 그날은 그 사람이 주인공이고, 그의 이야기가 가장 중심이 되며, 유일하게 중요한 주제가 된다. 주인공과 함께 주요 장면에 출연하는 일이 즐겁다. 하루가 지나면 그 주인공은 여러 선배 주인공과 같은 무리에 속하고, 그의 이야기는 수많은 중요한 사연 가운데 하나가 된다. 나는 이제 사람들과 정을 나누는 일을 주저하지 않는다. _157쪽
프로젝트를 시작한 후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참으로 좋은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고, 동네 분위기가 갑자기 밝아졌다. 길을 걸을 때면 트램펄린 위에서 통통 튀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뿐만이 아니다. 톰은 지인들과 통화를 할 때마다 “우리집에 케이크 먹으러 한번 들러요” 같은 다정한 말로 대화를 마무리한다. 그래서 케이크는 하루에 한 개만 구워서는 모자라게 되었다. _159쪽
우리는 가던 길을 멈추고, 할머니는 일상적인 일과 생각을 이야기한다.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생각을 들을 때마다 이 사람을 제대로 알고 이해하기에는 엄청 작은 모자이크 조각이 너무 많다는 느낌이 점점 더 뚜렷해진다. 모자이크 한 부분이 되지도 못한 채 구석에 처박혀 있는 이야기가 얼마나 많을까? 그 조각을 읽는 방법이 한 가지만 있는 건 아니다. 조각의 내용을 읽어내려는 의지만 있으면 읽는 방법은 아무래도 상관없다. _178쪽
소중한 가치를 지닌 이웃 관계는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서 뭔가를 원하는 상황을 토대로 형성되지 않는다. 자기 프로필과 ‘매칭’이 되는 사람 또는 내게 필요한 물건을 줄 수 있는 사람을 찾는 방법으로도 이웃을 사귈 수는 없다. 이웃이란 원래 옆집에 사는 사람 아닌가? 나와 매우 가까운 곳에 살지만 나와는 다른 사람! 이웃은 일부러 찾아다닐 필요가 없다. 늘 가까이에 있으니까. _197쪽
모르는 사람 집에 찾아가는 일은 일종의 담력 시험이다. 많은 사람이 “와, 정말 용감하시네요!” 또는 “저라면 절대 못 할 거예요”라고 한다. 그렇다. 모르는 사람을 만나는 데는 분명 용기가 필요하다.
그러나 진실을 말하자면, 가장 어려운 담력 시험을 통과한 사람은 나를 집안으로 들인 사람이다. 내가 우리집 문 앞에 찾아왔다면 나는 내게 들어오라고 할까? 100일 전부터 남의 집을 찾아다니며 내가 나쁜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을 증명해왔다. 그럼에도 확신이 서지 않는다. 나는 낯선 사람을 집안으로 들일 만큼 용기가 있는가? 그 사람이 자신을 숨겨달라는 게 아니라 단지 함께 커피를 마시자고 하는데도?
무엇보다도 지금까지 아흔 명의 사람이 길게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집안으로 들였다. 단 한 사람만이 케이크에 독이 들지 않았는지 물었을 뿐이다. 그리고 만전을 기하는 뜻에서 한 조각 먹기 전에 얼른 내 블로그를 검색했다. _217~21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