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의 거장 윌리엄 트레버
그가 마지막으로 남긴 열 편의 이야기
“나는 언제나 트레버를 읽고 또 읽는다.” _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영어권에서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단편 작가’라는 평가를 받았던 윌리엄 트레버 사후에 출간된, 총 열 편의 소설이 수록된 단편집이다. 천재 소년을 제자로 받아들인 피아노 선생님, 환경미화원에게 시신으로 발견된 중년 부인, 기억장애에 시달리며 거리를 헤매는 그림 복원가 등 얼핏 평범해 보였던 등장인물들이 예상치 못한 놀라움을 선사하며 삶에 대한 그리고 소설에 대한 깊은 통찰을 우리에게 넌지시 드러낸다. 트레버를 그리워했을 많은 독자와 작가들의 아쉬움을 달래줄 이 마지막 단편집은 민승남 번역가의 번역으로 국내에 처음 소개된다. 경이로운 수준으로 ‘언어의 경제’를 보여주는 트레버의 문장을, 역시 담담하면서 절제된 문장으로 옮겼다.
단편소설의 거장이 전하는 마지막 이야기들, 그 조용한 위안과 희망
모파상, 체호프, 조이스의 뒤를 잇는 단편소설의 거장 윌리엄 트레버. 무려 백 편이 넘는 작품을 발표한 그는 드물게도 장편과 단편 모두에서 높은 평가를 받는 작가다. 그럼에도 자신을 단편 작가로 소개하기를 좋아했던 그는 〈뉴요커〉의 찬사처럼 ‘영어권에서 현존하는 가장 뛰어난 단편 작가’였다. 생전 유력한 노벨문학상 후보로 거론되었던 그가 2016년 세상을 떠났을 때 전 세계 독자와 작가들이 그를 추모하며 아쉬워했다. 그런 아쉬움을 달래주듯 그가 남긴 ‘마지막 이야기들’ 열 편을 모은 단편집 『마지막 이야기들』이 사후인 2018년 출간되었다.
『마지막 이야기들』이라는 제목에서 우리는 먼저 쓸쓸한 분위기를 느낀다. 트레버의 많은 작품에서 그렇듯, 등장인물은 혼자 살고 있거나 다른 사람과 함께 있더라도 외로워하며, 누군가는 있던 곳을 떠나고 누군가는 그곳에 남겨진다. 그런 인물들을 조용히 바라보는 시선 끝에는 평생 ‘아웃사이더’로 산 작가 트레버가 있다. 전통적으로 가톨릭 국가인 아일랜드에서 프로테스탄트 가정의 자녀로 태어나, 아버지의 근무지를 따라 학교를 열세 군데나 옮겨 다녔고, 나중에는 아일랜드를 떠나 영국 시골 마을에 정착한 트레버. 그는 언제나 사건의 중심이나 감정의 소용돌이에 직접 가닿기보다는 거리 두기를 택한다. 어쩌면 방에 앉아 폭풍우를 창밖으로 내다보는, 활짝 핀 정원의 꽃을 커튼 너머로 바라보는 감각과도 비슷할 것이다. 트레버 작품에서는 삶의 기쁨도 슬픔도 직접적이고 강렬한 주장이 아니라 관조적인 시선으로 전달된다. 그리고 마침내 우리는 그 쓸쓸함 가운데서 조용한 위안과 희망을 발견할 수 있다.
『마지막 이야기들』에 수록된 단편소설들은 20페이지 내외로 누구나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복잡하거나 화려한 문체도 아니며, 평범한 세상 속 평범한 인물들을 다룬다. 트레버는 아주 짧은 묘사로 등장인물의 많은 것을 보여주는 동시에, 여전히 많은 부분을 감추며, 그로 인해 미스터리가 만들어진다. 불륜, 절도, 사기, 심지어는 살인까지. 너무 평범해서 하찮아 보이기까지 했던 인물들은 우리를 깜짝 놀라게 만든다. 그러나 이야기를 끝까지 읽어도 미스터리는 완벽하게 해소되지 못한다. 「조토의 천사들」에서 기억장애를 앓는 그림 복원가가 찾고 있던 것이 결국 무엇이었는지, 「크래스소프 부인」에서 갑자기 시신으로 발견된 부인에게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우리는 끝내 알 수 없다. 평소 트레버는 공원 벤치에 앉아 타인들의 대화를 자주 엿들었다고 한다. 그렇지만 언제나 대화를 끝까지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지금까지 들은 부분만으로 나머지를 상상하기 좋아했다고 한다. 모든 진실을 알 수 없는 것, 트레버에게는 이것이 바로 삶이고, 바로 소설이었다.
무라카미 하루키, 존 밴빌, 힐러리 맨틀, 줌파 라히리, 줄리언 반스… 수많은 작가의 찬사
2016년 11월 20일 윌리엄 트레버가 눈을 감았을 때 아일랜드는 물론이고 전 세계의 작가들이 애도를 표했다. 압축된 문장과 절제된 단어 사용으로 놀라운 경지에 도달한 ‘언어의 경제’를 보여준 트레버는 다른 작가들에게 큰 영향을 끼친 존재였다. 존 밴빌, 줄리언 반스, 줌파 라히리, 힐러리 맨틀, 무라카미 하루키, 조이스 캐럴 오츠, 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콜럼 토빈 등 수많은 작가가 그에 대한 애정을 드러낸 바 있다.
그런 트레버 단편소설의 정수가 담긴 『마지막 이야기들』은 2018년 5월 24일 그의 생일을 기념하여 출간되었다. 한국어판이 출간된 2023년 5월 24일도, 그가 살아 있었다면 아흔다섯을 맞이했을 생일이다. 〈퍼블리셔스 위클리〉의 평처럼 이 책은 “트레버를 아는 독자들에게는 만족스러운 마무리가 될 것이고, 트레버를 처음 읽는 독자들에게는 그의 이전 작품들을 찾아 읽게 할 좋은 이유가 될 것”이다.
수록 작품
• 피아노 선생님의 제자
천재 소년을 제자로 받아들인 피아노 선생님.
그런데 소년이 레슨을 다녀가면 물건이 하나씩 없어진다.
• 장애인
영어가 서투르고 막일로 돈을 버는 떠돌이 형제.
다리가 불편한 남자가 아내인 듯한 여자와 사는 집의 페인트칠을 맡게 된다.
• 다리아 카페에서
한 남자의 법적인 아내와, 지금 그와 함께 살고 있는 여자.
어릴 적부터 친구였던 두 여자의 이야기.
• 레이븐스우드 씨 붙잡기
교통사고로 아내를 죽게 만들어 죄책감을 느끼는 부유한 남자.
은행원은 그에게서 돈을 뜯어낼지 말지 고민중이다.
• 크래스소프 부인
돈을 보고 결혼했던 늙은 남편이 죽자, 이제부터 삶을 즐기기로 결심한 부인.
그러나 그녀는 거리에서 옷이 술에 젖은 시신으로 발견된다.
• 모르는 여자
주인공은 어느 날 자기 집 청소부였던 여자의 사망 소식을 듣고,
그 여자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생각하기 시작한다.
•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길에서 넘어진 주인공을 도와준 중년 남자.
한참 후 그의 아내가 찾아와 남편을 내놓으라고 한다.
• 조토의 천사들
기억장애에 시달리며 무언가를 찾아 거리를 헤매는 그림 복원가.
우연히 그의 창고를 방문한 매춘부는 그곳에서 천사 그림과 돈뭉치를 발견한다.
• 겨울의 목가
황무지의 저택에 사는 열두 살 소녀는 스물두 살 가정교사에게 연심을 품는다.
세월이 흘러 두 사람은 다시 만나지만, 다시 헤어진다.
• 여자들
어머니의 존재를 모르지만, 헌신적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여학생.
언젠가부터 학교 주위를 맴도는 두 명의 중년 여자들과 조우한다.
추천사
언어의 장인인 동시에 통달한 이야기꾼. 트레버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현대 문학가 중 한 명이다. _힐러리 맨틀
나는 언제나 트레버를 읽고 또 읽는다. 그리고 항상 놀란다. 현실에서처럼 소설 속 인물들은 끔찍한 행동을 하지만 트레버는 어떠한 판단도 없이 그들을 바라본다. 그건 정말로 사랑스러운 일이다. _엘리자베스 스트라우트
트레버의 문체는 너무도 섬세해서, 사실상 문체라고 부를 것이 없다. _존 밴빌
그의 작품이 없었다면 나는 아마 길을 잃었을지도 모른다. _줌파 라히리
트레버 소설의 특징은 군더더기 없는 적확하고 생생한 묘사, 흔들림 없이 정밀한 인물 설정, 칼같이 예리한 동시에 불가사의한 부드러움을 지닌 소설적 시선에 있다. _무라카미 하루키
트레버는 21세기의 체호프다. _월 스트리트 저널
평범한 삶에서 이끌어낸 비범한 이야기. _타임스
트레버의 놀라운 솜씨는 경탄을 자아낸다. 이야기의 주제를 첫번째 페이지의 첫번째 단어에 담는 이러한 경제성이야말로 뛰어난 단편 작가의 능력 중 하나다. _옵서버
트레버를 아는 독자들에게는 만족스러운 마무리가 될 것이고, 트레버를 처음 읽는 독자들에게는 그의 이전 작품들을 찾아 읽게 할 좋은 이유가 될 것이다. _퍼블리셔스 위클리
그는 기억, 사라져가는 것, 힘이 없고 가끔은 희망도 없는 등장인물들에 관심을 기울인다. 그러한 것들이 그의 단편과 장편에 깊이 있는 멜랑콜리를 만들어낸다. _콜럼 토빈
작가들은 종종 누구의 작품을 자주 읽는지, 위안을 주는 책이나 소설이 왜 중요한지를 일깨워주는 책은 무엇인지 질문받는다. 나는 수없이 대답해왔다, 윌리엄 트레버라고. _존 보인
나는 글쓰기를, 특히 영어로 글쓰는 것을 트레버를 읽으며 배웠다. 그의 작품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나는 작가가 되지 못했을 것이다. _이윤 리
윌리엄 트레버, 그는 위대한 단편 작가 중 한 명이었다. 아름답게 구성된 서정적이고 절제된 산문. _조이스 캐럴 오츠
아일랜드 단편 작가라면 겪게 되는, ‘아일랜드의 체호프’로 불리는 운명을 그도 경험했다. 윌리엄 트레버는 ‘아일랜드의 체호프’가 아니다. 그는 지금까지도 그랬고, 앞으로도 ‘아일랜드의 윌리엄 트레버’로 남을 것이다. _줄리언 반스
본문에서
“브람스? 우리 브람스에 도전해볼까?” 그녀가 말했다.
미스 나이팅게일에게 첫 레슨을 받고 있는 소년은 아무 말이 없었다. 하지만 조용한 메트로놈을 바라보며, 그 조용함이 기쁨을 주기라도 하듯 살짝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더니 피아노 건반을 누르기 시작했고, 첫 음들이 울렸을 때 미스 나이팅게일은 자신이 천재와 함께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9쪽, 「피아노 선생님의 제자」)
같은 날, 작업을 마치기 직전 부엌 창틀에 마지막으로 남은 묵은 페인트를 긁어내던 칠장이들은 장애인이 화덕 옆 그의 의자에 앉아 있지 않은 걸 보고, 비가 그친 후 이곳에 다시 온 이래 그의 목소리를 듣지 못했음을 깨달았다. (37쪽, 「장애인」)
과거에 댄서였던 그녀는 이제 출판사 원고 검토자로 일하고 있어서 검토 의뢰를 받은 타이핑 원고를 카페로 들고 올 때가 많다. 오늘 아침에는 두 편을 가져왔는데 중세 살인 미스터리와 오스트레일리아 오지 배경의 열정적 사랑 이야기다. 어느 작품도 그녀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한다. 둘 다 글의 질이 떨어지고, 그녀는 전문가의 정중한 태도로 모든 걸 숨김없이 기록한다. 가끔은 감동을 받고, 오직 즐기기 위한 독서를 하던 때처럼 글에 끌리기도 한다. (48쪽, 「다리아 카페에서」)
애니타는 천천히 앉는다. 그 느린 동작은 대화하고 싶은 의욕을 부정하기 위해 의도한 것이다. 카페는 가득차지 않았고 그녀가 주위를 둘러보자 그녀를 잘 알면서도 전혀 알지 못하는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이거나 미소를 보낸다. 사람들과 알고 지내는 좋은 방식이야, 애니타가 다리아 카페에서 자주 하는 생각이다. (58쪽, 「다리아 카페에서」)
“여자를 밝히는” 레이븐스우드의 약점을 이용해보자고 키스가 제안했을 때 로잰이 완강히 거부하면서 그들의 복잡한 관계에 긴장감이 감돌고 그가 레이븐스우드 씨에게 집착하게 된 건 그 완벽한 사례라고 할 수 있었다. “아니, 아니, 난 못해.” 그녀는 계속 거부하고 있었다. “절대로.”
의견 충돌은 처음엔 짜증스러웠다가 나중엔 신랄해졌다. 왜 못한다는 거야? 문제가 뭐야? 많은 걸 얻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인데 왜 그렇게 분별력이 없어? 전에도 그런 적 많았잖아? 그건 사실이라, 로잰은 반박할 말이 없었다. (69-70쪽, 「레이븐스우드 씨 붙잡기」)
텔레비전을 보고 <이브닝 스탠더드>를 읽은 후 잠자리에 들 때는 집안이 좀 따듯해져 있었고, 쓸쓸한 기분도 나아진 상태였다. 가끔은 혼자인 게 나쁘지 않았고, 특히 피곤할 때는 아무 노력도 할 필요가 없어서 더 그랬으며, 텔레비전을 끈 후의 정적이 위안으로 다가왔다. 하지만 정적은 공백일 수도 있었고, 그렇게 느껴질 때가 많았다. (72쪽, 「레이븐스우드 씨 붙잡기」)
그녀는 자신이 사람들 이름을 기억하는 데는 세계 꼴찌라고 고백하며, 전에 만났을 때 에서리지가 이름을 알려준 것처럼 굴었지만 그는 자기 이름을 알려준 적이 없었다. 그의 커피가 나왔지만, 얼른 두어 모금에 다 들이켜고 자리를 뜨기엔 너무 뜨거웠다. (97-98쪽, 「크래스소프 부인」)
에서리지는 크래스소프 부인의 미스터리를 추적해갔으나 모르는 부분이 너무 많았고 더이상의 추측은 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이유 모를 연민을 느꼈다. 그는 한 성가신 여인의 비밀을 존중했고 그 비밀을 지켜주기로 했다. (106쪽, 「크래스소프 부인」)
해리엇은 울었고, 눈물로 흐릿해진 시야에 그녀의 정원에 펼쳐진 아름다움이 들어왔다. 그 아름다움은 더 퍼져나가다가 일그러지며 사라졌다. 그녀는 그 아름다움이 돌아오는 걸, 다시금, 전보다도 더 찬란하게 빛나는 걸 지켜보았다. (129쪽, 「모르는 여자」)
“여기 없네요.” 그의 아내가 동요하며 말한다. 올리비아의 거실 텔레비전은 이제 화면이 비어 있고 소리도 안 난다. 그녀와 동거하는 남자는 손님 때문에 그렇게 해야만 하는 것에 짜증이 나서 목욕을 하고 있다. 일요 신문이 조금 접혀 있고 의자 하나가 뒤로 빠져 있다.
“당연히 당신 남편은 여기 없죠, 비니콤 부인.”
올리비아는 그녀를 안으로 들이지 말았어야 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 여자는 아파트 안으로 들어와 그들이 누리고 있던 주말의 평화를 깰 권리가 없다. 하지만 비니콤 부인이 자신이 누구인지 밝혔을 때, 올리비아는 인터폰에 대고 그녀를 안으로 들일 의사가 없다고 외치기가 어려웠다. (137쪽, 「대화를 이어가기 위해」)
그는 기다렸다. 왜 기다리는지, 무얼 기다리는지도 모르는 채 기다렸다. 그가 붓을 씻고 아침을 위해 물건들을 정리하면서 내는 소리만이 밤의 정적을 깼다. 물감은 말랐고, 그는 전등을 하나만 남기고 다 끈 후 다시 그림에 시선을 돌리고 자신의 천사들의 완전함을 보았다. 그가 침대에 누웠을 때 정적을 깨는 바스락거림은 없었고, 그의 살결을 더듬는 손길도 없었다. 그는 잠을 자면서도 여전히 기다렸지만, 꿈속에서 오직 천사들만이 자신에게 위안이 되어준다는 걸 알았다. (176쪽, 「조토의 천사들」)
“우린 무슨 일이 생기기 전에는 자신을 잘 몰라요.” 메리 벨라가 긴 침묵을 깼다. “우리가 뭘 할 수 있고 결국 할 수 없는지, 무엇이 우리를 계속 괴롭히고 무엇이 그렇지 않은지, 경계가 너무 모호해요.” (204쪽, 「겨울의 목가」)
그는 친절한 사람이니까 친절하게 핑계와 거짓말을 지어낼 것이다. 다시 돌아간 아내에게 해줄 수 있는 건 자비로운 거짓말뿐이니까. 그는 사랑을 오래 지속되지 않는, 이제는 끝나버린 사나운 열병으로 만들 것이다. (205쪽, 「겨울의 목가」)
두 목소리가 비난과 부인, 경멸과 멸시 속에 충돌했고, 박탈당했다고 느끼는 여자의 흐느낌이 이어졌다. 그녀는 그저 자식 가까이 있고 싶었고, 그녀에게 주어진 자격은 그것뿐이었다. “그것뿐이었는데,” 서실리아는 목이 메어 간신히 나오는 그 목소리를 들었다. “넌 그 끔찍한 질투심으로 내가 가질 수도 있었던 그 알량한 걸 잘도 망쳐버렸어.”
서실리아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우린 다시 못 와.” 그녀가 마지막으로 겨우 알아들은 말이었다. “다시는. 영원히.” (232쪽, 「여자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