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청춘의 기억들” _김연수(소설가)
눈물이 바짝 마른 자리에서 태어나는 반짝이는 문장들
문학 기자 한소범, 우리의 젊은 날을 송고합니다!
출판과 문학에 관심 있는 이들이라면 꼭 한 번은 들어보았을 이름 한소범. 2016년 한국일보에 입사해 문학 기자로 일해온 그가 문학동네에서 첫 산문집 『청춘유감』을 출간한다. 문학과 책의 기쁨을 함께 나누고픈 마음에 뉴스레터 ‘무낙’을 발행하기도, ‘이.단.아(이 단편소설 아시나요?)’ 코너를 통해 한국문학의 가장 생생한 지금을 발빠르게 소개하기도 한 한소범. 문학 기자의 파격과 품격을 동시에 성취하며 새 시대에 걸맞은 남다른 행보를 보이고 있는 그가, 이번에는 전심의 진심을 담은 청춘 산문을 독자들에게 선보인다.
『청춘유감』은 문학과 영화를 통해 자신의 삶을 구성하고 또 성장한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씩씩하고도 유감(有感)한 에세이로, 매사에 결코 무감하지 못하는 눈물도 사랑도 많은 한 기자의 젊은 날의 궤적을 담았다. 사랑했지만 떠나올 수밖에 없었던 ‘영화 만들기’와 ‘소설쓰기’의 세계에서, “나는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하면 됐다. 나는 누구의 후예가 될 필요가 없었고, 그냥 한소범이면 충분했다”(106쪽)라고 말하는 기자의 세계에 당도하기까지의 여정은, 한 문학청년이 문학 기자가 되어가는 모색의 발자취이자, 한 기자가 자신만의 세계를 축성하는 작가로 발돋움하는 흔적을 담은 청사진에 다름 아니다. 기록하는 사람[記者]의 종이로 만든 집[作家], 이는 『청춘유감』의 다른 이름이기도 할 것이다.
나는 내가 외로웠던 순간에, 내가 가난했던 순간에, 내가 아무것도 아니던 순간에, 내가 바보 같았던 순간에 내가 그동안 읽어온 문장으로부터 위로받았다. 김애란의 소설이 내 가난한 이십대의 증인이었다. 김연수의 소설이 내 미숙한 청춘의 알리바이였다. 나는 상처를 입히는 세상의 많은 일들 앞에서 최선을 다해 문장을 생각했다. 어디선가 보았고 밑줄을 그었고 자기 전에 곱씹었던 문장들을. 그러면 그곳이 내가 도망칠 곳이 되어주고, 도망칠 곳이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위안이 됐다. _「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면」에서
불현듯 시작되는 한낮의 불꽃놀이
무심결에 재생되는 내 인생의 하이라이트
단 한 번도 문학 기자가 되기를 꿈꾼 적이 없었는데, 돌이켜보니 지난 모든 실패들이 지시하고 있었던 곳이 바로 문학 기자였다는 기분좋은 아이러니. 나만 몰랐을 뿐 “처음부터 나를 위해 마련된 직업”(82쪽)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안성맞춤한 ‘내 일’. 물론 처음부터 이 사실을 알았더라면, ‘문학 기자’라는 명확한 한 지점을 향해 달려왔다면, “사랑을 의심하듯 내 재능을 의심”(161쪽)하는 실패와 타협을 밑천 삼는 지난한 지난날이 없었더라면 『청춘유감』은 쓰일 수 없었을 것이다. 기어코 ‘문장’으로 자기 자신을 이해하고, 이야기/서사로 타인과 세계를 소화하는 한 사람의 낙천적인 성격과 무엇 하나 허투루 넘길 수 없는 섬세함이 만나, ‘울면서 걷고, 넘어지며 자라는’ 마음겨운 화자와 글이 탄생했다.
『청춘유감』의 1부 ‘사랑했고 떠나온 세계’는 ‘한소범’이라는 청춘 영화의 프리퀄이자, ‘사랑의 기원’ 또는 ‘첫사랑의 추억’으로도 소개할 수 있겠다. 영화와 문학에 마음을 홀딱 빼앗겨버려 애타게 (짝)사랑했던 날들, 순수한 열정으로 전력을 다해 창작열을 불태운 20대 시절의 이야기가 이곳에 담겼다. 국문학과와 영상학과를 복수전공 하는 탓에 남들에게는 우려 섞인 시선을 받지만, 오히려 “‘청춘을 제대로 사용하고 있다’는 자기 확신”(49쪽)으로 가득했던 시절. 불안했지만 불행하지는 않았고, 미숙했지만 절대 미적지근하고 싶지는 않았던 작가의 성실하고도 찬란한 사랑의 흔적이 1부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곁을 내어주지 않는 냉담한 연인 같았던, 나의 깜냥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던 연인 같았던 문학과 영화. 치열하게 사랑했지만 끝내 응답을 받지 못했던 이 눈물겨운 과거사가 이상하게 아름답게 다가오는 건, “막상 헤어지기로 결심하자, 나는 이 사랑이 내게 남긴 것이 결코 상처만은 아니었음을”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끝내 몰랐을 것들이 내 안에서 빛나는 훈장이 됐음을” “이별로 끝났다고 해서 모든 연애가 실패는 아님을”(63쪽) 말하는 작가의 반짝이는 문장과 태도에서 오는 것일 테다.
그때 목숨을 걸고 찍었던 영화는 두 계절이 지나고 극장에 걸렸다. 나는 영화를 보면서 슬프지 않은 장면에서도 훌쩍거렸다. 영화 외에는 할 수 있는 멋진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던 무수한 밤들이 있었지만, 그것들이 모두 지나간 일이 됐다는 게 실감이 났다. 사랑했지만 떠나온 세계였다. (…) 몇 번의 실패를 거듭 겪으며 나는 이별을 결심하게 됐다. 하지만 막상 헤어지기로 결심하자, 나는 이 사랑이 내게 남긴 것이 결코 상처만은 아니었음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시작하지 않았더라면 끝내 몰랐을 것들이 내 안에서 빛나는 훈장이 됐음을, 이별로 끝났다고 해서 모든 연애가 실패는 아님을. _「사랑했고 떠나온 세계」에서
“누구와도 닮지 않았고 어느 쪽으로도 충분하지 않기 때문에
결국 나는 충분히 ‘나 자신’일 수 있는 것이다.”
울면서 걷고, 넘어지며 자라는 마음겨운 청춘들에게
2부 ‘울면서 걷기’는 갓 기자가 된 전후의 사회 초년생 시절을 담았다. 작가는 기나긴 직업 탐구의 여정 끝에, 지루한 가능성의 시간들을 견딘 끝에 한국일보의 기자가 된다. 그러나 “입이 없는 사람들의 입이 되어주고 싶”(6쪽)다던 포부와 달리, 경찰서 주차장에 주저앉아 눈물로 바닥을 적시고, “나는 정말 기자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12쪽)다고 되뇌는 날들의 연속이다. “모두가 자기 자리에서 자기 몫의 일을 해내고 있는데 나만 무용한 일을 거듭하고 있는 건 아닌지에 대한 끈질긴 의심”은 무시로 찾아오고, “충분히 기사이지도 충분히 문학이지도 못한 그 어딘가”(103쪽)에서 헤매는 건 도무지 익숙해지지 않는다. 문화부 기자가 되어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었을 때’ 닥칠 모든 일들을 겪으면서도, 그럼에도 결국 도망치지 않은/못한 것은 무책임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작가는 말한다. 문학으로부터 수혜를 입었고, 깨쳤고, 그것으로 직업까지 갖게 되었다는 사실을 없던 일로 할 수 없기에. ‘문학의 허물’까지 모두 사랑하기는 어려웠지만, “결국에는 미워하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문학이 더 나은 무엇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끈질기게 변화를 지켜보는 것”(113쪽) 역시 문학으로부터 배운 삶의 태도이기에 ‘나’는 문학도 내 일도 저버릴 수 없다. “여전히 세계는 온통 슬프고, 나는 울면서 걷고 있”지만, “그래도 걷고 있다.”(13쪽)
작가들을 좋아하는 마음은 일을 하는 동안에도 나의 큰 자산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직업으로 삼으면 더이상 그 일을 좋아할 수 없다고들 하지만, 나는 여전히 이 일이 좋았다. 좋아해서 잘 쓰고 싶었고, 좋아해서 잘 보이고 싶었다. 그래서 열심히 했다. 좋아하는 마음은 결코 부끄러운 것이 될 수 없었다. 설사 그게 직업이 된다 하더라도 마찬가지였다. _「‘성덕’이 되었습니다」에서
3부 ‘넘어지며 자라기’는 시니어가 되어 ‘청춘의 이면’을 살필 수도 있는 넓고 깊어진 시기의 글들을 담았다. 작가의 유구한 짝사랑 내력은 이제 ‘독자’로 향한다. 물론 이 사랑 역시 쉽지 않은 건 한결같아서, ‘기레기’라는 단어에서 비롯한 불신은 “내 존재 자체가 해악인 것은 아닐까” 하는 자기 의심으로까지 번져나간다. 그리하여 때로는 “결국에는 아무도 읽지 않을 기사, 그리하여 누구에게도 아무 영향도 끼치지 않는 기사를 쓰는 것”(186쪽)을 꿈꾸기도 하지만 “세상은 단순하게 좋고 단순하게 나쁜 것이 아니라 복잡하게 좋고 복잡하게 나쁜 곳이었고, 마찬가지로 사람 역시 복잡하게 좋고 복잡하게 나쁜 존재”(219쪽)임을 조금쯤은 헤아릴 수 있는 마음의 근육도 생겼다. 더불어 자기 의심에 휩싸이다 몰래 찾은 역술인에게 ‘회사 체질’이란 판정을 받자 손쉽게 인정하고 또 안도하는 모습은 읽는 이에게도 불가해한 위안을 건넨다. “사회 초년생은 뭔가를 증명하기는커녕 매일 실패하는 것이 더 자연스러운 존재”(193쪽)라는 사실을, “이 일을 계속하기 위해 어쩌면 진짜 필요한 건 일을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그저 하루하루 갱신하는 평범한 책임감”(248쪽)임을 이제는 안다. 넘어짐마저 환대하는 내 ‘유감’한 성격이, 삶과 일에 전전긍긍하면서도 마침내 긍정하는 것이 나의 ‘재능’이라는 사실도.
삶은 결코 내가 알던 박자로만, 익숙한 공으로만 저글링할 수 없었고, 이미 아는 길로만 달릴 수도 없었다. 때로는 새로운 공을 인생의 박자에 끼워 넣어야 하기도 했고, 낯선 길을 택해 가야 하기도 했다. 낯설지만 어쩌면 나를 새로운 세계로 데려다줄 수도 있는 길을 택하는 일. 그게 바로 성장의 다른 모습일지도 몰랐다. _「넘어지며 자라기」에서
지나갔고 또 지나가고 있는 젊은 날을 돌이키며 쓴 성장 에세이이자, 기자로서 성실하고도 애타게 흔들리는 나날을 담은 직업 에세이이기도 한 『청춘유감』. 문학과 일과 삶의 불가분한 관계가 이토록 복잡하게 아름답기도 하다는 것을, 한낮의 불꽃놀이 같은 청춘의 잔상이 ‘사랑의 역사’이자 ‘마음의 미래’를 그린다는 것을 우리는 이 책을 통해 알게 될 것이다. ‘한소범’이라는 쉬이 잊히지 않는 ‘이름’이, 쉬이 잊히지 않는 ‘작가’가 될 것이란 사실을 예감한다. ‘청춘 산문’을 이야기하자면, 이제는 한소범을 빼놓을 수 없을 것이다. 청춘은 언제나 되풀이하여 쓰이거나, 다시 쓰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청춘 역시 사랑과 닮아서 청춘 저 자신이 새롭게 쓰이도록, 새롭게 정의되도록 요구하기 때문일 터. 2020년대의 빛나는 한 청춘의 단면이 이 책 속에 있다. 눈물이 바짝 마른 자리에서 태어나는 반짝이는 문장들 속에서, 우리 빛나는 청춘의 증거들도 꼭 하나씩은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 추천의 말
대학 시절, 이따금 찾아가던 카페 중에 ‘십년후’라는 곳이 있었다. 그때는 만나려면 전화로 미리 약속해야만 했다. “십년후에서 만나”라고 말할 때마다 나는 희미한 떨림 같은 것을 느끼곤 했다. 십 년 후에 만났을 때, 우리는 어떤 사람이 되어 있을까? 그때 우리는 지금의 우리를, 그리고 나를 기억하고 있을까?
책에도 나와 있다시피 십 년 전, 나는 한소범씨에게 편지를 받은 적이 있었다. 그 편지에는 “저는 얼마든지 다른 사람이 되어 다른 모습으로 세상을 대할 가능성이 있습니다. 겸허한 배움의 순간들을 지나 매번 다른 사람이 되어갑니다”라고 씌어 있었다. 지난 십 년간 그는 무엇을 잊지 않으려고 했고, 또 무엇을 잊으려고 했을까?
그런 궁금증이 이 책을 펼치게 했다. 청춘의 기억은 저마다 치열해 다 내 것 같다. 이 글들을 읽으며 나는 십 년 후를 상상하던 이십대 초반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때 느꼈던 희미한 현기증을 오랜만에 다시 느꼈다. 십 년이 흐르고 다시 만난 그에게 말해주고 싶다. 다른 사람이 되어간다고 해도 괜찮다고. 십 년 전에 이미 그걸 알고 있었으니 다만 기억하기만 하면 된다고. 나에게도 들려주고 싶은 청춘의 기억들이다. _김연수(소설가)
이 책은 성실히 쓴 직업 에세이이자 ‘사랑했고 떠나온 세계’를 돌아보며 쓴 아름다운 성장 에세이이다. 내게는 무엇보다 자신의 쓸모에 대한 의심으로 밤낮 골몰한 이의 분투기로 읽혔다. 멈추지 않고 싶은 마음이 있다. 나를 추동하는 열정 같은 것이 있다. 딱 그만큼 도망치고 싶은 마음도 있다. 내가 내린 선택의 총합이 나라는 걸 마주하는 두려움도 있으니까. 그 마음들의 대결이 재능과 기회, 돈과 관계, 사랑과 우정에 대한 탐구로 이어지는 게 좋았다. 결국 그것들이 삶을 구성하니까. ‘하고 싶은 일’에서 ‘해야 하는 일’로 건너가는 사람은 많다. 그러나 그 안에서 내 세계를 새롭게 확장해가는 사람은 많지 않다. 새롭게 살고 싶다는 마음은 어떻게든 살아보지 않으면 해소할 수 없겠지. 나는 이 책을 오래 기억할 것이다. 인생에 거센 바람이 불 때 그 바람에 날려가지 않기 위해. 또는 그 바람을 타고 더 멀리 날아가기 위해. _강윤정(문학편집자, 유튜브 채널 <편집자K> 운영자)
■ 작가의 말
써야 할 것들만 신중하게 공들여 쓸 수 없는 직업이란 걸 알았지만, 그럼에도 송구한 마음은 자주 산화됐다. 쓰는 게 쉬워질수록 동시에 두려워졌다. 두 눈 똑바로 뜨고 세상을 바라보기는 겁이 나서, 질끈 감아버리고 싶은 때가 한두 번이 아니었다. 저마다에겐 절실한 사연인데 기사 가치로 판단하면 아무것도 아니기도 했다. 남의 삶을 그런 이야깃거리로 만들어버린 일이 잦았다. (…) 부끄러움에 훌쩍이던 날엔 글을 썼다. 소설도 기사도 아닌 것들을. 운문도 산문도 아닌 그냥 문장들을. 엉엉 울고, 눈물 닦고, 왜 울었는지 쓰는 것, 까지가 하나의 과정이었다. 그러고 나면 신기하게도 이 일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졌고, 그러다보니 조금씩 나아져왔다. 그러니까 우는(쓰는) 건 어쨌든 이해해보려는 노력이었다. 나를, 타인을, 세계를. _「에필로그」에서
■ 책 속에서
일의 어떤 속성은 유장한 시간과는 아무런 상관 없이 결코 익숙해지질 않아서, 나는 여전히 생각한다. 나는 정말 기자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나는 정말로, 아무것도 모른다고. 여전히 세계는 온통 슬프고, 나는 울면서 걷고 있다. 그래도 걷고 있다.(「프롤로그」, 12~13쪽)
그래서 소설을 썼다. 소설로 쓴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와 상관없이 사람들이 읽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쓴 소설이 교내 문학상을 받아 교지에 실리게 됐다. 학교 건물 곳곳에 비치된 신문을 보며 나는 앞으로도 내가 이걸 계속 원하게 될 거라는 걸 알았다. 쓰는 사람. 그리고 읽히는 사람.(「누구도 기다리지 않고 아무도 기대하지 않는」, 20쪽)
열심히 갚는 사람이 되고 싶다. 맛있는 걸 많이 먹여주고, 멋진 것들을 사주고, 기뻐하는 모습들을 보며, 받는 사랑 말고 주는 사랑의 기쁨을 누리는 사람이 되고 싶다. 그런 뒤에야, 지난 사랑의 부채감에서 벗어날 수도, 그 추억들에서 해방될 수도 있을 테다.(「다음엔 내가 살게」, 59쪽)
나는 ‘재주’ 같은 거 말고 ‘재능’이 갖고 싶었다. 그럭저럭 남들보다 조금 뛰어난 것 말고, 아주 자연스럽게 갖고 태어나 그것이 아니면 다른 수가 아무것도 없는, 말하자면 강력한 운명 같은 것. 누구라도 인정할 만한 압도적인 것. 그리고 가능하면 그 재능이 아주 눈부신 종류의 것이어서 많은 사람이 나를 알아챌 수 있었으면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내 존재가 너무 시시한 나머지 아무도 내가 여기 있다는 걸 모를 것 같았다.(「넌 자라 독후감 쓰는 일을 하게 될 거야」, 79쪽)
“실망시키지 않아줘서 고맙다”라는 L 선배의 인사는 ‘실망시키지 마라’라는 당부처럼 들렸다. 그 믿음을 배반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잘하고 싶어졌다. 다수의 가당한 지지보다, 딱 한 사람의 지지가 어쩌면 더 무겁고 귀한 것이다.(「딱 한 사람만 믿어줘도」, 90쪽)
허물까지 사랑하기는 힘들었다. 그래서 차라리 미워하겠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야말로 좋아하는 마음의 본질일지도 모른다. 사랑해서 미워하는. 사랑하지만 미워하는. 사랑하는데도 미워하는. 그럼에도 결국에는 미워하면서도 사랑할 수밖에 없는. 내가 문학을 좋아하는 것이 부끄럽지 않았으면 해서, 문학이 더 나은 무엇이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끈질기게 변화를 지켜보는 것. 그것이 사랑하는 사람의 태도라는 것을 가르쳐준 것도 결국엔 문학이었다.(「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면」, 113쪽)
자식은 어느 순간 엄마보다 멀리 간다. 엄마로부터 멀리 간다. 엄마가 모르는 것들을 배우고, 엄마가 모르는 것들과 사랑에 빠진다. 내가 온갖 문장들에 밑줄을 그으며 ‘나’라는 사람을 정체화해나가는 과정은 동시에 엄마로부터 멀어져가는 과정일 수밖에 없다. 엄마가 신문을 읽으며 평생 관심 가져본 적 없던 해외 작가의 작품과 예술영화에 밑줄을 그었던 것은 그렇게 멀어져가는 자식과의 간격을 좁혀보려는 안간힘이었을 것이다.(「나를 키운 밑줄」, 204쪽)
나는 대단히 도전적이지도 모험적이지도 않았다. 하지만 나는 계속해서 가능성 있는 존재이고 싶기도 했다. 늘 새롭게 발견되는 존재이고 싶었다. 나는 평범하게 나인 채로, 그냥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성실하게 해내며 마흔아홉 살까지 회사에 다니고 싶었다.(「제가 마흔아홉 살까지 회사 다닐 팔자라고요?」, 239쪽)
이 일을 계속하기 위해 어쩌면 진짜 필요한 건 일을 사랑하는 마음보다는 그저 하루하루 갱신하는 평범한 책임감일지 모른다.(「내가 기레기들을 사랑해서」, 24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