젓가락은 신의 것, 손가락은 인간의 것
1장 ‘젓가락은 어떻게 우리 곁에 왔을까’에서는 손으로 먹는 나라와 젓가락을 쓰는 문화의 구분부터 시작해 인간의 손이 유인원의 손과 갖는 차이, 처음 젓가락에 신에게 올리는 제사상의 음식을 옮기는 용도였을 때부터 일반화되기까지의 역사를 짚고 있다. 가령 젓가락은 처음 등장했을 때 핀셋 형태에 가까웠다. 한 개의 대나무를 구부려서 이런 형태를 만들었는데 의례의 음식을 옮기는 용도에 적합했다. 그리고 인간의 손엔 ‘짧은손바닥근’이라는, 작지만 불가사의한 기능을 하는 작은 근육이 있다. 이 근육은 우리가 손끝을 오므릴 수 있도록 하고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면 탄탄하게 받쳐주는 역할을 한다. 원숭이는 이 근육이 없다. 젓가락을 쓰는 한·중·일 문화에서 식사 방법에 따라 젓가락의 길이와 무게가 어떻게 다른지를 다룬 부분도 흥미롭다. 멜라민 수지로 만든 25센티미터 중식 젓가락의 무게는 20그램이다. 일식 젓가락으론 조금 긴 편인 24.2센티미터 멜라민 일식저의 무게는 19그램이다. 재질이 나무가 되면 더 가벼워진다. 나무젓가락은 중식과 일식 모두 12~13그램 안팎이다. 하지만 우리 젓가락은 22.8센티미터 스테인리스의 무게가 43그램이다. 식당에서 흔히 만날 수 있는 인삼 저분(손잡이에 인삼 문양이 들어간 베스트셀러로 인삼 숟갈과 한 쌍)의 경우 23
센티미터에 47그램이다. 삼치구이 한 마리를 꼼꼼히 발라내고 뚝배기감자탕 속 돼지등뼈에 붙은 살을 속속들이 젓가락으로 발라내본 적이 있다면 쇠젓가락의 무게를 실감할 것이다. 다 발라낼 즈음이면 손아귀에서 쥐가 난다.
칼의 각도가 15~25도 사이인 이유
2장 ‘유리의 최전선, 칼과 도마’에서는 질문을 던진다. 인간이 인간은 불을 먼저 만났을까, 칼을 먼저 만났을까? 정답은 칼이다. 고고학 유물로 출토된 다양한 돌칼에서 시작된 칼의 연대기가 펼쳐지는 2장은 역시 요리는 불맛, 손맛 이전에 칼맛이라는 점을 알려준다. 주방용 칼은 편도 15~25도 사이다. 이 각도면 베고, 썰고, 다지고, 저미는 여러 작업에 무난하게 쓸 수 있다. 무기로서의 칼도 이 각도에서 만들어진다. 15~25도 사이의 날각은 절삭력은 좋지만 내구성이 약해 자주 갈아줘야 하는 단점이 있다. 때문에 중국 무협영화에서처럼 칼끼리 부딪히며 합을 겨루다간 결정적인 순간에 목적을 상실할 수 있다. 편도 25~30도에서부터 날의 내구성이 강해진다. 조금 험하게 쓰는 사냥칼, 주머니칼, 캠핑 레저용 칼이 이 범주에 들어간다. 사시미칼은 15~17도로 한쪽 날만 세운다. 한쪽 날만 세우기 때문에 오른손잡이용과 왼손잡이용이 따로 있다. 이렇게 한쪽으로만 날을 세우면 부드러운 재료를 얇게 자를 수 있고 잘린 면이 깨끗하고 아름답다. 칼의 예리함이 요리에 그대로 표현되는데 칼을 눌러 써는 것, 당겨 써는 것, 칼끝을 대고 눌러 써는 것, 칼이 도마에 닿지 않고 써는 것 등 방법에 따라 요리의 식감이 달라진다. 인류학자 E. N. 앤더슨은 중국 칼을 가리켜 만능이라고 불렀다. 자세히 살펴보면 겉보기와 다르게 아주 섬세하게 가공되었기 때문이다. 중식칼은 그냥 네모진 것 같지만 날 부분에 살짝 배가 나와 유선형을 이룬다. 이로 인해 식재료 위에 칼날을 얹어 가볍게 아래위로 흔드는 것만으로도 썰기가 가능하다. 또 넓적한 몸체는 썰어놓은 식재료를 한 번에 옮기는 데 유용하다. 단단한 재료를 다듬는 것은 몸통을 두껍게 만들고 야채 등 부드러운 재료를 다듬는 것은 몸통을 얇게 뺀다.
당신은 아는가, 나무도마의 복원력과 항균력을
칼에 가장 친절한 도마는 나무도마다. 칼이 잘 미끄러지지 않으며 모진 칼질을 적당한 탄력으로 받아내 날의 예리함을 지속시켜준다. 나무도마는 수분을 머금었다 마르는 과정에서 칼질로 생긴 상처를 복원하는 힘이 있다. 복원력이 가장 좋은 것으로는 은행나무를 으뜸으로 친다. 이 특성으로 무거운 유기 식기에 눌린 자국이 생기기 쉬웠던 우리 전통 밥상은 은행나무로 만든 것을 최상급으로 대접했다. 젖은 행주로 한 번 훔쳐놓으면 다음 끼니가 되기 전에 눌린 자국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또 나무 자체에 유분이 많아 물빠짐(건조)이 가장 잘 된다. 나무도마는 위험한 잡균이 서식할 수 있다는 편견이 있지만 나무 자체의 항균 작용으로 인해 잘 씻고 말려주면 가장 안전한 재질이다.
물과 불이 만나는 냄비의 혁신
4장 ‘따뜻한 한 그릇의 밥이 되기까지, 냄비’에서 저자는 재난이 생겼을 때 가장 먼저 챙겨야 할 조리 기구는 냄비라고 말한다. 냄비 하나만 챙겨도 우리가 일상에서 먹는 대부분의 요리를 할 수 있다. 볶고 삶고 데치고 끓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식용유가 풍부하다면 튀김도 가능하다. 냄비 요리를 다룬 요리책에는 보통 100~200여 가지의 음식이 소개되어 있지만 프라이팬 요리를 다룬 책에는 30~40여 가지가 전부다.
불과 물이 만나야 냄비 요리가 완성된다. 불에 구우면 소실될 수 있는 고기의 지방과 육즙은 물을 매질로 하여 냄비 속으로 녹아든다. 냄비는 분류학상 서로 거리가 먼 동물과 식물, 해산물과 균류(버섯)를 한 자리에 불러 모아 맛과 영양을 교환할 수 있도록 한다. 일부 콩류나 고사리, 가지 같은 식물들은 물에 불리거나 삶고 데치는 과정이 있어야 비로소 안전한 먹거리가 된다. 감자, 토란, 도토리의 전분은 열처리하지 않으면 소화가 불가능하다. 수많은 자연의 산물이 냄비의 발명으로 인류의 식탁 안으로 들어왔다.
볶음밥의 국산화는 언제 이뤄졌을까
통계는 없지만 1945년이 되면 프라이팬이 꽤 보급된 것으로 보인다. 매일신보 3월 10일자에 ‘후라이판은 이러케 다룰 것’이라는 기사가 있다. 기름을 조금 발라 보관하라고 했고 눌러 붙은 것을 제거하려면 계란 껍데기를 잘게 부수어 신문지로 닦으라고 했다. 이 시기에 오면 볶음밥을 중식으로 인식한다. 중국은 6세기경 위진남북조 시대에 쇄금반碎金飯이라고 불린 볶음밥을 먹었다는 기록이 있을 만큼 볶음밥의 역사가 깊다. 여기에 19세기 말 제물포와 인천으로 들어온 중국인들이 식당을 열면서 청요리가 일식과 함께 고급 요리의 대명사로 자리를 잡아가던 시기였으니 볶음밥을 중식으로 인식했어도 무리는 아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언제부터 볶음밥이라는 요리에서 국적을 연상하지 않게 되었을까? 분명히 김치를 넣고 밥을 볶아먹기 시작한 후부터일 것이다. 프라이팬이 1940년대에 주방기구로 우리 부엌에 들어왔다고 본다면 대략 1940년대 말에 등장했을 수 있다.
하지만 볶음밥이 확실한 한국 국적을 취득하게 된 것은 1970년대라고 생각된다. 돼지 생산량이 미약했던 그 전에는 돼지기름이 비쌌다. 식용유가 풍부해진 것은 1969년과 1971년 오뚜기, 해표와 같은 식품회사가 설립되면서부터다. 이때부터 대두를 사용한 콩기름이 대량으로 시장에 나왔다. 알루미늄에 에나멜 코팅을 한 프라이팬이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한 것이 이 시기다. 이제 밥상에 손쉽게 볶은 김치를 올려놓을 수 있는 기본준비가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