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생과 재생 사이에서의 부활
『그 인연에 울다』는 어머니의 생으로 대표되는 ‘재생’과 아이의 생으로 대표되는 ‘신생’ 사이에서 부유하는 시인의 생을 이야기하고 있다. 일상적인 것들에 포위되어 색을 잃어버리고(「나도 색을 쓰고 싶다」) 상해 있으며(「신비하다」) 수만 갈래 길 앞에서 길을 잃고(「미로에서」) 세상과 교감하는 능력을 박탈당한 몸이 세계로부터, 그리고 자기 생으로부터 거부당한(「각질은 무섭다」) ‘나’의 생은 극지로 밀려나 있다. 『그 인연에 울다』는 이러한 시인이 스스로 질병의 원인을 찾아 마침내 그것을 치유해나가는 과정을 그린다.
나를 위문오신 어머니와 약수가 나는 산을 오른다 내가 모르는 풀들과 어머니가 인사를 나누는 사이 나는 딸에게 보여줄 할미꽃을 뿌리째 뽑는다 어머니는 할미꽃의 뿌리를 끊어 무덤가에 던지신다 뿌리는 내년에도 꽃을 피워야지 흙냄새만 맡아도 뿌리는 뻗으니까 나를 살릴 흙이 있나 두리번거리는 내 마음을 나보다 먼저 읽으신 어머니는 가시밭이든 자갈밭이든 어디든 뿌리는 내리면 다 살게 돼 있어 거기가 내 자리다 믿으면 약초를 뜯으며 어머니는 부유하는 내 생에 약손을 대신다 ―「어머니와 함께 한 산책」 전문
병든 딸을 데리고 “약수가 나는 산”을 오르는 어머니는 혈연으로서의 어머니를 넘어 딸이 모르는 풀들과 일일이 교감하는 생명의 어머니다. 생명의 어머니는 죽음의 상징인 할미꽃을 죽여 무덤가에 던진다. 그리고 죽음의 처소에 새로운 죽음을 포개놓으며, 병든 딸에게 재생을 암시한다. “나를 살릴 흙”, 뿌리 내릴 흙이 없는 딸아이를 위해 어머니는 “약손을 대신다”.
어린 딸 역시 병든 ‘나’를 위해 생명의 주문을 왼다. “꺼뭇꺼뭇 검버섯이 핀 내 생”에 ‘꽃그림’을 안겨주고, 무지개를 그리고, 악귀를 내쫓는 무기이자 “몸 속의 때를 닦아서 몸 밖으로 내보내”(「웃는 시간」)는 약인 소금을 내민다. ‘나’의 깊은 병이 어린 딸과 어머니에 의해 서서히 치유되어가는 것이다.
이제 상한 몸으로 캄캄한 겨울을 통과해 새봄을 맞이하는 ‘나’의 시는 죽음을 딛고 흥겨워져 있다. 그리고 새로운 생명으로 출렁거리며 다시 알을 깨고 세상 밖으로 나오고 있다.
양선희의 시는 겨울에서 봄으로 가는 도정이다. 최악의 생, 즉 상한 몸으로 캄캄한 겨울을 통과해 드디어 새봄을 맞는 치열한 투병의 기록이다. 사물과 사태를 은유하는 능력은 원숙하다 못해 농익어 있고, 그리하여 은유에 동원된 대상과의 거리는 넉넉해 때로 다 안다는 듯, 다 모른다는 듯, 능청스러운 가락에 올라타기도 하지만, 거개의 시들은 일상적인 것들에 포위되어 있는 자기 자신을 성찰하고, 마침내 거기에서 탈주하고 싶어하는 맑고 힘찬 욕망을 노출시킨다. ―이문재(시인)
여기 한 여자가 있다. 자기 몸을 자식들에게 뜯어 먹히고 싶어 안달이 난 여자가. 여기 한 시인이 있다. ‘미치면 나 무엇의 위로가 될 수 있을까’라고 묻는 여자가. 우리의 발 아래 희생의 번제물이 되고 싶어 자신의 몸을 스스로 때리는 여자가. 여기 한 여성시인이 있다. 상처 속에서 향기가 솟아나게 하려고 몸의 문을 열어젖히는 주술의 리듬을 전신을 다해 풀고 있는 여자가. ―김혜순(시인)
양선희의 시를 인상적으로 만드는 것은 말을 다루는 솜씨다. 그 솜씨는 부박한 재치나 기교와 다른 자리에 있다. 주부로서 그리고 어머니로서 시인이 종종거리며 감당하고 있는 삶의 실감이 그의 언어를 굳게 떠받치고 있기 때문이다. 일상의 범백사를 시로 길어올리는 그의 밝은 눈과 더운 마음이 탐난다. ―고종석(소설가)
* 2001년 4월 27일 발행/ISBN 89-8281-386-6 02810
* 신사륙판/96쪽/값 5,000원
* 편집담당:김현정, 김미영(927-6790 내선 217, 2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