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빈집을 지키며} {라자로 마을의 새벽} {파랑 눈썹}에 이은 조창환의 네번째 시집 {피보다 붉은 오후}가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서정시인을, 자연과 교류하며 자연이 보여주는 삶의 가치와 의미를 읽어내는 서정적 시선을 지니고 존재의 근원을 찾아나서는 자라고 할 때(문학평론가 금동철), 이 시집에서는 자연 사물들이 가진 어린아이의 이미지, 부드러움, 포근함을 주시하는 작가의 서정적 시선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시선은 병마와 싸우던 절대절명의 순간, 죽을 수도 있었던 저자의 병상 체험과 어우러지며 더욱 빛을 발한다. 생명의 작은 움직임들, 그 안에서 더 치열해지는 삶에 대한 욕망. 그래서 {피보다 붉은 오후}는 한 시인의 영혼의 울림이 진득하게 묻어나오는 결이 고운 언어들로 가득하다.
시는 사랑이며 기쁨이며 눈물이어야 한다
담쟁이덩굴이 벽이 끝나는 곳에서
물끄러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다
빈 하늘이 보송보송하다
병아리 솜털 같은 바람이 불다 말고
새들이 만든 길을 가만가만 지운다
-[하지] 전문
조창환의 시에서 모든 자연 사물은 포근한 생명력을 지니고 시인에게 말을 걸며 의미의 세계를 열어 보인다. 그것은 결코 커다란 움직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작고 사소하며 어쩌면 잊어버려도 좋을 만큼의 움직임을 지니고 있다. 이 조용하면서도 앙증맞고 귀여운 속에서 펼쳐지는 생명의 아름다움에 대한 경이는 자신의 삶에 대한 경이로 이어지면서 시인이 살아가는 세계, 공간을 이중적으로 나타낸다.
바흐의 무반주 첼로 조곡이
저음으로 흐르는 시간
갑자기 세상이 무서워지고
내가 여기
살아 있음이 소름끼친다
꿈에 활을 맞은 날 아침
황급히 창을 닫고 큰 나무 하나 끌어안는다
-[꿈에 활을 맞은 날 아침] 중에서
자연이 보여주는 삶의 경이 앞에서 감동할 수 있는 시인에게는 자신의 삶 또한 그저 아무렇게나 살아갈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소름끼치는 그 무엇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 사물들이 차가운 비수가 되어 자아를 위협하고 그래서 정신이 더욱 날카롭게 일어섰던 시인의 병상 체험이 가로놓인다. 부드러운 생명력이 사라지고, 사물들 사이의 긴장과 차갑고 날카로운 이미지들로 가득한 또하나의 공간이 창조된 것이다. "풀잎 같은 초승달" "날 선 바람" "살 떠낸 물고기 뼈" 등의 시어는 차가운 벽이 되어 자아를 위협하는 사물들의 이미지를 선명하게 보여준다.
하지만 이 또다른 공간에서 비로소 생명의 세계는 찬란하고 빛나는 힘을 내포한다. 시인은 이제 "기억하라 육체는/찢어지고, 눈 부릅뜬 정신만이/칼자국을 억누른다 상처는 이제/길이다!"([소금을 바르며])라고 말한다. "고통을 뛰어넘는 시련을 거쳤을 때 정신이 더욱 찬란하게 빛나듯이 칼날같이 차가운 사물의 벽을 뛰어넘을 때 생명은 부드럽게 피어날 수 있는 것이다."(금동철) 그리하여 이제 시인은 "비 갠 날의 산정처럼 맑고 선명하"며, "투명한 언어와 정결한 이미지로 단순하면서도 절제된 호흡을 나누는 시"(自序 중에서)를 써내었다.
이 시에 대하여
조창환이 근래 쓰는 시의 특색은 세상을 포용하는 시야가 넓어졌으며 사물을 바라보는 시선은 더욱 따뜻해졌다는 점이다. 그 결과 삶 안에 있는 모든 것들이 시에서 서로 가족처럼 오순도순 다정하게 지내고 있으며, 이러한 모습을 담은 시의 심상은 저 멀리까지 비쳐보일 만큼 투명하며 청결하다. 시의 심상에 어울리게 시의 리듬 역시 잔잔히 흐르면서도 그 안에 고운 맥이 뛰놀고 있다. -성찬경(시인)
"시는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이 있다. 맑고 따뜻한 시선으로 모든 자연과 인간에 보내는 경이로운 사랑의 언어를 읽어나가면서 우리는 이 시인의 겸허한 인품과 함께 정신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 작고 부드러운 것에의 관심과 경탄은 시는 사랑이며 기쁨이며 눈물이어야 한다고 말하는 시인의 순정한 육성이기도 하다. 삶의 고귀함에 대한 경외, 생명의 신비에 대한 경탄, 존재에 대한 화해의 정신은 이 시집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 빛나는 시인의 예지가 담긴 견고한 구조의 시편들은 지적 즐거움과 함께 가슴을 울리는 향기롭고 부드러운 힘을 지니고 있다. -허영자(시인)
*2001년 7월 27일 발행/ISBN 89-8281-413-2 02810
*신사륙판/112쪽/값5,000원
*담당편집: 김현정, 장한맘(927-6790, 내선 217, 214)
비 갠 날의 산정처럼 맑고 선명한 시를 쓰고 싶었다. 투명한 언어와 정결한 이미지로 단순하면서도 절제된 호흡을 나누는 시를 빚고 싶었다. 누군들 마음 깊은 속에 얼룩과 때 끼지 않은 사람 있으랴만, 내가 쓰는 시에는 그 더께 앉은 얼룩과 때와 기름기를 훑어내고 다만 청결한 정신의 순정함만이 남아 있으면 좋겠다. (自序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