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바 1970년대 산(産) 신세대 작가군 중에서도 가장 전위적인 소설 세계를 보여주고 있는 백민석의 두번째 소설집. 위선으로 가득 찬 폭력적 세계의 현실을 뒤집고 비트는 그의 상상력은 재현의 언어를 조롱하며 반(反)문학적인 언어로 세계의 부정성을 낯설게 폭로해왔다. 그의 작업은 우리 의식의 폐기물들을 전혀 낯선 맥락 속에서 조명하게 만들었고 경험 현실의 이면을 그로테스크하게 건져올려 부유하는 검은 유령들로 우리의 도시를 뒤덮어버리곤 했다. 다분히 의도적인 백치의 시선과 언뜻 언뜻 그 뿌리를 드러내는 자기 연민의 시적 아우라가 여기에 겹쳐지면서 백민석의 장원은 이제 어엿한 한국 소설의 영토로 자리를 잡아가는 느낌이다. 이번 소설집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은 그 뚜렷한 증거다.
작품 해설을 맡은 최성실씨에 따르면 이번 소설집의 키워드는 유령이다. 유령이란 망각하고자 하는, 폐기처분하고자 하는 기억들의 다른 이름이다. 그것은 또한 외면하고 싶은 공포의 다른 이름이기도 하다.
백민석의 최근 소설들은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의 한 극단을 보여준다. 곧 "직사광선 아래 놓아둔 빠닥빠닥한 알루미늄 포일처럼 쿨하면서도 조금은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이 그것이다. 기억과 자의식의 진창늪 속에서 아주 작은 한 구멍과도 같은 의식의 타자를 발견케 한 것 또한 이러한 상상력의 힘이다. 이렇게 발견된 타자로 인해 현실은 갑자기 흑백의 영상으로 채워지고, 그 타자들은 좀비의 형상으로 주술과도 같은 노래를 부르며 나의 주위를 에워싼다. 일상화된 주체로서의 나에게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전조처럼 다가오는 이 타자들의 세계, 그것은 텍스트화된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필사의 도정 끝에서 백민석이 발견해낸 환각과도 같은 출구를 표상한다. ―손정수(문학평론가)
일상이라고 하는 유령, 그리고 공포
하여,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에는 시종일관 유령이 출현하고 있다. 그런데 그 유령은 동화적이거나 환상적인 귀신이 아니라 우리의 일상 그 자체다. 여기에 백민석이 말하는 공포가 있다. 그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것은 그 공포로부터의 탈주이며 그 공포의 탈신비화 작업이다. 당연히 그 유령들은 시간의 더께를 덮어쓰고 초라하게 앉아 있으며 서서히 부패하고 있다. 그 유령들은 aw, wt, ru 등 기호로 지칭될 뿐 이름이 없다. 특정한 개인이 아니라 오물통 속으로 던져버린 의식의 폐기물들이기 때문이다. 문명과 도덕의 이름으로 배제하고 팽개쳐버린.
표제작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에는 커다란 저택에 살고 있는 도련님 aw와 언젠가 그 저택에서 잔심부름을 한 적이 있는 심부름꾼 나가 등장한다. 일과중 하나로 도련님의 놀이상대가 되면서, 나는 "머리는 작"고, "손과 발도 계집아이처럼 희고 작고 보드랍"고 얼굴은 "무언가 값비싼 물건처럼, 탐이 날 정도로 환히 빛나"며 "움직임은 가볍고 날렵"하고 피부는 "맑고 투명하고", 입술 표면으로 "얄따란 미소"를 지으며 "여러 개의 문장이 엮어진 복문장"을 구사하는 aw에게 질투를 느낀다. 그러고는 걸음걸이, 표정, 미소, 행동, 말씨 그리고 마지막에는 aw의 일기장을 보며 문장을 베끼기 시작한다. 십구 년 뒤, 장원을 찾은 나는 aw가 죽은 것을 알게 된다. 그토록 베끼려는 대상은 다름아닌 죽은 시체, 유령이었던 것이다. 나는 죽은 aw의 방에서 일기장에 적힌 aw의 독백을 읽는다.
"가르쳐주고 싶다, 심부름꾼 아이 너에게는 나만한 영혼이 없다는 것을. 아무리 읽어도 나와 똑같은 언어를 구사할 수 없다는 것을. 너는 영혼이 텅 빈 아이라는 것을."
문학평론가 최성실씨는 이것이 이미지 자체가 얼마나 가짜에 불과한지를 거꾸로 탐색해나가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은 베끼는 행위 자체가 이미지의 허구성을 드러내는 것이면서 동시에 그 허구성에 종속되는 것임을 보여주는 과정이다. 그래서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에 등장하는 유령의 복고적 취향은 황홀과 편안함이 아니라 두려움과 공포를 심어주는 실재의 재현으로 부각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소설에는 생존을 위협당해본 자가 세상에 느끼는 무서움과 자신 스스로 세상에 얼마나 공포스러운 존재가 될 수 있는가에 대한 두려움이 깔려 있다."
「이렇게 정원 딸린 저택」은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의 연장선에 있는 작품이다. 이 소설에서 나는 죽은 자(우체국통장으로 돈을 넣어주던 후원자)가 살던 저택에 손님으로 초대된다. 자기가 갈고리이며 누군가 걸려들길 기다리는 중이라고 하는 죽은 자의 아들은 저택을 찾는 사람들을 다락으로 불러다가 발가벗겨놓곤, 캔버스에 그들의 모습을 그린다. 그리고 그들의 발을 잘라 요리한 고기 덩어리를 나에게 내놓는다. 이 식인의 카니발이 불러일으키는 구역질, 그 너머에는 아무것도 없다고 작가는 말한다. 그렇다면 이게 다란 말인가.
「인형의 조건」은 아파트 승강장에서 만난 여자아이 ru의 생일 선물로 줄 수제인형을 중심으로 일어나는 에피소드로 구성되어 있다. "껴안으면 안위감을 느낄 수 있을 만치 컸으면 좋겠다고 했다. 할머니의 품 같으면 좋겠어. 너무 풍요롭지 않게 적당히 말랐으면서도 아직 따뜻함을 잃어버리지 않은. 그리고 살갗에 닿는 것인 만큼 폴리에스테르가 아닌 순면 소재였으면 한다고 했다. 털이 있든 없든 상관 않겠지만 만약 있다면 짧은 것이 좋겠다고 했다. 색상은 잘 잠들 수 있도록 파스텔톤에 어두운 계통으로, 하지만 그걸 바라보고 있으면 기분이 나빠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기계에 돈을 넣고 뽑는 인형이 아니라 주문하는 사람의 취향에 맞게 손으로 만들어지는 수제 인형, 그 수제 인형을 소녀에게 갖다주지만 몇 마디 말도 나누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헤어지고 만다. 소녀가 간절히 소망하던 인형은 승강기 앞에 덩그러니 놓여 있다. 독자는 ru가 유령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결국 나가 만난 ru는 유령, 즉 할머니처럼 포근한 인형을 갖고 싶어했던 유년기, 크지 못한 자신, 그리고 유년기에 겉돌았던 자신의 실체를 직면하게 해주는 살아 있는 과거인 것이다.
「검은 초원의 한켠」은 아파트 한켠에 애완용 공간을 키우는 il에 대한 이야기다. 누구나 살기 위해서 공간을 하나씩 갖고 있는데 그것이 역설적이게도 죽음을 담보로 한 검은 풀밭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모두 젊은 나이에 정상적인 삶의 궤도에서 일탈했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혼을 하거나 혼자인 사람들, 세상에 자기 편이라고는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들. 그들이 키우는 검은 초원은 결국 칙칙한 도심지 아파트에서 내려다보는, 해가 떨어지는 밤 풍경을 의미한다.
이 밖에도 고개를 돌리면 죽은 자, 시체가 물끄러미 나를 바라보고 노래를 부르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상상에서 출발한 「구름들의 정류장」, 자신을 지탱해주던 극장이 더러운 오물들로 가득 찬 무덤으로 변했다는 두려움으로 이루어진 「진창 늪의 극장」, 누구나 막막하고 어두운 시간 속으로 함몰되어 어디론가 사라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공포를 그린 「아주 작은 한 구멍」 등 『장원의 심부름꾼 소년』에는 공간과 시간을 초월하여 불러낸 유령 이야기로 가득하다. 다시 한번 최성실씨의 말을 인용해보자.
백민석 소설들이 보여주고 있는 유령 연작은 향연장에 초대받은 시모니데스(Simonides)처럼 죽은 자들이 어떤 자리에 앉아 있었는가를 기억하는 기억술에 관한 것이다. 결국 백민석은 장원과 극장, 아파트 승강기 앞, 신문 보급소, 병원과 같은 공간을 중심으로 그의 모든 상상력을 동원하여 잊고자 한 것들을 사실상 유령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불러내고 살려낸 셈이다. 백민석 소설의 유령들은 도저히 망각할 수 없는 삶의 흔적을 따라서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살아 있는 과거인 것이다. 그것이 예사롭지 않은 이유는 자신만만하게 이제 그 유령들을 돌아보라고 외쳐대는 그 소리 때문이다.
이 책에 대하여
백민석의 최근 소설들은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의 한 극단을 보여준다. 곧 "직사광선 아래 놓아둔 빠닥빠닥한 알루미늄 포일처럼 쿨하면서도 조금은 그로테스크한 상상력"이 그것이다. 기억과 자의식의 진창 늪 속에서 아주 작은 한 구멍과도 같은 의식의 타자를 발견케 한 것 또한 이러한 상상력의 힘이다. 이렇게 발견된 타자로 인해 현실은 갑자기 흑백의 영상으로 채워지고, 그 타자들은 좀비의 형상으로 주술과도 같은 노래를 부르며 나의 주위를 에워싼다. 일상화된 주체로서의 나에게 무어라 불러야 할지 알 수 없는 전조처럼 다가오는 이 타자들의 세계, 그것은 텍스트화된 현실로부터 벗어나기 위한 필사의 도정 끝에서 백민석이 발견해낸 환각과도 같은 출구를 표상한다. ―손정수(문학평론가)
그는 많이 사색하고 조금 말하고 그리고 아주 적게 써야 한다는 것을 잘 아는 작가이다. 피할 수 없는 것은 극복되어야 하며, 때로는 운명에 맞서 싸우는 것도 필요하다는 걸 잘 알고 있는 소설가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일이다. 그의 소설을 읽고 나면 나는 여전히 『현대시작법』이 새로 읽고 싶어지니 말이다. 고정관념과 모럴과 이즘과 제도와 타협하지 않는 그를 나는 좋아하지 않을 도리가 없다. 때때로 타협이란 몰락과도 같은 것이니까. ―조경란(소설가)
*2001년 8월 30일 발행/ISBN 89-8281-419-1 03810
*신국판/304쪽/값8,000원
*담당편집: 김현정, 장한맘(927-6790, 내선 217, 214)
백민석은 장원과 극장, 아파트 승강기 앞, 신문 보급소, 병원과 같은 공간을 중심으로 그의 모든 상상력을 동원하여 잊고자 한 것들을 사실상 유령이라는 이름으로 모두 불려내고 살려냈다. 백민석 소설의 유령들은 도저히 망각할 수 없는 삶의 흔적을 따라서 여기저기서 출몰하는 살아 있는 과거인 것이다. -최성실(문학평론가) \n\n \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