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한 강영숙의 소설집이 문학동네에서 출간되었다. 빠르지 않은 첫 소설집이니 만큼 한 편 한 편 그간의 공들임이 고스란히 배어 있는 작가의 작품 속에서 현실과 환영은 하나로 맞물려 또하나의 현실, 또하나의 현재를 만들어내고 있다. 낯설지만 멀지 않고, 익숙하지만 진부하지 않은 독특한 그만의 세계가 잘 녹아 있는 열한 편의 소설들에서는 신인다운 신선하고 새로운 시선과 함께, 결코 신인의 그것이라 보기 힘든 깊이가 느껴진다.
진정성의 깊이가 찾아낸 결핍의 형식
문학평론가 정홍수는 강영숙의 소설이 상처 입은 존재의 내면을 드러내고 인간의 발견에 이르는 강렬한 무엇을 지니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그것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구체적 결핍에서 비롯하는 진정성의 깊이"라고 덧붙인다. "관념화된 결핍의식을 밀어내고 구체적 결핍에서 시작하는 강영숙 소설의 진정성 추구가 환영과의 대화적 긴장을 소설적 방법론으로 찾아내고 그로부터 자기 대면의 길을 새롭게 열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소설집에 수록된 열한 편의 단편들을 하나로 꿰고 있는 주제의식이기도 하다. 표제작 「흔들리다」는 세상 속 진입로를 잃어버리고 침몰한 러시아 핵잠수함 에 빠져버린 남편과 헤어져 친구 한나의 집에서 더부살이를 하는 나(민영)의 이야기이다. 생활을 포기해버린 백수 전남편에 대해 오만한 경멸과 분노를 아끼지 않지만 실은 나 역시 어린 시절 밥상을 내던진 아버지에 대한 기억으로 세상 모든 것을 병적으로 의심하며 지도를 끼고 사는 상처받은 인간이다. 지금의 나에겐 삶의 증거로 영수증에 찍힌 시간에 집착하는, 결벽적 채식주의 성벽을 보이는 또다른 콤플렉스투성이 인간 한나와의 주말 고속도로 여행만이 유일한 삶의 출구다. 하지만 그 여행에서 돌아오는 길, 나 는 침몰한 러시아 핵잠수함에 미쳐 있는 전남편의 안타까운 길찾기를 자신의 흔들리는 실존 위에 겹쳐놓는다.
「양털 모자」나 「밤의 수영장」 「바다에서 사막을 만나면」 등의 작품들 역시 마찬가지다. 남편을 버리고 집을 뛰쳐나와 양털 모자를 쓴 멕시코 여자에게서 들었던 그곳 조슈아 트리를 찾아가는 여행. 큰 설렘도 기대도 가지고 있지 않았지만 이 세상 모든 것이 환히 보인다던 그곳은 아름다운 모래무늬도, 사막의 붉은 노을도 없는 그저 모래언덕일 뿐이고(「양털 모자」), 날건달 수영코치에게 집착하는 전직 수영선수는 한쪽 귀의 청력을 잃고 33킬로그램이나 몸이 불어버린 지금도 수영장 주변을 벗어나지 못한다(「밤의 수영장」). 대학 신입생 시절 너무도 당당하게 진정한 자유를 원한다고, 어떤 것에도 구속받고 싶지 않다고 말하던 신애는 지금 "바람 부는 들판에 누워 단 십 분만이라도 편안했으면" 하는 게 소원이다(「바다에서 사막을 만나면」). 비루하고 남루한, 참혹한 일상......
소설 속 주인공들은 어느 사이 환영 속으로, 환상 속으로 빠져든다. 그러나 그것은 도피의 그것이 아니다. 밀도 높은 단편의 전범이라 할 만한 「트럭」에서, 고속도로변에서 여든 가까운 나이의 아버지와 사는 서른 살 어름의 나는 십 년을 다닌 전직장에서 가지고 나온 회원 파일을 팔아넘기며 죽음 같은 시간을 견뎌나간다. 그런 그녀의 다른 한켠에선 집 근처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트럭을 둘러싼 환영이 펼쳐진다. 도로변에 버려진 커다란 트럭에서 촉발된 여자의 몽상이 땀내나는 남자의 커다란 몸으로 옮겨가고 마침내 트럭 남자와 함께 하는 "신기한 여행"으로 뻗어나가는 것이다. 이 봄밤의 환영은 오히려 현실의 텍스트가 한갓 허구인 듯 보이게 하기도 한다. 어느 것이 현실이고 어느 것이 환상인지 도무지 구분이 되지 않는다.
이것은 「청색 모래」에서도 마찬가지. 허섭스레기 같은 앤티크와 인형에 대한 아내의 집착이 "그 물건들이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그녀만의 민감성, 세상에 대한 지나친 연민에서 비롯된 것임을 스스로에 대한 분노 속에 깨달은 내가 찾아낸 것은 바로 "헛것" 청색 모래 문이었다. 온통 모래로 뒤덮인 땅 아래 얼음 강이 있었고 눈을 긁어내니 물 속을 오가는 물고기들이 보였다. "얼음은 차고 강물은 푸르렀다. 마치 그녀처럼…… 나는 생전 처음 그녀 곁에 가까이 다가간 느낌이 들었다."
이밖에 철거 직전의 빈 아파트에 백수건달 남편을 남겨두고 매일매일 끝장을 꿈꾸며 건너편 레스토랑으로 출근하는 여자(「불빛과 침묵」), 다방 주방에서 일하며 가출한 딸을 찾아 헤매는 어머니(「서로의 안부를 묻다」), 팔리지 않는 알로에 가게를 지키다 저녁이면 집으로 돌아와 다육질의 알로에 줄기를 우적우적 씹어먹으며 삶의 허기를 메우는 다리 저는 여자(「팔월의 식사」), 부모가 떠나버린 집에서 슬픔을 잊기 위해 단 것을 탐식하는 아이(「검은 밤」), 황량한 벌판과 요정, 화려한 불빛의 메기호텔이 자리잡은 어두운 골목에서 보낸 어린 시절의 이야기(「피라미드 모양의 만성두통」) 등 작품들은 모두 그 무게와 깊이가 부족함이 없다.
강영숙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열등감에 시달리는 콤플렉스투성이 인간들이다. 김윤식 교수가 지적한 대로 강영숙은 누구에게나 있는 열등의식들을 민감하게 포착하여 소설 속에 부려놓는다. 현실이 아픈 주인공들이 빠져드는 환상 혹은 환영은 실제는 아니지만 분명 실재하는 또하나의 현실이다. 작가에게, 그리고 그의 인물들에게 현실에 당당히 맞서라는 충고는 옳지 않다. 그들은 그 나름의 방식을 찾아 그 현실과 대면하고 나아가 자기와 대면한다. 비참한 현실을 아파하고 철저히 들여다보는 것이다.
열한 편의 소설들을 읽어나가다 보면 어느새 아파온다. 강영숙의 인물들을 "바람 부는 들판에 누"이고 "편안하게 쉬"게 해주고 싶고, 그 옆에 함께 누워 그렇게 편안하고 싶다.
열등감이란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발현되며 치유될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단연 보편의 주제급에 속하겠지요. 누구나 많건 적건, 또 알게 모르게 열등감에서 자유롭지 못한 법이니까. 신인 강영숙씨는 이 점에 썩 민감하거니와 데뷔작 「팔월의 식사」도 그러하지만 「밤의 수영장」「트럭」도 마찬가지. 다리를 저는, 그러니까 지체부자유자인 한 처녀의 민감성에서 살빼기 콤플렉스에 빠져 있는 여인의 고민에 이르기까지 강영숙씨가 지금껏 해온 작업은 썩 의의 있는 일이 아닐까. 민감한 감각이야말로 글쓰기의 기원이라는 점에서 이는 특유의 지평일 수 있기에. 김윤식(문학평론가, 명지대 석과교수)
강영숙의 소설 속에서는 뜨거운 모래바람과 사막의 환영이 어른거린다. 막다른 곳을 향해 치달아가는 소설 속 인물들의, 발화점에 이른 긴장과 뜨거움과 위태로움이 독특한 미학을 이루며 낯선 충격을 던진다. - 오정희(소설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