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동네가 준비한 야심찬 프랑스 고품격 만화, 새롭게 다시 태어나다!
지난 1998년, 문학동네는 프랑스 고품격 만화 『죽음의 행군(원제: Épopées Fantastiques)』을 선보였다. 만화 시장의 전반적인 불황과 더불어 일본 만화의 스타일이 주류를 이루던 상황에서 기획, 출판된 『죽음의 행군』은 유럽의 수준 높은 만화라는 점에서 많은 사람들의 주목을 끌었다.
그리고 2008년, 『죽음의 행군』이 10년 만에 개정판을 낸다. 초판 당시 출판 기술상의 제한으로 이 만화만의 독특하고 섬세한 터치가 원본만큼 제대로 살아나지 못했다고 판단, 프랑스 출판사에서 직접 원본 파일을 받아 기술적인 보완을 하였다. 또한 초판의 번역도 개정판에서는 새롭게 재편집하여 더욱 더 신선한 감각으로 만화의 묘미를 맛볼 수 있도록 하였다.
한국어 번역판에서는 원본에는 없는 작품 해설이 포함되어 있다. 상지대 교수이자 시인인 김정란 선생의 자세한 작품 분석은, 독자들로 하여금 비단 외면적인 만화 기법뿐만 아니라, 작품 전체에 흐르는, 형이상학적 주제들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이렇듯 『죽음의 행군』 2008 개정판은 더욱 업그레이드된 화질과 섬세한 번역으로 독자들로 하여금 원본의 매력을 다시 한 번 느낄 수 있을 것이다.
장 클로드 갈의 대표작 『죽음의 행군』은, “극도로 정교하고 치밀한 묘사 때문에 생전에 모두 다섯 권의 만화 작품집밖에 완성하지 못했다”는 그가 무려 20여 년에 걸쳐 그린 ‘예술작품’이다. “환상적 서사시(Epopées Fantastiques)”라는 원제가 가리키는 것처럼, 『죽음의 행군』은 첫 장을 넘길 때부터 보는 이를 압도하는 삶의 모호함과 인류사의 헛됨이 넘실댄다. 흑백 대비가 눈부신 그림은 마치 중세의 장인들이 제작한 판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준다. 설렁설렁 넘길 수 없는 그림들은 구석구석 읽어내야 할 도상들로 가득하다. “모든 것이 헛되고도 헛되도다”라는 외침처럼, 인류와 문명의 ‘오만과 복수’를 양 축에 놓고 다 허무하다고 말하는 그의 만화는 ‘검은 피’로 긁어놓은 듯한 ‘묵시록’이다.
표지를 여는 순간, 다른 만화에서는 경험해보지 못한 극도로 정교하고 그로테스크한 흑백의 이미지들이 우리 눈에 예리하게 와 박힌다. 일반적인 만화 크기보다 훨씬 큰 넓은 면, 그곳에 철필로 거칠게, 때로는 섬세하게 긁은 듯한 차갑고 남성적인 선, 사막 위 모래 알갱이의 질감까지 느껴지는 세밀한 터치, 대상에 떨어지는 빛을 철저하게 계산한 대담한 조형미, 줌 렌즈로 촬영한 듯한 다이내믹한 화면 분할, 웅장한 스케일, 치밀한 시나리오.
분명히 이것은 ‘예술 작품’이다. 만화를 ‘제9의 예술’이라 부르며 그 가치를 높이 평가하는 프랑스에서도 장 클로드 갈의 그림은 만화 그 이상의 것이라 여겨지고 있다.
언뜻 보면 전형적인 전쟁서사시처럼 보이기도 하는 극도의 남성적인 터치는 장대한 스케일과 함께 너무나도 구체적이고 세밀하여 오히려 더욱 몽환적으로 느껴지는 이미지를 보여준다. 장 피에르 디오네 등의 대본과 함께 그 이미지는 형이상학적 주제를 담고 한 단계 더 높이 승화한다.
우리는 이 만화의 시간적, 공간적 배경에 대해 객관적이고 정확한 정보를 알 수 없다. 단지 전체적인 배경이 끔찍한 태양의 열기와 무시무시한 전갈들이 깔려 있는 사막지대라는 것만 알 수 있을 뿐이다. 인간이 어찌하여 <오만> 을 저지르게 되었는가. 바르바르(Barbare)라는, 인간을 지칭하는 중성적인 단어가 어떻게 하여 ‘야만인’ 을 뜻하는 부정적인 단어로 격하되었는가. 뒤틀리고 어긋난 모든 존재와 세계를 바로잡기 위해 나선 이들이 가야 할 영원한 길은 무엇인가. 어찌 보면 굉장히 철학적이고 무거워 보이는 주제들이 이 만화 속에선 마치 화두를 던지듯이 툭 하고 던져진다.
이처럼 이 작품은 일반적인 만화가 가지는 스토리와 그림 체계를 완전히 전복하고, 마치 에칭 작품과도 같은 섬세함과 깊이 있는 내용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 시공간을 초월한 공간, 전쟁과 운명의 대서사시
이 작품은 각각 독립된 여섯 편의 극화로 이루어져 있다. 그중에서 <아른의 복수>가 절반 이상의 길이를 차지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작품이다. 그리고 각각의 극화는 단편의 형태를 취하고 있긴 하지만 서로 유기적으로 얽혀 있다. 작품의 전체 구성은 <대성당의 비밀>, 네 부분으로 나누어진 <정복자의 군대>를 거쳐 파편처럼 주제들을 제시한 뒤, <아른의 복수>에서 모두를 종합하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첫 단편인 <대성당>에서는 신의 영광이 아닌 자신의 영광을 위해 대성당을 만들려는 대주교가 나온다. 다른 성을 침입하여 노예를 만들고 그들을 부려 거대한 대성당을 짓는 대주교의 극도로 이기적인 모습은 인간의 오만 - 다다를 수 없는 신의 세계와 자연의 법칙을 지배하려 한 - 의 결과가 어떤 것인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마지막엔 거대한 대성당이 한순간에 무너지며 인간의 욕망과 하찮은 역사는 모두 무화(無化)되고 만다. 여기서 우리는 이 작품 전반에 흐르는 <오만>과 그 대가로서의, 또한 재조정으로서의 <복수>, 그리고 존재에 대한 <허무> 의 코드를 직감할 수 있다. 작가는 이 작품 처음 부분에 <대성당의 비밀>을 배치함으로써 짧은 단편이지만 이 소설이 가지고 있는 엄청난 스케일과 주제를 느끼게 한다.
상대적으로 줄거리를 파악하기 쉬운 1부에 비해 2부 <정복자의 군대> 는 모두 똑같은 지문으로 시작되어 우물우물 끝나버린다. 거창한 시작과 썰렁한 결말. 그러나 그것은 서사적 위대함을 슬그머니 뭉개는, 노련미 있는 이야기꾼이 관객에게 던진 엉뚱한 질문과도 같다.
마지막 3부는 전편의 파편적인 이야기들이 종합되어 하나의 커다란 이야기를 이루는 부분이다. 가장 중요한 테마는 복수를 위한 전쟁이지만, 그것은 정치적인 의미가 아니라 <재통합>의 의미로서의 전쟁이다. 완전한 복수와 통합을 이루기 위한 아른의 도전과 그의 신성성, 그 주변의 이야기들은 인간이 그동안 이루어온 문명들의 축소판을 보는 듯한 다이내믹함과 숭고함을 동시에 느낄 수 있을 것이다.
♦ 해외 리뷰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최고의 영웅 환타지. 고전적인 품격을 견지하면서도 완전히 미친 듯한 최고의 그림. 그림을 음미하라. 그러면 이해하게 될 테니. - 크리스티앙 뒤랑트, 『코티디엔 드 파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