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
빈센트 반 고흐가 생전에 남긴 편지는 모두 909통이다.
황야의 외딴 영혼으로 살다 간 37년의 짧은 생애 동안 남긴 편지다.
그 중 대부분은 영혼의 동반자이자 피난처였던 동생 테오에게 보낸 것이다.
빈센트와 테오는 평생 편지를 통해 끊임없이 교감하고 대화를 나눴다.
그들 사이에 오간 것은, 말 그대로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였다.
황야의 외딴 영혼이 보내온 편지
고흐의 편지는 대부분 뜨거운 태양 아래에서 또는 태풍 속에서 그림을 그린 뒤, 집에 돌아와 녹초가 된 상태에서 밤늦게까지 쓴 것이다. 길고 길게 끝없이 흘러가는 내면의 독백은 하나하나가 촘촘하게 잘 짜인 문학작품이나 마찬가지이다. 편지만 보면 고흐는 위대한 화가이기 이전에 뛰어난 문필가로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사후 100년이 지나도 고흐의 편지가 여전히 현재진행형으로 다가오고, 꾸준히 읽히는 것은 그의 그림이 사랑받는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한 인간이 치열하게 살아낸 삶과 감정이 더할 나위 없이 솔직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죽을 때까지 벗어나지 못한 현실의 고난과 인정받지 못하는 고뇌 속에서 그는 매일매일 자신을 추스르고 돌아보면서 글을 썼다. 테오와 친구들, 가족들과 나눈 편지를 보면 그가 얼마나 자기 삶에 최선을 다하기 위해 애썼는지 알 수 있다. 흔히 고흐 하면 떠올리듯 그는 스스로를 파괴적인 열정에만 가두어둔 사람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는 지극히 성실할 뿐만 아니라 노력한 만큼 인정받고 싶다는 건전한 집념, 그리고 자신만의 그림을 그리겠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고 있었다. 그런 삶의 태도가 고흐의 편지에 오롯이 기록되어 있다.
가장 정직하고 순수한 탐구의 기록
고흐는 “예술가란 무엇인가를 이미 완벽하게 발견했다고 말하지 않고, 언제나 그것을 탐구하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는 평생을 두고 끝없이, 치열하게, 철저히 탐구했다. 예술만이 아니라 인생도 끊임없이 탐구했다. 그것을 그림과 편지로 남겼다. 고흐만큼 예술과 삶이 하나로 이어지는 경우는 드물다. 그의 인생을 모르고는 그의 예술을 알 수 없다. 그의 인생이나 예술에 대한 모든 이야기는 그가 남긴 방대한 편지에서 나온다. 그의 편지는 그의 인생과 예술의 무한하고도 유일한 광맥이다.
고흐가 테오에게 보낸 편지 중 하나에 이런 말이 남아 있다. “아름다운 것에 가능한 한 많이 감탄하렴. 사람들은 아름다운 것에 충분히 감탄하지 못하고 있어.” 건강하지 못한 몸과 마음, 가난에 시달리면서도 그는 이처럼 진실과 정직과 아름다움을 좇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또한 삶을 탐구하고자 수많은 책을 읽고, 글을 쓰고, 그림을 그렸다. 스스로 부족하다고 여겼기에 다른 화가들의 그림을 관찰하고, 분석하며, 열심히 공부도 했다. 무엇보다 그는 두 발로 직접 걸으며 세상을 보았다. 세상을 걸으며 아름다운 풍경에 감동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보며 슬퍼했다. 그래서 그의 그림과 글에는 권위 의식도, 스테레오 타입도, 어떤 유파의 냄새도 없다. 오로지 순수하다.
고흐는 그림 그리는 일을 언제나 ‘일한다, 작업한다, 노동한다’고 표현했다. 이는 그림을 바라보는 고흐만의 태도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그가 노동자나 농민과 다르지 않게 살았음을 뜻한다. 인간으로서 지극히 당연한 생존에의 본능, 표현에의 본능을 그림에 쏟아 부으며 위대한 유산을 남기고 간 고흐, 그 진짜 모습을 알고 싶다면 편지를 반드시 함께 읽어야 할 것이다.
편지로 만나는 고흐의 진짜 모습
화가의 길을 모색하며
“산책을 자주 하고 자연을 사랑하도록 하렴. 그것이 예술을 가장 잘 이해할 수 있는 참된 길이란다. 화가는 자연을 이해하고 사랑하며 자연을 보는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준단다.”(편지 17, 수신인: 테오, 본문 56-57쪽)
“정말 흥미 있는 탐험을 했어. 그러니까 6시간이나 탄갱 속에 들어가 있었던 거야. 바르카즈라고 하는 이 부근에서 가장 오래되고 위험한 탄갱이지. (중략) 노동자 대부분은 너무나 마른 데다 열병을 앓아 창백해. (중략) 탄갱 주변은 완전히 검은색으로 변한 고목이 몇 그루 보이는 초라한 광부들의 집, 검은 가지로 만든 울타리, 퇴비더미, 횟가루 산, 석탄 찌꺼기 산뿐이야.”(편지 150, 1879년 4월, 수신인: 테오, 본문 97-98쪽)
“이곳 사람들은 완전히 문맹에 무학이지만 (중략) 재주가 많고 정말 엄청나게 열심히 일을 해. 기질은 상당히 신경질적인데 유약하기보다 민감한 편이지. 그들은 자신들을 지배하는 인간들에 대해서는 뿌리 깊은 증오와 불신을 품고 있어. 갱부들과 사귀려면 그들의 심정을 알고, 그 기분을 나누어야 해. 따라서 교만하거나 고압적인 태도는 금물이야. 그렇지 않으면 그들과 친해질 수도, 신뢰를 얻을 수도 없어.”(편지 150, 1879년 4월, 수신인: 테오, 본문 99-100쪽)
“싫든 좋든 나는 가족 가운데 다분히 비상식적이고 냄새나는 존재, 여하튼 신용할 수 없는 인간이 되었구나. (중략) 무엇보다 내가 어딘가로 가버려 적당한 거리를 두고,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지내는 것이 바람직하며, 해결책이자 최선의 도리라고 생각하게 되었어.” (편지 154, 1880년 7월, 수신인: 테오, 본문 108쪽)
“내 고민이라야 단순해서 도대체 내가 어떤 도움이 될 수 있는가, 나는 소위 유용한 인간이 될 수 있는가, 어떻게 하면 그 문제를 더 잘 알고 깊이 탐구할 수 있는가 하는 거야. 그런 물음이 나를 끝없이 괴롭혀. 그리고 가난에 갇혀 있고, 이런저런 일에서 거부당하며, 필요한 것은 모두 손에 닿지 않는 곳에 있다고 느껴져. 그러니 우울해질 수밖에 없고, 우정과 숭고함 그리고 순수한 사랑이 있어야 할 곳에서 공허함을 느낄 수밖에 없어. 운명은 애정조차 저지하는 힘을 가진 것 같고, 혐오의 파도가 내면에서 밀려오는 듯한 느낌이지. 그래서 말하지, ‘신이여 언제까지 이래야 하나요!’”
(편지 154, 1880년 7월, 수신인: 테오, 본문 115쪽)
화가의 길을 걸으며
“바르그의 『목판화 연습』을 열심히 공부하면서 그리고 또 그려 인물 소묘 관찰이 꽤나 좋아졌어. 나는 길이를 재는 법, 보는 방법, 윤곽선을 발견하는 방법을 알았고 고맙게도 이전에는 거의 불가능하게 생각되었던 것들이 이제는 점차 가능하게 되었어. (중략) 나는 반드시 땅을 파는 사람, 씨 뿌리는 사람, 경작하는 남녀를 쉬지 않고 그려야 해. 농촌생활에 속하는 모든 것을 면밀하게 그려야지. 이제는 더 이상 자연을 앞에 두고 무력하지는 않아.”(편지 171, 1881년 9월, 수신인: 테오, 본문 137쪽)
“이제 나는 화상이나 화가들을 쫓아다지니 않기로 했어. 그들이 누구라도 말이야. 내가 쫓아다녀야 할 사람은 모델뿐이야. 모델 없이 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적어도 나는 그래. 테오, 터널이 끝나는 곳에 희미한 빛이라도 보인다면 얼마나 기쁘겠니? 요즘은 그 빛이 조금씩 보이는 것 같아. 인간을 소묘하는 것, 생명이 있는 존재를 소묘하는 것은 즐거운 일이야. 정말 어렵지만 멋진 일이지.”(편지 207, 1882년 3월 3일, 수신인: 테오, 본문 203쪽)
“예술은 질투가 심해. 언짢은 기분에 밀려 두 번째 자리를 차지하기를 좋아하지 않아. 따라서 예술의 비위를 맞춰야 해. 조만간 네게 좀더 만족할 만한 그림을 보내고 싶구나.
나 같은 사람은 정말 아파서는 안 돼. 내가 예술을 어떻게 보는지 완벽하게 보여주고 싶어. 사물의 핵심에 도달하려면 오랫동안 열심히 일해야 해. 나의 목표를 달성한다 해도 원하는 것을 모두 가질 수는 없겠지만, 내 눈이 너무 높다고 생각하지는 않아.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거니까.”(편지 250, 1882년 7월 21일, 수신인: 테오, 본문 234쪽)
“아버지와 어머니가 나에 대해 본능적으로(이성적 판단이 아니라) 어떻게 생각하는지를 나는 느끼고 있어. 나를 집에 들이는 것을 덩치 크고 털 많은 개를 집에 들이는 것처럼 꺼리시지. 젖은 발로 드나들 게 분명한 그 개는 너무 더러워 모두에게 방해가 될 뿐 아니라, 짖는 소리도 시끄럽지. 요컨대 더러운 짐승이야. 그래, 좋아. 하지만 그 개에게는 인간의 역사가 아로새겨져 있어. 한 마리 개라고 해도 인간의 영혼을 가지고 있어. 게다가 보통 개가 갖지 못한 예민함도 있어서 사람들이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는지도 느끼지. 나는 자신이 일종의 개라는 것을 인정하기로 했고, 그들의 가치관을 받아들이기로 했어.”(편지 415, 1883년 12월 15일경, 수신인: 테오, 본문 293-294쪽)
“내가 농민화가라고 자처하는 이유는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야. 너도 분명히 알게 되겠지만, 나는 그렇게 불리는 게 편안해. 또 내가 광부들, 토탄을 자르는 인부, 방직공, 농민들의 집에서 난로 옆에 앉아 생각하며-열심히 작업한 시간을 빼고-수많은 저녁을 보낸 것d; 무용한 일이 아니었어. 온종일 농민생활을 관찰하면서 거기에 마음을 완전히 빼앗겨, 다른 것은 거의 생각하지 못하게 되었으니까.”(편지 496, 1885년 4월 13일경, 수신인: 테오, 325쪽)
“나 자신 힘든 일을 너무 많이 겪어서 꽤나 빨리 늙어버렸어. 그래, 주름살, 거친 턱수염, 몇 개의 썩은 이 등등. 그러나 그게 무슨 문제겠니? 나는 그림을 그린다는, 더럽고 힘든 일을 하고 있어. 내가 그런 인간이 아니었다면, 그림 따위 그리지는 않았으리라. 그러나 나는 그런 인간이기 때문에 그 일을 하는 게 너무 좋고, 비록 내 젊음은 잃어버렸지만 젊음과 신선함이 있는 그림을 그릴 가능성이 눈앞에 어른거리고 있어서 행복하구나.”(편지 576, 1887년 여름 또는 가을, 수신인: 빌헬미나[여동생], 본문 412쪽)
예술가란 끝없이 탐구하는 존재
“올해 말에는 돈을 벌어서 거처도, 건강도 조금은 나아지도록 하고 싶어. 그동안 내 일과는 매일의 소묘 그리고 매달 두세 점의 유화를 그리는 거야. 돈이 상당히 들겠지만, 올해는 옷과 속옷과 구두를 완전히 새로이 바꾸고 싶어. 그러면 1년 후의 나는 몰라보게 달라진 사나이가 될 거야. 내 집을 갖고 안정과 건강을 되찾고 싶어.”(편지 605, 1888년 5월 3일경, 수인인: 테오, 본문 454쪽)
“아를의 원경을 그렸다네. 마을은 몇 개의 붉은 지붕과 탑밖에 보이지 않고, 나머지는 먼 배경으로 무화과나무의 초록빛에 가려져 있지. 그 위로 푸른 하늘이 좁은 띠를 이루고 있고. 마을은 무수한 미나리아재비꽃―노랑의 바다―이 흐드러지게 핀 광대한 초원으로 둘러싸였고, 전면에는 그 초원이 보랏빛 붓꽃으로 메워진 도랑으로 나뉘어 있다네. 내가 그림을 그리는 동안 풀이 깎여서 애초에 의도한 대로 완성하지 못하고 습작으로 끝나버렸네. 그러나 얼마나 멋진 소재인가! 보랏빛 붓꽃이 있는 그 노랑의 바다, 아름다운 여인들이 있는 그 멋진 작은 마을! 그 뒤에 길섶을 그린 두 점의 습작은 태풍 속에서 그렸지.”(편지 614, 1888년 5월 20일경, 수인인: 에밀 베르나르[친구], 본문 471쪽)
“모든 예술가, 시인, 음악가, 화가들이 물질적으로 불행하다는 것은 정말 이상한 현상이야. 설령 행복하다고 해도 그렇지. 네가 최근 모파상에 대해 말한 것도 이를 증명하는 거야. 이는 영원한 질문을 다시 제기하게 해. 우리에게 생명의 전부가 보이는 것인가, 아니면 죽을 때까지 그 반밖에 볼 수 없는 것일까? 많은 화가들은-감히 그들에 대해 말한다면-죽어 땅에 묻혀도, 작품을 통해 다음 세대, 그 뒤 여러 세대에 말을 거는 거야. 그게 전부인가, 아니면 올 것이 더 있는가? 아마도 화가의 생애에 죽음이란 최악이 아니리라고 생각해.”(편지 642, 1888년 7월 9일경, 수인인: 테오, 본문 533-534쪽)
“나는 자신의 성공이나 행복에는 관심이 없어. 내 관심사는 인상주의 화가들의 계획을 끌고 나가고, 그들이 집과 빵을 얻도록 하는 거야. (중략) 사람들은 화가를 광인이나 부자로 보고 있어. 우유 한 잔이 1프랑이고, 빵 한 조각이 2프랑이야. 그러나 그림은 팔리지 않아. 따라서 저 네덜란드의 황야에서 공동체생활을 하는 늙은 수도승이나 모라비아 형제단처럼, 우리도 단결해야 해.”(편지 665, 1888년 8월 14일경, 수인인: 테오, 본문 581쪽)
내 친구 빈센트와의 대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편지』는 옮긴이 박홍규가 필생의 작업으로 삼고 있는 ‘빈센트 반 고흐 편지 전집’의 첫 발걸음이며, 앞으로도 그는 고흐에게 변함없는 애정과 관심을 쏟으며 연구를 거듭할 계획이다. 고흐의 삶과 예술세계를 새롭게 해석한 『내 친구 빈센트』, 고흐가 밀레에게 어떤 영향을 받았는지를 다룬 『빈센트가 사랑한 밀레』를 지은 바 있는 그가 빈센트 반 고흐와 가상의 대화를 나눴다.
박홍규: 빈센트, 당신은 한국에서도 가장 사랑받고 주목받는 화가 중 한 사람입니다. 얼마 전에도 당신이 스스로 귀를 자른 것이 아니라 고갱이 펜싱 칼로 자른 것이라는 독일 학자들의 연구가 나와 화제가 됐습니다. 진실은 무엇인가요?
빈센트 반 고흐: 고갱이 좀 거칠긴 했지만 내 귀를 자를 정도는 아니었지요. 암스테르담의 내 미술관 전문가들도 아니라고 했고요. 그런데 한국 사람들이 나를 좋아하는 이유가 뭘까요?
박홍규: 우선 제 얘기를 하자면, 중학교에 들어가면서 당신의 전기를 처음 읽었는데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감동을 받았어요. 그림은 이전에도 봤었지만 전기를 읽은 뒤 당신이란 사람 자체를 좋아하게 됐지요. 그 후 암스테르담은 물론 당신의 그림이 있는 미술관이면 어디든 찾아갔어요. 하루 종일 그림만 보기도 했지요.
빈센트 반 고흐: 생전에 날 상대해준 사람은 동생 테오 외에는 거의 없었는데, 지금은 많은 사람들이 날 좋아해준다니 정말 고맙군요. 나는 평생 사람들을 좋아했고 또 사람들도 날 좋아해주기를 바랐거든요. 돈을 많이 번다거나 출세하고 싶은 생각은 없었어요. 사랑하는 사람들과 이해하고 도우며 살고 싶었을 뿐인데. 동생 테오는 물론 고갱하고도 아를에서 그렇게 살고 싶었어요. 그러나 나는 평생 외롭게, 힘들게 살았어요. 그림을 그리면서 나처럼 불행한 사람들을 위로하고 싶다는 마음이 있었는데, 지금 수많은 사람들이 내 그림을 보고 위로를 받고 좋아해준다니 정말 기뻐요. 사람들이 흔히 말하듯이 나는 광인이 아니에요. 내 전기는 대부분 나를 귀를 자른 미친 화가라는 식으로 묘사해왔는데, 당신은 나를 노동자 화가로 새로이 해석한 평전을 써주기도 했지요.
박홍규: 저는 당신이란 사람의 진짜 모습을 좀더 많은 이들에게 알리고 싶었어요. 보잘것없지만 『내 친구 빈센트』를 읽고 용기를 내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는 사람도 있고, 당신을 삶의 멘토로 삼고 싶다는 편지를 보낸 이도 있어요. 당신처럼 열심히 고민하고 창조하며 살고 싶다는 이야기였지요. 특히 초등학교 2년 정도의 교육을 받은 것이 전부인데, 네덜란드어, 영어, 프랑스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하며 그토록 많은 편지를 남기다니, 정말 보기 드문 일입니다. 그림에 대한 소상한 기록은 물론, 생활인으로서 당신의 체취가 그대로 묻어나는 점이 무척 흥미로워요.
빈센트 반 고흐: 약 20년 간 테오에게 보낸 것을 비롯해 편지를 참 많이 썼어요. 그림과 편지는 제 삶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었지요. 사람에 대한 사랑이 여의치 않아 대신 그 두 가지를 열렬히 사랑한 셈이지요. 나에게 편지란 그림만큼이나 중요한 삶 그 자체였어요.
박홍규: 당신의 편지는 이미 위대한 문학작품으로 평가되고 있어요. 매일의 생활과 생각과 느낌을 진솔하게 기록한 당신의 편지는 사실 그 어떤 문학작품보다 아름답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