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함의 원형 같은 것을 그리고 싶었다.
인간의 감정을 광물이라 할 때 그 본질 같은 것 말이다.
가끔 잠들기 전에, 내가 만일 범죄를 저지른다면 무엇 때문일까 멍하니 생각한다.
내 경우 아마도 돈 때문은 아닐 것이고 증오 때문도 아닐 것이다.
그 정도는 억제할 수 있다. 그렇지만 너무 쓸쓸해서 못 견디겠으면 어떨까.
자기도 모르게 일을 저질러버리게 되지 않을까?
요즘 일어나는 사건을 보다가 그 배경에 쓸쓸함이 비칠 때면 왠지 공감이 간다.”
_ 작가 인터뷰에서
엇나가는 사랑, 미끄러지는 젊음,
요시다 슈이치가 그려내는 우리 세대의 새로운 감수성
가슴에 생채기가 난 외로운 청춘들의 따끔거리는 사랑 이야기
끊임없이 경계를 확장해나가며 발전하고 있는 작가가 있다. 『파크 라이프』로 순수문학의 권위 있는 등용문인 ‘아쿠타가와 상’을, 『퍼레이드』로 대중문학의 최고상인 ‘야마모토슈고로 상’을, 그리고 최근에는 범죄물 『악인』으로 ‘오사라기지로 상’과 ‘마이니치 출판대상’을 수상한 요시다 슈이치가 그 주인공이다. ‘동시대의 감수성을 가장 생생히 녹여내는 일본 팝문학의 기수’라는 평단의 호평과 더불어, 발표하는 작품마다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베스트셀러를 기록하며 독자들에게 사랑받고 있다. 그의 가장 큰 동력은 다름 아닌 평범한 일상에서 드라마를 발견하는 ‘섬세함’일 텐데, 이번에 새 옷을 갈아입고 선보이는 『열대어』에서도 그 진가가 유감없이 발휘된다.
『열대어』는 요시다 슈이치가 서른 살 즈음에 쓴 아쿠타가와 상 후보작 「열대어」와 「돌풍」, 그리고 「그린피스」를 한데 묶은 소설집이다. 세 편 모두 제멋대로인 청춘들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데, 작가는 섬세하고, 미묘하고, 부서지기 쉽고, 그래서 어딘가 위험한, 그런 보통의 청춘들의 서늘한 사랑이야기를 담담히 풀어놓는다. 사춘기를 지난 지도 꽤나 오래인 서른 남짓일 듯한 주인공들은 막무가내이거나(「열대어」) 파렴치하거나(「돌풍」) 건방지다(「그린피스」). 그러나 그들을 지켜보고 있노라면 어느 순간 그들에게 이끌리게 됨을 느낀다. 상식과 사려를 넘어 마음을 진동하고 견인하는 힘, 이것이 요시다 슈이치 문학의 힘이라 하겠다.
표제작 「열대어」의 주인공 ‘다이스케’는 건축현장에서 일하는 목수다. 그는 술집 출신의 애인 ‘마미’와 그녀의 딸 ‘고무기’, 그리고 한때 형제였던 백수 청년 ‘미쓰오’와 함께 초로의 게이인 대학교수 ‘도키’ 선생에게 턱없이 싼 값에 빌린 맨션에서 살고 있다. 한없이 낙천적인 다이스케는 주변의 모든 이들에게 맹목적으로 정을 베풀지만, 그럴수록 그들과의 사이에는 틈이 생긴다.
“내 어디가 둔감해? 그저 친절하게 해줬을 뿐 아니야? 남한테 친절하게 해서 뭐가 잘못이야?”
“분명히 말해두는데, 사람이란 다이스케가 생각하고 있는 것만큼 단순하지 않다고. 친절하게 하면 할수록 옴짝달싹 못 하게 되는 사람도 있는 거라고. 게다가 만일 그 친절하게 해주는 사람이 쓸쓸해 보이는 사람이라면…” _「열대어」에서
순진한 오만으로 무장한 다이스케는 타인이 항상 자신의 바람대로 움직일 것이라고 확신한다. ‘진인사대천명’이라는 옛말이 무색하게 애인은 청혼을 거절하고, 미쓰오는 돈을 훔쳐 돌연 가출해버리고, 도키 선생은 여행가자는 모처럼의 제안에 시큰둥한 반응을 보인다.
「그린피스」의 주인공 ‘나’ 와 애인 ‘지사토’의 관계도 다르지 않다. 그들의 사랑은 끊임없이 빗겨간다. 요시다 슈이치 문학의 오랜 주제인 남-녀 간의 관계, 사람과 사람 사이의 ‘소통’의 문제는 여기서 좀더 직접적으로 드러난다. 「돌풍」에서도 마찬가지다.
“저 두 사람은 정말 조용한 커플이지.”
“네가 너무 말이 많은 거야! 신인 개그맨처럼 시시껄렁한 얘기를 재잘재잘.”
“그렇지만, 침묵이 이어지면 목이 졸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난 네가 얘기하기 시작하면 그런 느낌이 드는데.”
“……”
대개 지사토와의 말다툼은, 손톱깎이를 찾고 있었는데 면봉이 나와서 그대로 귀를 후비기 시작한 것 같은 느낌으로 끝난다. _「그린피스」에서
“나는 말이죠, 누가 기다려주는 게 질색이에요. 애인과 만나기로 했는데 일 때문에 늦어질 때가 있지 않습니까? 삼십 분쯤 지나버려서 이제는 없겠지 생각하고 가보면 거기에 그냥 있는 거예요. 그 모습을 보는 순간 뭐랄까, 소름이 끼친다니까요. 원래 같으면 감격해야 할 텐데 아무리 좋아하는 여자라도 소름이 끼쳐버리거든요.” _「돌풍」에서
물론 소통의 문제는 주인공들의 미숙함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린피스」의 ‘소스케’는 그야말로 ‘막장’이다. 친구의 여자친구를 유혹하고, 장기입원중인 할아버지의 병실에는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애인에게 통조림을 던져버린다. 「돌풍」의 ‘닛타’는 장난삼아 남편이 있는 민박집 안주인을 유혹해 돌연 드라이브를 청하고 멀리까지 가서는 그냥 여자를 그곳에 내팽개친다. 그렇지만 불한당 같기만 한 이들 역시 노력하지 않는 것은 아니다. ‘소스케’는 친구와 바람을 피운 애인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용서’에 대해 고민한다. 뻔뻔한 ‘닛타’ 역시 아주 멀리 일탈하지는 못한다.
나는 테이블 위에 놓인 빈 캔을 들고, ‘용서하지 않는다’라고 크게 써보았다. 한참 그 빈 캔을 보고 있었다. 그것이 정말 정직한 내 마음인지 어떤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나는 갑자기 혼란스러워졌다. 용서하지 않겠다는 결론을 낸 것까지는 괜찮지만, 사람을 용서하지 않으려면 도대체 어떻게 하면 되는 것일까? 그 방법이 아무리 생각해도 떠오르지 않았다. 남을 용서하는 일이라면 지금까지 몇 번 해본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남을 용서하지 않겠다고 결정하자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_「그린피스」에서
도망친다고 해서 어떻게 되지는 않는다. 일단 도망치면 그뒤는 계속 도망치게 될 뿐이다. 물론 도망치고 또 도망치고 계속 도망칠 수 있는 녀석도 있다. 그러나 어딘가에서 문득 멈춰 서서 그 자리에 주저앉아버릴 자기 모습이 눈에 떠오른다. _「돌풍」에서
결국 다이스케, 소스케, 닛타 모두 평범한 청춘이다. 그들은 나름대로 크고 작은 문제점들을 안고 살아간다. 그들 모두 욕망에 너무나 충실한 나머지 때때로 야만적이기도 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야만의 끝에 선 그들의 모습은 지극히 인간적이다. 삶이란 본래 문제투성이요, 인간이란 본래 모순적 존재이기에. 요컨대 요시다 슈이치의 작품 속 세상은 문제를 포함한 정상상태이다. 이런 맥락에서 『열대어』의 시간과 공간, 등장인물들은 리얼리티를 획득한다. 시대의 진실을 담는 것이 좋은 소설의 한 요건이라고 한다면, 『열대어』는 ‘지금-여기’라는 당대성을 오롯이 담은 대표적인 작품이라 하겠다.
사람과 사람 사이의 미묘한 공백, 그 틈에서 새어나오는 알 수 없는 아름다움
『열대어』를 빛나게 하는 결정적 요소는 요시다 슈이치가 빚어내는 컬러풀한 이미지들이다. 짙은 초록빛 수초 사이를 헤엄치는 열대어, 나무 전체를 뒤덮은 검은 까마귀 떼, 수영장 바닥에서 반짝거리는 색색의 라이터들, 밤사이 창 밖에 내려앉은 새하얀 눈과 은빛 도쿄와 같은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는 광기를 내재한 개인과 개인이 만났을 때의 서글픈 공백을 선명하고 아름다운 영상으로 메워나가면서 그 공허함을 달래게 한다. 이 아름다움은 인간관계에 대한 냉소를 넘어 보편적이고 긍정적인 힘을 작품에 더한다. 그래서 『열대어』는 문득 가슴이 서늘해지는 이야기이기도 하지만 결코 무겁거나 불쾌하지 않다. 탄탄한 소설적 구성과 평범해 보이지만 위트가 넘치는 문장, 비판적이고도 진지한 시선이 낳은 날카로운 통찰력은 요시다 슈이치의 힘이다.
이 책에 쏟아진 찬사
♛ 현대가 지니는 특유의 빈 공간과 블랙유머, 그리고 실제로 있는지 없는지조차 분명치 않은 희망 같은 것을 획득하는 데 성공했다. - 무라카미 류
♛ 상식이나 사려를 넘어 마음을 진동시키고 견인하는 힘, 그 섬세한 회로를 작가는 그려내고 있다. 어쩌면 그것은 이 작가에 의해 처음으로 말로 옮겨진 감각일지도 모른다. - 아사히 신문
♛ 컬러풀하고 영상적인 작품. 화려한 퍼포먼스는 없지만, 세심하게 고른 언어들이 팔팔한 물고기처럼 종이 위를 날뛴다. 처음 만나는 신선한 비유가 여기저기에서 빛나고, 읽은 후에는 선명한 잔상이 남는다. - 에스콰이어
♛ 요시다 슈이치는 섬세하고 미묘하고 부서지기 쉬운 젊음을 훌륭하게 묘사하고 있다. - 피아
옮긴이 김춘미
이화여자대학교 영어영문학과를 졸업하고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에서 석사학위를,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에서 문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도쿄 대학 비교문학연구실 객원교수, 고려대학교 일어일문학과 교수, 한국일본학회 회장, 고려대학교 일본학연구센터 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현재 고려대학교 일본연구센터 일본번역원장으로 재직중이다. 지은 책으로는 『김동인 연구』 등, 옮긴 책으로는 『본격소설』『해변의 카프카』『메이지 문학사』『밤의 거미원숭이』『나의 소소한 일상』『인간 실격』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