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막막한 나날이
그와 내가 지나야 할 어떤 통과의례라면,
이 절망감이
나 혼자 겪어야 하는 감정이 아니라면,
어쩌면 그의 담담한 편지처럼
차분히 견뎌낼 수도 있을 것 같은 기분이었다.
나는 그때야 오박사가 나에게 편지를 보낸 의미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망설이다가 답장을 보내지 않은 것도
잘한 일이란 생각이 들었다.
아마 그 편지의 수신인은 내가 아니었어도,
다른 누구였어도 상관이 없었을 테니까.
_ 본문 중에서
2004년 첫 소설집 『세이렌』을 발표한 이래, 장편소설 『너는 마녀야』(2005) 『본드걸 미미양의 모험』(2007)과 두번째 소설집 『사과의 맛』(2008) 등 다양한 소재와 기발한 상상력으로 버무려진 작품들을 부지런히 선보이며 이 시대의 젊은 이야기꾼으로 거듭난 소설가 오현종이 이번에는 성장소설 『외국어를 공부하는 시간』으로 독자들과 만난다.
청소년 문학문화잡지 『풋,』 2008년 여름호부터 총 4회에 걸쳐 연재되었던 『외국어를 공부하는 시간』은 외국어고등학교에서 학창시절을 보내는 지극히 평범한 주인공의 시선으로 그려내는, 지나고 보면 아름다웠다고 회상하지만 정작 그 시기를 직접 겪어내는 이들은 비틀비틀 우왕좌왕 힘겹게 통과해가는 ‘열병 같은’ 한 시절에 관한 이야기이다.
그 어떤 말로도 전할 수 없었던,
하지만 당신에게 꼭 들려주고 싶은 열일곱 살 나의 이야기
이제는 서른이 훌쩍 넘어버린 소설가 ‘나’(은효)는 미국 버지니아 공대에서 한국인이 총기난사 사건을 일으켰다는 뉴스를 접하며 지금 버지니아 공대에서 공부를 하고 있다는 고등학교 동창 ‘연희’와, 미국 유학중인 남자친구 ‘H’를 떠올린다. H를 알아왔던 여러 해 동안, 그가 유학을 위해 외국어를 공부하던 그 시간 동안 내가 한 번도 하지 않았던, 내가 외국어를 공부하던 그 시절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문득 가슴속을 스친다.
내가 외국어고등학교에 진학하기로 마음먹었던 이유는 단 한 가지. ‘칠공주파’로 유명한 서울의 변두리 여자중학교에 수석으로 입학을 하면서부터 시작된 따돌림이 중학교 삼 년 내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단지 나를 미워하는 아이들로부터 도망치기 위해, 같은 재단 같은 이름의 여자고등학교에 끌려가지 않기 위해 외국어고등학교에 지원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선택한 외국어고등학교에서도 나는 여전히 사랑받는 여학생이 되진 못했다. 비쩍 마른 체형에 금색 잠자리테 안경, 입속엔 치아교정기, 불쑥불쑥 솟아오르는 여드름이 고민인 여학생이 어떻게 매력적일 수 있겠는가. 게다가 공부로든 집안 배경으로든 난다 긴다 하는 아이들만 모여든 이 학교에서 말이다. 지금까지 지극히 평범하게 살아왔다고 생각했던 나는, 원어민 강사의 쏼라쏼라 외국어 수업도 척척 알아듣고, 입학 전에 이미 고등학교 1, 2학년 과정쯤은 다 마치고 온 똑똑한 아이들 틈에서 이방인이 된 기분으로 학교생활을 시작하는데……
*
어떤 이에게는 아련한 추억일 수도 있고, 또 어떤 이에게는 현재진행형의 일상일지도 모를 그 시간. 흔히 ‘사춘기’라 이름 붙이는, 누구나 열병처럼 앓고 지나가는 십대 후반의 그 시간들은 어쩌면 주인공 ‘은효’가 교정기를 낀 채 더듬더듬 말하는 외국어 같은 것일지도 모르겠다. 입 안의 우툴두툴한 교정기 때문에, 서툰 외국어 실력 때문에 차라리 그냥 입을 꾹 다물어버리고 싶어질 때도 있지만, 그래도 내 마음속 하나 가득 차 있는 그 말들을 다른 이에게 전하고 싶어서, 세상을 향해 한껏 소리치고 싶어서, 끙끙대면서도 기어이 전하고야 마는 그 소중한 한 단어, 한 문장. 그 단어들로, 그 문장들로 우리의 ‘빛나는 청춘’이 완성되는 것은 아닐까.
나는 이다음에 어떤 어른이 되면 좋을까 상상하며 손가락으로 모래 위에 글자를 적었다가 흰 실내화 밑창으로 쓱쓱 지웠다. 운동장 구석 스피커에서 저녁 쉬는 시간이 끝났음을 알리는 벨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올 때였던가. 그 순간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언젠가 만약에 내가 소설가가 된다면 이 시절에 대한 얘기를 꼭 써야지, 라는. 고등학교에 입학한 뒤로 소설책이라곤 단 한 권도 읽지 못한 여고생 주제에 어째서 그런 공상을 했는지는 알 수 없다. 어쩌면 먼 훗날이 아니라 바로 그때 무언가 간절히 적고 싶었던 건 아닐까. (……) 2009년 오늘, 나는 이미 오래 전에 흘러가버린 시간들을 용기 내어 조심조심 더듬어보고 있다. 어떤 날들은 아주 또렷하게 기억나고, 또 어떤 날들은 빠져나간 젖니처럼 까맣게 잊혀졌다. 모두 다 사실인 것 같기도 하고, 모두 다 거짓인 것 같기도 하다. 분명한 것은 그때 그 소녀의 진심뿐이다. _‘작가의 말’에서
▶ 오현종 | 서울에서 태어나, 외국어고등학교에서 불어를 공부했고, 이화여대에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했다. 지금은 명지대 문예창작학과 박사과정을 밟으며 소설을 읽고 쓰고 있다. 1999년 『문학사상』 신인상을 수상하며 등단했다. 소설집 『세이렌』『사과의 맛』, 장편소설 『너는 마녀야』『본드걸 미미양의 모험』이 있다.
* 초판발행 | 2009년 6월 30일
* 145*210 무선 | 216쪽 | 값 10,000원
* ISBN 978-89-546-0842-8 03810
* 책임편집 | 조연주 최유미(031-955-8865, 35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