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7년 신춘문예 동시부문·시부문 당선으로
동시와 시의 경계를 무너뜨린 ‘김륭’의 첫 번째 동시집!
중년의 한 남자가 있다. 자신의 자리를 지키기 위해 쉴 틈 없이 삶을 살아가야 하는, 오십을 앞둔 남자가 있다. 그는 현 시대의 가장이며 아버지다. 그런 그가 삶처럼 목숨처럼 놓지 않은 게 있다면, 그것은 바로 문학이며 ‘시’였다.
웃고 울고 아파하면서도 쉽사리 꺼내 놓지 못한, 그래서 꼭꼭 감춰 둘 수밖에 없었던 그의 시심은 중년이 되어서야 일순간 터져 나왔다. ‘김륭’은 2007년, 신춘문예에 시와 동시가 한꺼번에 당선되며 세상을 놀라게 했다. 그동안 남몰래 앓고 삭히고 즐겼던 삶의 순간들을 세상 밖으로 내보인 것이다.
몇 십 년 동안 활발하게 활동해 온 동시인이나 시인도 동시와 시의 경계를 무너뜨리고 넘나드는 일은 쉽지 않은 일이다. 하지만 시인은 어린아이와 같은 눈을 가져야 세상을 보다 넓게 꿰뚫어 바라볼 수 있는 것이고, 동시 또한 시의 범주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으로 보았을 때, 김륭은 그 둘을 하나의 뿌리로 여긴 모양이다.
김륭은 「책머리에」에서 관습적인 상상력을 ‘빨강내복’에 비유한다. 동시와 시를 구분 짓는 것 또한 관습적인 행위일 뿐이다. 그는 “시골 할머니가 입고 있던 빨강내복처럼 몸에 착 달라붙어 있는 관습적인 상상력에서 조금이라도 멀리 달아나 보고 싶었”다고 말한다. 동시와 시를 세상에 내보이며, 그리고 첫 동시집을 묶으며 그가 중심에 둔 것은 빨강내복 즉, ‘관습적 상상력’을 무너뜨리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래서 늘어질 대로 늘어졌지만 벗지 못하는 빨강내복을 벗어던지며 동심의 유쾌한 반란을 꿈꾸었을 것이다.
‘빨강내복’을 벗어던진 동심의 유쾌한 반란
김륭의 등단작인 동시 「달려라! 공중전화」와 「배추벌레」는 시적 대상에 접근해 가는 방식이 새롭고, 실험정신과 동화적 상상력이 돋보인다는 평을 받았으며, 시 「구름에 관한 몇 가지 오해」는 엄숙함과 진지함에서 벗어나 경쾌하게 고통을 노래함으로써 우리를 위로해 주고 있다는 호평을 받았다.
당시 문화일보 신춘문예 시부문 심사위원이었던 천양희, 정호승 시인은 “그의 시를 읽다 보면 현실의 크고 작은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될 정도로 마취당한 느낌을 갖게 된다. 그러나 그의 상상력에서 오는 이 위안의 마취력은 실은 현실의 고통에서 나온 것이다.”라고 이야기했다.
김륭의 기발한 시적 상상력과 삶의 내면을 꿰뚫는 깊고 뜨거운 시심은 하루 이틀 만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며, 일시적으로 나타난 것도 아니다. 김륭은 오랜 세월의 습작을 통해 넘치는 상상력과 시심을 갈고 닦으며, 자신의 개인적 아픔과 고통과 외로움을 시라는 매개체에 투영시켜 왔다. 그래서 그의 동시와 시는 더 뜨겁고 아프고 짜릿하다.
“아이와 어른을 가르는 잣대는 나이가 아니라 사랑일지 모르겠”다고 말한 김륭은 “동심이란, 사랑을 믿는 사람과 믿지 못하는 사람 사이, 혹은 달나라에서 방아를 찧고 있는 한 마리 토끼 같은” 것일지 모른다고 생각하는 이다. 동시 쓰기에 앞서, 동심의 근원적인 힘이 어떤 것인지, 그것이 어디에서 비롯되는지를 먼저 헤아리며 스스로를 정화시킬 줄 아는 것이다. 그래서 김륭의 첫 동시집 『프라이팬을 타고 가는 도둑고양이』에는 관습적인 상상력을 벗어던지고, 낯설지만 상상력이 번뜩이는 울퉁불퉁한 동시를 쓰고자 한 신예 시인의 패기가 가득 담겨 있다.
‘밥풀의 상상력’으로 빚은 울퉁불퉁 이야기가 있는 동시
김륭 동시를 읽다 보면 낯선 비유와 상상력 앞에서 잠시 머뭇거릴 수 있다. 우리 동심에 깊이 박혀 있던 낡은 관념들이 새로운 장치에 의해 변화되는 과정을 겪어야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장치들을 하나하나 짚어 가다 보면 우리의 삶이 자연의 이치와 어떻게 조화를 이루며 소통해야 하는지를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다.
밥도 풀이라고 생각할래요
질경이나 패랭이, 원추리 씀바귀 노루귀 같은 / 예쁜 풀이라고 친구들에게 말해 줄래요
주렁주렁 쌀을 매단 벼처럼 착하게 살래요
밥그릇 싸움 같은 어른들의 말은 / 배우지 않을래요
말도 풀이라고 생각할래요
며느리배꼽이나 노루귀 같은 예쁜 말만 키워 / 입 밖으로 내보낼래요
온갖 벌레 울음소리 업어 주는 풀처럼 살래요
어른들이 밥 먹듯이 하는 욕은 / 배우지 않을래요
치매 걸린 외할머니 밥상에 흘린 / 밥알도 콕콕 뱁새처럼 쪼지 않을래요
풀씨처럼 보이겠죠
잔소리 많은 엄마는 잎이 많은 풀이겠죠
저기, 앞집 할머니도 호리낭창 / 예쁜 풀이에요
―「밥풀의 상상력」 전문
김륭이기 때문에 펼칠 수 있는 ‘밥풀의 상상력’이다. 이번 동시집에 해설을 쓴 시인 이안은 이 동시를 두고 “단순한 연상적 배치를 보여 주는 듯하지만, 이 연상이 빚어낸 전체 그림은 시인이 동시로써 아이들에게 무엇을 보여 주고자 하는지를 엿보게 한다. 자유 연상적 언어 놀이 과정을 거치면서 그것이 어떻게 세상의 유약한 존재들을 감싸 안는 사랑으로 완성되는가를 보여 준다.”고 말했다. 이처럼 김륭 동시의 가장 큰 특징은 사랑에서 비롯된, 따듯함이 넘치는 시심의 확장이다.
할머니 집과 학교 사이, 목발 아저씨가 지키고 있는 구멍가게 앞 공중전화를 보면 아빠 생각이 난다 회사에서 물먹고 돈 벌러 간 아빠, 잘나가던 한때는 찾아오는 친구들도 많더니 소식이 뚝 끊겼다 전화 한 통 없어 외로웠을 거다 훌쩍 엄마마저 떠나자 외로웠을 거다 너무 외로워 서울로 갔을 거다
나는 할머니가 준 용돈을 아껴 아빠에게 전화를 걸곤 하는데 오늘은 짝꿍 생일, 선물을 사는 바람에 빈털터리다 서울까지 달려갈 수도 없고 할머니에게 과자 사 먹는다고 조를 수도 없고
나는 공중전화 박스 속에 가만히 웅크리고 앉아 콧구멍을 벌렁거린다 외로운 아빠 품속처럼 독한 담배 냄새 진동하지만 참 따뜻하다 휴대폰에게 물먹은 뒤 밤마다 달을 낳는 공중전화, 나는 반짝 이마가 빛나는 동전 한 닢이다 쌩쌩 찬바람 불고 있을 아빠 호주머니 속에서 둥글게, 둥글게 부풀어 오른다
달려라!
―「달려라! 공중전화」 전문
엄마는 집과 가족을 등지고 아빠는 돈 벌러 떠나고, 할머니랑 둘이 남은 아이의 심리와 일상이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하다. 기존 동시에서 많이 보아 온 소재이지만, 김륭은 ‘공중전화’라는 추억의 산물을 끌어들여 전혀 새로운 분위기로 동시를 풀어나가고 있다. 감성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 시각을 유지하며 슬픈 현실을 희망적으로 밝혀 주는 것이야말로 김륭 동시의 큰 특징이자 강점이다.
‘엄마를 기다리는 아이’라는, 우리 동시에서 전형적으로 쓰여 왔던 소재가 어떤 개성 있는 옷을 입고 다시 태어났는지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604호 코흘리개 새봄이가 엄마를 기다리고 있어요
6층에서 1층으로, 1층에서 다시 6층으로 코를 훌쩍거리며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고 있어요 훌쩍훌쩍
코를 길게 늘어뜨리고 있어요
엘리베이터를 비스킷처럼 감아올린
코가 길을 잡아당기고 있어요
엘리베이터를 오르내리는 사람들 흘깃흘깃 쳐다보지만
엄마가 타고 다니는 빨간 티코를 감아올릴 때까지
새봄이 코는 길을 잡아당길 거예요
집으로 오는 모든 차들이 빵빵
새봄이 콧구멍 속으로
빨려들고 있어요
―「코끼리가 사는 아파트」 전문
김륭 동시집에는 사랑을 바탕으로 실험정신과 패기를 가미해 맛깔나게 버무린 동시들이 주를 이룬다. 동화적 상상력이 돋보이는 이야기동시들, 그리고 이미지를 강조한 생기발랄한 동시들을 만날 수 있다. 김륭 동시만의 ‘숨은그림찾기’가 독자에게 한순간도 지루할 틈을 주지 않는다.
귀를 쫑긋 위성안테나처럼 세우고 / 눈으로 레이저광선을 쏘아요
우리 집 나비는 야옹야옹 / 눈 깜빡할 새 지나간 새 한 마리, 벌레 한 마리
놓치지 않고 귀신처럼 / 찾아내요
바늘에 실 따라가듯 / 소리가 만든 길을 찾아내요
아빠 차에 달려 있는 것보다 성능 좋은 / 내비게이션이 달려 있어요
야옹야옹 우리 집 나비 머릿속에 / 과학이 살아요
―「내비게이션」 전문
김륭 동시는 새롭고, 낯설고, 어렵고, 뜨겁고, 독특하다. 그동안의 동시에서 볼 수 없었던 표현과 상상력으로 두세 번 곱씹어 읽어야 할 때도 있다. 하지만 그의 동시를 읽고 있으면 시인이 전하고자 하는 마음이 읽는 이의 마음속으로 고스란히 스며든다. 앞으로 동시문단에서 또 어떤 실험적 상상력으로 관습과 통념에 맞설지 김륭 동시의 행보가 기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