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처럼 따스하고 연인처럼 설레는, 처음 만나는 그림들
누적 방문자 수 400만의 인기 블로그, 책으로 태어나다
양 갈래로 머리를 땋고 두 손을 가지런히 맞잡은 소녀가 지긋이 바라본다. 마치 ‘처음 뵙습니다’ 하고 인사를 건네듯이. 이 책은 표지 속 소녀처럼 우리에게 말을 거는 그림들로 가득하다. 아무래도 그림의 이야기가 들리지 않는다고? 걱정할 것 없다. 이미 ‘그림 읽어주는 남자’로 정평이 난 블로거 ‘레스까페(Rescaé)’ 선동기의 안내를 받으면 된다.
평범한 회사원, 두 아이의 아버지이자 한 여성의 남편으로 평범한 일상을 꾸려가고 있는 지은이에겐 보통의 회사원과 달리 또 하나의 이름이 있다. 바로 블로그에서 닉네임으로 사용하는 ‘레스까페’가 그것이다. 그는 그림을 찾고 화가의 인생을 추적하고, 그림을 보며 그림 속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인다. 그리고 그림이 전한 이야기, 그림과 나눈 대화를 블로그에 소개한다. 그는 이런 지금 자신의 모습이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고 말한다.
처음 만나는 그림이 주는 행복
몇 년 전 암스테르담으로 떠난 출장에서 시간이 조금 남자 미술관에 들른 지은이는 의외로 자신이 ‘설렁설렁’ 그림을 보고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미술사 책에서 한번이라도 보았던 그림은 그 낯익음에 반가워 한 번 더 들여다보게 되었지만, 그렇지 않은 그림들은 무의식적으로 별로 신경을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익숙하지 않은 이름의 화가도, 그 화가가 그린 낯선 그림도 화가가 살아서 그렸을 때에는 최선을 다해 자신을 쏟아 부어 그린 작품인데…… 그는 그 사소한 일을 계기로 화가들의 이야기나 그림 속 인물들의 이야기를 일부러 찾아보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림을 들여다보면서 이 사람은 왜 이런 표정으로 앉아 있는 걸까, 이 골똘히 사념에 잠긴 여자는 뭘 생각하고 있는 걸까, 저 멀리 보이는 집에는 누가 살까…… 이렇게 그림 속 세상을 스스로의 상상으로 꿈꾸기 시작했다. 그렇게 처음 만나 사귀게 된 그림들은 그에게 특별한 의미가 되었고, 그림 속으로 여행을 떠나는 일에 그만 푹 빠져버리게 되었다.
바슐라르처럼 들려주는, 따뜻한 그림이야기
그의 그림이야기는 화가의 일생을 좇는 데서 시작된다. 그림이 그 창조자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화가의 성장 과정, 교육, 인간관계, 그리고 화가로서 겪었던 고난과 성공을 짚은 후, 지은이는 그림을 보며 화가의 속마음을 짐작해 본다. 그리고 여기서 그치지 않고, 자신의 마음을 그림에 투영한다. 프레더릭 레이턴의 「화가의 신혼」을 보면서 자신에게 사랑이 다른 무엇보다도 중요했던 한때를 떠올리고, 로버트 리드가 그린 「양산을 든 여인」이라는 초상화 속 여인에게 “혹시 우리 어디선가 만난 적이 있지 않냐”며 조심스레 말을 걸었다가는 “예전 그 사람 얼굴에서도 빛이 났다”고 추억한다. 19세기 파리의 풍경을 즐겨 그린 장 베로의 「라마르세예즈」에서 파리 시민들이 한마음으로 「라마르세예즈」를 합창하는 것을 보면서는 “우리도 저렇게 모두가 한자리에서, 어떤 이념의 장벽도, 계층의 골도 없이 얼싸안고 한 목소리로 노래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피력하고, 쥘 바스티앵르파주가 그린 눈먼 거지 소년의 그림을 보고서는 더 나누고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한다. 또 오랫동안 곁에 두고 연주해온 바이올린을 바라보는 늙은 바이올리니스트의 초상화를 보면서는 자신의 주변, “지금까지 같은 길을 함께 걸어온 가족과 친구들 그리고 낡은 가구들과 책들에게 시선”을 보내는 식이다.
사람들은 그가 소개한 그림들과 그의 그림이야기를 보면서 자신의 과거를 추억하기도 하고, 또 주위 사람을 따뜻하게 떠올리게 된다. 우연히 웹서핑을 하다가 그의 팬이 돼버린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한다. 그의 그림이야기에는 무엇보다 ‘따뜻함’이 있다고. 역시 우연한 기회에 선동기의 블로그를 찾게 되었다가 ‘이웃’이 된 소설가 김탁환은 이렇게 말한다. “그가 속삭이면 빛 하나 색 하나 움직임 하나도 모두 생의 비밀을 꽃피운다.”
블로그, 책이 되다
이 책은 2000년대 들어 새로운 출판 트렌드로 떠오른 블룩(blog+book) 현상의 가운데 있다. 이미 지은이의 그림이야기는 네이버 메인페이지 ‘감성지수 36.5’에 수십 차례 소개되면서 많은 사람에게 사랑을 받고 있다. 그의 블로그 ‘레스까페’의 누적 방문자 수는 400만 명을 넘었고, 스크랩된 횟수도 6만 번이 넘을 정도이다. 사실 그림을 주제로 한 블로그는 꽤 많다. 그런데 그의 블로그가 그중에서도 특히 도드라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그가 소개하는 그림들이 아름답고 매혹적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의 많은 ‘이웃’들이 이구동성으로 말하듯, 그가 들려주는 그림이야기가 풍기는 따뜻한 분위기, 그 다정다감함에서 찾아야 할 것 같다.
지은이가 2008년부터 개인 블로그(blog.naver.com/dkseon00)에 올린 100여 개의 포스트 중 30명의 화가이야기를 엄선하여 이제 오프라인의 독자들과도 공유할 수 있게 됐다. 인터넷 문화에 익숙하지 않은 독자들, 또 아직 레스까페의 블로그를 접해보지 못한 독자들 또한 ‘처음 만나는 화가들’의 그림과 첫 만남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또한 이미 블로그를 통해 이 책에 소개된 화가들을 만났던 독자들을 위해 블로그에 올렸던 글들을 새로 정리하고 풍부한 이야기를 덧붙인 것은 물론, 짤막하게 붙여두었던 그림 설명에 특히 공을 들여 그림 한 점 한 점마다 ‘레스까페’ 특유의 따뜻한 해설을 만끽할 수 있도록 했다. 아래로, 아래로 이어지는 길고 긴 스크롤 대신 책장을 넘기면서 편하게 글을 읽을 수 있게 되었고, 무엇보다 그림을 ‘소장’할 수 있게 된 점도 책으로서만 향유할 수 있는 장점이다.
화가의 이야기와 함께 모두 150점의 그림을 소개하는 책인 만큼 인쇄의 질을 높였고, 속칭 ‘떡제본’이라고 하는 풀로 붙이는 방식(무선제본)이 아니라 실로 책을 묶어(사철) 완전히 펼쳐도 책장이 떨어져 나가지 않도록 했다. 이처럼 그림 감상에 최대한 방해가 되지 않도록 신경 쓴 점도 이 책의 특장이다.
책은 ‘사랑’.‘일상’.‘휴식’을 주제로 한 세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다. 화가의 성향에 따라 30명의 화가를 세 주제로 나누어 배치했고, 화가의 일생을 풀어쓴 글 뒤에 지은이가 가장 좋아하는 그림 5점씩을 골라 싣고 그 그림에 관한 선동기 특유의 다정다감한 이야기들을 붙여두었다. 소개된 화가들은 대개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에 활동했던 화가들로, 미술사 책에서 만나기는 그리 쉽지 않은 예술가들이다. 미술사라는 학문의 틀에서 보면 주변으로 밀려난 화가들이지만, 책에 수록된 그림을 보다 보면 세상에 이렇게나 재능 있는 화가들이 많았구나, 내가 모르던 아름다운 그림이 이토록 많았구나 하고 새삼 깨닫게 된다. 이 책은 모두 150점의, ‘처음 만나는 그림들’과 인사하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할 것이다.
1장 ‘사랑이 스며든 그림’에는 연인, 가족, 친구, 아이들에 대한 사랑을 담은 그림들을 주로 모아두었다. 최초로 기사 작위를 받은 영국의 화가 프레더릭 레이턴, 정치적 이유로 프랑스를 떠나 이름도 영국식으로 바꿨던 제임스 티소, 인상파의 여성화가 메리 캐사트 등 비교적 알려진 화가들을 비롯해 아름다운 여인의 그림으로 유명한 미국의 인상파 화가 프레더릭 칼 프리스크, 전원생활의 행복을 그린 여성화가 헬렌 앨링엄 등의 작품세계를 만날 수 있다.
2장 ‘일상이 담긴 그림’에는 일터와 거리에서 마주칠 수 있는 풍경들을 주제로 한 그림들이 들어 있다. 파리의 거리 풍경을 생생하게 담아낸 장 베로, 가난한 사람들의 생활과 애환을 사실적으로 그려낸 월터 랭글리, 미국 서부시대의 개척자들의 삶을 유머러스하게 담아낸 조지 칼렙 빙엄 등의 그림을 만날 수 있다.
3장 ‘휴식이 깃든 그림’에는 번잡한 일상에서 벗어나 마음을 놓을 수 있는 풍경들이 주로 모여 있다. 19세기 프랑스 부르주아 계층의 여유로운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는 프레데리크 바지유의 그림, 바닷가에서 휴일을 보내는 뉴욕 사람들의 여가 시간을 즐겨 그린 에드워드 포타스트, 러시아의 풍경을 서정적으로 담아낸 화가들인 아르힙 쿠인지.이사크 레비탄.이반 시시킨, 이와 대조적으로 웅장한 미국의 자연을 그려낸 앨버트 비어슈타트.프레더릭 처치 등의 그림이 수록돼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