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귀비 재배라는 이색적인 소재에 맞는 박진감 있는 문장, 사물에 대한 정확한 묘사가 돋보이는 장편소설 『정크노트』에서 작가는, 한 소년이 우연히 양귀비를 키우는 일에 끼어들게 되면서 생기는 일련의 사건들을 생동감 있게 포착하여 마약과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소년의 성장기로 경쾌하고 흥미롭게 그려낸다.
아편을 키우는 소년이 기록한 황홀하고 병적인 성장기
평범한 농촌마을에 이사온 수상한 남자 하나. 덕택에 할머니의 고추농사를 도우며 살고 있는 중학생 호준이에게 비밀이 생겼다. 언덕집에서 살게 된 그 아저씨의 밭에서 양귀비 재배를 돕게 된 것이다. 학교와 아버지가 입원한 병원을 오가며 무기력하게 생활하던 것도 이젠 끝이다. 양귀비라니. 그것도 관상용인 개양귀비가 아닌, 환각작용을 가진 진짜 양귀비다. 수줍은 꽃잎을 서서히 펼치며 유혹하는 양귀비꽃은 이제 호준이의 전부가 되었다.
지금은 아편중독자가 됐지만 예전엔 실력 있는 의사였다던 아저씨는 록음악이나 들으며 집에서 뒹굴거리기만 한다. 호준이가 그런 아저씨와 티격태격하는 동안 비닐하우스 안의 양귀비꽃은 점점 자라가고, 아저씨도 그런 호준이에게 ‘쿤사’라는 마약왕의 이름을 붙여주며 점차 마음을 연다. 하지만 그만큼 환각에 빠져 힘들어하는 날들도 늘어간다. 죽은 딸의 환상을 보기도 하고, 헛소리도 하면서 점차 수렁으로 떨어지는 아저씨. 어느새 아저씨의 노트 못지않게 호준이의 ‘정크노트’에도 아편 재배에 관한 전문지식들이 쌓여간다.
5월 27일
잡초 제거, 골마다 호스를 대고 물을 지나게 해줌.
쉰세 개의 씨방이 맺히다. 누렇게 썩은 놈을 제거할까 말까……
열두 개는 팥알 크기, 세 개는 달걀 모양, 나머지는 그럭저럭.
크기 일 미터가 넘는 것 일곱 개. 수액 채취는 아직 멀었다. _본문 중에서
“꽃밭은 내 거다”
소년에게 있어 양귀비란 단순한 탐닉의 대상이 아니다. 그것은 매력적인 만큼 위험한 세상에 대한 은유이며, 반드시 알아차려야 하는 진리의 실체다. 어른-중독자를 넘어서 자기 나름의 세계를 만들어가야 하는 소년의 행로는 소설 속에서 묘한 연민과 우수를 동반하되 우울하거나 칙칙하지 않게 묘사되어 있다. 오히려 유머러스하고 쿨하기까지 한 묘사는 이 세계를 단순히 퇴폐적으로만 그리는 무모함을 범하지 않는다. 병적인 만큼 황홀한, 많이 아프지만 그래서 더 살 만한 세상이 두렵고도 아름다운 명지현의 소설세계가 아닐까.
내가 없으면 아편도 없다, 내가 이만큼 힘을 보탰으니 나도 그것을 맛보게 해달라는 뜻으로 구린 냄새가 옷에 배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죽을힘을 다해 공을 들였다.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 혼자서 모든 것을 해냈다는 사실이 나 자신을 흐뭇하게 만들어 주었다. 그래서 내 정크노트의 세 번째 페이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꽃밭은 내 거다.”_본문 중에서
제아무리 불법이라 해도 식물은 거리낌 없이 퍼진다. 그로 인해 인간이 고통을 받든 말든. 씨앗을 퍼뜨리고 새순을 피워 올리는 건 식물의 본성이고 전부이다. 우리도 그렇게 살았으면 좋겠다. 거리낌 없이 눈치 보지 말고. _‘작가의 말’ 중에서
▶ 명지현 | 경기도 파주 심학산 인근에서 남편과 두 자녀, 그리고 백구 한 마리와 살고 있다. 광고회사 카피라이터, 다큐멘터리 방송작가를 거쳐 2006년 『현대문학』에 「더티 와이프」를 발표하며 등단했다.
* 초판발행 | 2009년 8월 26일
* 145*210 | 272쪽 | 값 10,000원
* ISBN 978-89-546-0869-5 03810
* 책임편집 | 조연주 이경록(031-955-8865, 3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