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년대 『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한국 시단에 파격과 새바람을 불러온 최영미 시인이 『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에 이어 새 산문집을 펴냈다. 전작에서 길 위에서 만난 이방인들과 유랑의 기록을 열정적으로 풀어낸 최영미 시인은 이 책에서 여행가방을 풀고 생활 속에서 느끼고 생각하고 부딪치는 온갖 일상과 상념들을 낱낱이 풀어낸다. 여행 후 누구나 돌아와야 하는, 혹은 돌아올 수밖에 없는 지긋지긋하고도 땀내 나는 생활 속에서 최영미 시인은 무엇을 느끼고 기록했을까. 이 책은 제목처럼 마치 한 작가의 내밀한 일기장을 엿보듯, 진실하고 땀냄새 물씬 나는 생활의 한복판으로 독자를 끌어들인다.
“아무리 쓸고 닦아도 지울 수 없는 생의 흔적”들
이 책에는 저자의 등단 즈음인 1993년부터 최근까지 쓴 생활수필들이 실려 있다. 1부에는 2002년부터 현재까지 여러 지면에 기고한 칼럼과 산문을 모았고, 2부에는 2000년에 출간되었다가 절판된『우연히 내 일기를 엿보게 될 사람에게』에서 ‘생활의 냄새가 진한 글들’을 골라 묶었다. 등단 무렵 서른 즈음의 젊은 여성시인으로 사람과 일상을 치밀하게 관찰하며 써내려간 글에서부터 최근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며 다시 ‘시퍼런 오기’로 버텨냈던 ‘서른의 강’을 되짚어보는 글에 이르기까지 17년에 걸친 생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인생에서 언제 싸우고 언제 타협해야 하나요?”
사람들은 일기장에 자기자신에 관한 이야기뿐 아니라,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과의 추억을 비밀스레 새기게 마련이다. 최영미 시인 역시 이 책에서 세월의 강을 건너는 동안, 마음의 의지처가 되고 생의 길잡이가 되어주었던 이들과의 애틋한 인연을 소개한다. 책장을 넘기자마자 눈에 띄는 ‘사랑을 주고 떠나신 할머니께 이 작은 책을 바칩니다’라고 쓰인 정갈한 두 줄의 헌사에서도 느껴지듯, 저자는 ‘짧은 지면에 풀어놓기엔 벅찬’ 할머니와의 추억들을, 또 ‘아무도 돌보는 이 없이 홀로 병마와 싸우며 힘겹게 하루하루를 연명’하다 세상을 떠난 할머니에 대한 슬픔과 부채의식을 절절하게 기록한다.
이외에도『서른, 잔치는 끝났다』로 ‘인생이 뒤집어지면서’ 잃어버렸던 친구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편지글을 띄워 기적처럼 다시 만나게 된 사연에서는, 세월이 흐를수록 한 시절을 공유한 오랜 친구가 그리워지며 결국 사람에게 배우고 사람에게 희망을 얻을 수밖에 없는 우리네 삶의 비의를 새삼 깨닫게 한다.
“나는 잔치가 끝났다고 말한 적이 없다”
90년대, 숱한 화제를 낳고 주목을 받았던 최영미 시인의의 첫 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 누구도 예상치 못한 충격이고 돌풍이었기에, 세간의 말과 논쟁은 끝이 없었다. 그 시간들 동안 최영미 시인은 그 숱한 말들의 잔치를 견뎌야 했다.
“왜 잔치가 끝났느냐?” 이렇게 묻는 사람들은 대부분 소위 자신들이 운동권의 적자라고 생각하는 이들인데, 그들은 ‘잔치’가 ‘운동’의 은유라며 내 시를 지나치게 심오하게 확대 해석하는 잘못을 범했다. 하지만 설령 그들의 해석이 맞다 해도 그렇다. 그렇게 애지중지하는 잔치라면 누구 한 사람이 끝내자고 해서 쉽게 끝나겠는가. 그런 시시한 잔치라면 애저녁에 상을 걷어치우는 게 낫지 않을까.
심지어 제목에 얹은 ‘서른’이라는 단어를 트집 잡아 “1994년이면 당신 나이 서른세 살 때인데 왜 시집 제목을 서른이라고 달아 독자를 속였느냐?”라는 힐문을 받기도 했다 하니, 『서른, 잔치는 끝났다』가 저자에게 안겨준 영광과 명예도 적지 않지만, 뭇사람들의 시기와 오해, 그리고 그로 인한 상처 또한 깊었음을 짐작케 한다.
한 선배 작가는 최영미 시인에게 ‘글을 써서 밥을 먹으려면 어느 정도의 수모는 감수해야 한다’고 말했다 한다. 그 숱한 절망과 환멸 속에서 저자는 ‘아무것도 붙잡을 것이 없’었기에, ‘정든 한숨과 환멸의 힘’으로, 또 ‘그 흔한, 잘난 희망이 아니라 차라리 질긴 절망을 벗삼아’ 견디고 살아낸다.
언제나 자신의 삶에 지독하리만큼 진실하고자 했고 철두철미해지려 했던 시인 최영미. 그가 이제 17년간 고통과 절망의 시간을 딛고 기록한 일상의 조각들을 독자들 앞에 꺼내놓는다.
이 책은 그의 숨겨진 면모를 가감 없이 엿볼 수 있는 단 한 권의 절실한 일기장이자 산문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