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아 있음이 우연이 아니라고 누가 말할 수 있는가?
치밀한 주제 의식, 인간 존재의 심연을 탐사하는 지적 통찰
밀란 쿤데라, 움베르토 에코에 비견되는 레온 드 빈터의 문제작!
레온 드 빈터라는 이름은 이미 오래전부터 체코의 밀란 쿤데라, 이탈리아의 움베르토 에코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영예를 누려왔다. 20세기의 정신적 빈곤과 황폐함을 그린 대작 『호프만의 허기』가 처음 국내에 소개된 후 눈 밝은 독자들은 그의 이지적이고 통렬한 시선에 주목했다. 이번에 출간되는 『바스티유 광장』은 독자들에게 레온 드 빈터를 각인시킨 작품으로서, 과거의 음영을 고스란히 떠안은 현재에 대한 치밀한 탐색을 보여주며 그의 작품 세계의 뿌리를 유추하게 한다.
소설은 프랑스의 계몽주의 사상가 드 퐁트넬의 “역사란 관례적인 우화에 불과하다”라는 말을 인용하면서 시작된다. 파올 드 비트는 사학자이자 역사 교사이지만 부모가 홀로코스트에서 희생당하고 쌍둥이 형은 생사를 알 수 없는 황량한 개인사를 지니고 있다. 역사가 내보이는 필연적인 인과에 그는 진저리를 친다. 생면부지의 부모를 그리워하는 마음과 홀로코스트라는 소름끼치는 과거사가 역사적 흐름의 하나로 치부되는 세태에 대한 반발이 맞물려, 그는 결코 일어나지 않은 과거의 일을 욕망하게 된다.
프랑스혁명 중에 루이 16세와 왕가 일족이 바렌으로 도피하다 발각되어 처형당했던 사건에 대해 그는 역사적 사실과는 달리 왕가의 도피가 성공했다는 내용의 책을 쓰고 있다. 이것은 역사의 당위성을 반박하고자 하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지만, 한편으로 사학자로서의 자기검열에서 자유롭지 못한 자신 때문에 괴로워한다.
비디오만 보면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그를 보다 못한 아내는 일단 책을 완성하라고 채근한다. 책에 대한 욕망 때문이 아니라 지리멸렬한 일상에서 도피하기 위해 그는 자료 조사를 핑계로 파리로 향하고 그곳에서 폴린이라는 젊은 유태인 여성을 만나 불륜관계를 맺게 된다. 그의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어째서 자신이 이런 지경에 이르렀는지에 대해 과거와 현재를 교차 서술하며, 현실과 반목하는 내면의 욕망과 결핍의 자화상을 냉정하고 통렬하게 그려 보인다.
결핍이 해결되지 않는 이유는 이미 결론나버린 과거 때문이다!
같은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폴린과 그는 저항할 수 없는 공감대를 형성해나간다. 전쟁고아로 보육원에서 자라난 성장 배경이나, 결혼 생활로도 해소될 수 없었던 내면의 고독과 결핍감은 폴린을 만난 후에야 비로소 해소될 실마리를 찾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유태 민족의 역사가 세계사에서 고립되어 존재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홀로코스트 이후 유태인으로서의 정체성 혼란은 연인과의 연대의식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미완의 문제로 남는다.
부모의 신원을 추적하다 스물세 살이 되어서야 처음으로 그에게 필립이라는 쌍둥이 형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지만 생사가 확인되지 않는 형은 그에게 죽은 사람이나 마찬가지였다. 어느 날 그는 파리의 바스티유 광장에서 자신이 찍은 폴린의 사진을 보다, 카메라를 보며 웃고 있는 자신과 똑같이 생긴 한 남자의 모습을 발견한다. 이제 역사와의 불화를 극복하기 위한 유일한 돌파구는 형 필립을 찾는 일이 되어버린다. 필립을 찾기만 하면 태어나면서부터 결핍되어 있었던 자신의 정체성을 찾을 수 있을 거라는 맹목적 믿음과 혈육에 대한 사무치는 그리움으로, 그는 필립을 더욱 애타게 갈구한다.
필연과 우연을 관통하는 역사적 성찰의 드라마!
그녀가 물었다. “바렌 운운해서 뭘 어쩌자는 거예요? 물론 그 도피가 성공할 수도 있었다는 가능성은 인정해요. 하지만 실패했잖아요. 루이는 처형을 당했고요. 왕의 목에 비곗살이 잔뜩 올라서 칼로 단번에 싹둑 자를 수 없었기 때문에 사형 집행인이 기요틴을 몇 번이나 써야 했대요.”
“만약 도피 중에 어떤 한 가지 요인만 달라졌더라면, 그는 자연사로 세상을 떠났을 거야.” 내가 말했다. _97쪽
세계사의 굵직한 흐름으로 자리 잡은 일련의 사건들에 대한 역사적 의구심은 파올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다. 『바스티유 광장』은 이 소설의 제목이자 주인공 파올이 집필하고 있는 책의 제목이기도 하다. 프랑스대혁명이 완수되는 과정은 전제군주제의 몰락이라는 시대적 요청 때문이라기보다, 루이 16세의 무능한 캐릭터에서 기인했다는 점과 그들의 도피가 미수에 그치지 않았다면 세계의 역사가 다른 방식으로 전개되었을 거라는 게 파올이 쓰고자 했던 내용이다. 역사를 이루는 하고많은 요소 중에 우연성만은 어디에도 끼어들지 못한 채, 모든 과거의 일들이 과학적 인과를 이루는 듯 취급되는 보편적 역사관에 그는 반기를 든다.
역사란 사학자의 실적을 정당화하고 이념들의 실상을 입증해 보이려는 최종 목적 아래, 몇몇 표리부동한 사실들이 인과관계라는 허구적인 연쇄를 형성하고 있는 무형의 집합체에 불과했다. 사건이 발생했으니 원인 역시 반드시 있을 것이었다. 그러나 원인을 이루는 미심쩍기 짝이 없는 요인 중에서, 어떤 인과관계든 또는 과거에서 얻은 어떤 교훈이든 가소롭다는 듯이 비웃는, 이른바 우연이라는 찬란한 요인에 대해서는 전혀 논의된 바가 없었다. _32~33쪽
이 점에 대해 폴린조차도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며 그가 과거를 재구성하려는 욕망은 부모에 대한 트라우마 때문이라고 공격한다. 시오니즘이 공산주의의 민족적 변형이라는 폴린의 견해는 개성적이기는 하나, 역사의 당위적 흐름을 거스르지 않는 해석이라는 점에서 일반적인 사학자들의 태도와 궤를 같이하는 것이다. 파올은 그런 태도에 대해 진저리를 치며 역사의 논리적 허구성을 일관되게 비판하면서도 세계사의 흐름 속에 자신의 역사관을 순응시키고 역사적 흐름을 신뢰하고 싶어한다.
“왜요?” 그녀가 격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나는 당신의 진심을 알고 싶어요. 그 존재하지 않는 역사가 당신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지 이해하고 싶어요.”
“의사 선생님, 그런 진찰은 더이상 필요 없습니다.” 나는 일부러 빈정대는 투로 말했다. (……)
“당신 부모님하고 관련된 거겠죠.” 그녀가 말했다.
“폴린, 제발……”
“알고 싶어요. 파올 씨, 말해주세요. 당신은 태어나서 부모님 얼굴조차 본 적이 없지요. 당신은 고아로 부모님이 수용소 가스실에서 학살당했다는 의식 속에서 성장해왔기에, 결코 돌이킬 수 없는 과거를 돌이키기를 원하고 있는 거예요.” _98~99쪽
파올의 이러한 모순적인 욕망의 배경은 그의 개인사와 유태인의 역사가 지닌 결핍 때문이다. 부모의 신원을 알고 싶고 생사조차 불분명한 쌍둥이 형을 만나보고 싶다는 지극히 인간적인 바람조차 허용되지 않는 역사의 희생물로서, 또한 규정할 수 없는 요인에 의해 살아남은 축복받은 존재로서 그의 모순은 확대되기만 할 뿐, 어디서도 화해의 지점을 찾지 못한다. 폴린이 심취한 불교문화나 그 자신이 빠져들어 동경하는 일본의 다큐멘터리 비디오는 미약하나마 작가가 동양문화의 면면한 흐름 속에서 단절과 망각의 역사를 바로잡아보려는 노력을 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작가의 조심스러운 동양 문화에 대한 접근은 바로 그 지점에서 살고 있는 한국의 독자들에게 과거와 현재에 대한 또다른 문제의식을 안겨줄 법하다.
짧지만 흥미롭게 써내려간 이 소설은 어쩌면 그의 가장 뛰어난 작품일지 모른다. 무엇보다 인간의 연약함을 웅숭깊은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_유디쉬 알게마이네
죄와 운명, 믿음과 공포라는 오늘날 인류의 큰 테마에 대해 레온 드 빈터만큼 재미있고도 격조 높게 쓸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다. _쥐트도이취 차이퉁
파올 드 비트는 중년의 문턱에 들어선 고등학교 역사 선생이다. 교직 생활에 대한 권태와 혐오, 결혼 생활에 대한 회의 속에서 그는 지적인 무력감과 시간적 공허감에 빠져든다. 이 같은 정신적 고갈 상태는 전쟁고아로 자란 그의 정체성에서 비롯한다. 다른 가족은 다 죽고 자기만 살아남은 이유는 무엇일까? 필연성이 결여된 그의 생존은 단지 맹목적 우연에 불과하다. _「작품 해설」에서
지은이 레온 드 빈터(Leon de Winter)
1954년 네덜란드 남동부 도시 덴 보스의 전통적인 유태교 집안에서 태어났다. 기독교 계열의 중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 네덜란드 필름아카데미를 수료했다. 이후 영화제작자, 시나리오 작가, 프로듀서 등으로 활동하다 1976년 첫 작품집 현세의 공허에 대하여』를 발표하며 문단에 데뷔했다. 1978년 『젊은 뒤르러의 성장』으로 레이나 프린선 헤이를링 문학상을 수상하면서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했다. 『바스티유 광장』(1981)과 『엘리언 W를 찾아서』(1981) 등이 기존의 네덜란드 사실주의에 대한 파격적인 도전으로 평가받으면서 지성파 작가로서 명성을 굳혔으며,『바스티유 광장』을 비롯한 많은 작품이 작가 자신의 시나리오로 영화화되었다. 유태인으로서의 정체성을 바탕으로 인간의 본질적 욕망과 독자들의 지성을 끝없이 자극하는 작가로 꼽히는 그는 밀란 쿤데라, 움베르트 에코와 자주 비견되며 유럽 전역에 폭넓은 독자층을 형성하고 있다. 주요 작품으로 『카플란』(1986) 『호프만의 허기』(1990) 『슈퍼텍스』(1991) 『지오노코』(1995) 『신의 체육관』(2002) 『귀향할 권리』(2008) 등이 있고, 벨트 문학상, 부버 로젠츠바이크 메달, 브라반트 문학상 등을 받았다. 현재 작가인 아내와 함께 암스테르담과 로스앤젤레스를 오가며 살고 있다.
옮긴이 지명숙
한국외대 네덜란드어과를 졸업하고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에서 19세기 네덜란드 문학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네덜란드 레이던 대학 한국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옮긴 책으로 『필립과 다른 사람들』 『막스 하벌라르』 『천국의 발견』 『늑대단』 등이 있으며, 저서로 『보물섬은 어디에―네덜란드 공문서를 통해 본 한국과의 만남』 등이 있다.
▣ 2010년 1월 25일 발행
▣ ISBN 978-89-546-0808-4 03890
▣ 128*188(양장) | 180쪽 | 9,500원
▣ 책임편집: 강건모(redlily@munh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