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문단의 ‘악동’ 롤리타 필의 데뷔작!
찰나의 행복 후에 이어지는 지옥 같은 우울…
상류층 젊은이들의 순수한 사랑과 어두운 내면, 그리고 방황!
사랑과 에비앙 생수와 말보로 라이트, 그것이면 충분하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것으론 충분하지 않았다.
“나는 창녀다”라는 도발적인 발언으로 시작하는 『헬』은 1982년생 작가 롤리타 필이 열일곱 살 때 쓴 첫 소설이다. 이 책은 젊은이들이 동경하는 상류층 생활에 대한 솔직한 묘사와 순수하고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발표되자마자 프랑스 사회에 큰 반향을 일으키며 베스트셀러에 올랐고, 영화로도 제작되었다.
부르주아 집안 출신으로 십대에 떠들썩하게 문단에 데뷔한 점, 어쩌다 인기를 얻었을 뿐이라는 비난과 천재 문학소녀가 등장했다는 찬사를 동시에 받은 점, 데뷔작에서 부유한 십대 소녀의 사랑과 방황을 그린 점 등, 롤리타 필은 많은 부분에서 프랑스 문단 역사상 최고의 이슈메이커였던 프랑수아즈 사강을 연상시킨다. 롤리타 필 역시 프랑수아즈 사강의 데뷔작 『슬픔이여 안녕』을 읽고 영감을 받아 『헬』을 썼다고 밝히기도 했다. 『헬』은 1954년 발표된 『슬픔이여 안녕』이 지닌 독특한 감수성을 그대로 유지하면서, 그 위에 강렬하고 쾌락적인 21세기의 문화적 감성을 덧입힌 책이다.
“초라한 세상의 거짓말과 덫을 꿰뚫어보는 재능 있고 명석한 소녀”라는 <르 몽드>의 평가처럼, 세계를 바라보는 롤리타 필의 시선은 아직은 순수해도 좋을 소녀치고는 너무나 현실적이며, 이 세상의 명암을 세세히 꿰뚫어볼 정도로 깊이 있다. 또 그녀는 작품에서 보들레르, 조르주 바타유, 알베르 코엔 등 프랑스 문학의 대가들을 언급하며 문학적 자양분이 되어준 작가들에게 오마주를 바치기도 한다. 풋풋한 문학적 열정과 나이답지 않은 깊이 있는 성찰을 바탕으로 아름답고도 처연한 사랑 이야기를 그려낸 롤리타 필. 그녀의 문학적 행보를 주시해야 하는 이유이다.
사랑은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본명은 엘라, 별명은 ‘지옥’을 뜻하는 헬. 매일 고급 레스토랑에서 친구들과 식사를 하고, 밤이면 파리의 가장 잘나가는 클럽에서 춤을 추고, 샹젤리제와 몽테뉴 대로의 명품 매장을 자유로이 드나드는 열여덟 살의 ‘잇 걸’. 하지만 사실 그녀의 삶은 권태롭고 우울하다. 마음만 먹으면 무엇이든 살 수 있고 어디든 갈 수 있지만, 진정으로 원하는 것도, 진정한 사랑도 없다. 부모 역시 그녀에게 돈만 쥐여줄 뿐, 애정과 관심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술에 취해 바보 같은 짓을 일삼으며 무의미한 생활을 견딘다.
당신은 반짝반짝 눈부신 우리의 부를 부러워하고 있다…… 온통 도금된 것뿐이다. 돈, 자동차, 친구, 세계 도처에 있는 집, 어디든 마음대로 들어갈 수 있는 출입의 자유…… 그런데 우리는 할 게 아무것도 없다. 그래서 서로에게 욕지거리를 한다. 사실은 욕망할 게 더이상 없기 때문에 극도로 지겨워하고 있는 것이다.(20쪽)
헬은 얼마 전까지 사귀던 B와 헤어지고 낙태수술을 받는다. 병원에서 나와 거리를 방황하던 헬은 우연히 몽테뉴 대로에서 베이비 디오르 매장 쇼윈도에 진열된 아기 옷들을 본다. 그 순간, 이 세상에 존재할 수도 있었을, 하지만 자신이 죽여버린 아기가 떠올라 울음을 터뜨린다. 죄의식과 고통에 흐느끼던 헬 앞에 젊고 잘생긴 낯선 남자가 나타나 그녀에게 손수건을 내밀고 사라진다.
얼마 후 여느 때와 다름없이 친구들과 레스토랑에서 수다를 떨던 헬은, 파리 사교계에 악명 높기로 유명한 ‘앙드레아 디 산세베리니’라는 남자에 대한 이야기를 듣는다. 그리고 그날 저녁 헬은 우연히 그때 손수건을 주었던 남자와 다시 마주친다. 그의 차를 타고 가다 알게 된 그의 이름은 앙드레아, 바로 친구들이 말하던 그 남자였다.
갑자기 모든 게 분명해졌다. 내가 차에 오를 때 새하얗게 질리던 카상드르의 얼굴, 허무주의자 같은 말들과 세상에 둘도 없는 퇴폐적인 행동을 한다던 그 앙드레아가 완전히 낯설게만 느껴지지 않았던 까닭 — 어쩌면 그게 낯설게 느껴지는 쪽이 오히려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에서는 더 놀라운 일일지도 모르겠다 — 그리고 두 달 전 몽테뉴 대로에서 내가 느꼈던 흥분 등 이 모든 것이 한번에 이해되었다.(71~72쪽)
그는 성장 배경뿐만 아니라 가치관까지도 헬과 비슷했다. 그들에게 삶이란 허무한 것이며, 행복 역시 존재하지 않는 허상이고, 사랑은 순간적이고 인위적인 도취일 뿐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그 헛된 감정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빠져든다. 서로의 어두운 내면을 너무나 잘 알기에 서로에게 위안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 사랑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서로만을 탐닉하는, 강렬하지만 그만큼 서로를 구속하는 사랑이었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권태가 그들을 덮치고, 그들은 기분 전환을 위해 예전에 드나들던 클럽과 레스토랑에 다시 출입하기 시작한다.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고 느끼면서도 다음 날이면 또다시 방탕한 삶으로 빠져드는 그들에게 남은 것은 이별뿐이었다.
끝났다. 나는 단념했다. 더 이상 견딜 수 없었다. 내 생각에 우리는 마지막엔 서로를 미워하기까지 했던 것 같다. 그건 더이상 삶이 아니었다. 습관, 끔찍한 습관이었다. 우리는 매일 함께 눈을 뜨고, 함께 방황하다, 권태로워졌다…… (…) 우리는 서로에게 벗어나기 위해 서로에게 매달렸고, 상대가 떠나갈까 두려워하면서도 언제나 함께 있는 것을 증오했다…… 그래서 먼저 떠났다.(123쪽)
시간이 흐르면…… 더이상 사랑하지 않게 되리
서로 사랑하면서도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아 상대에게 상처만 주는 생활, 서로를 잊지 못한 채 보내는 절망적인 나날들…… 이들의 모습은 차갑기 그지없는 현대 사회에서 진정한 사랑과 위안을 찾아 헤매는 젊은이들의 전형적인 초상이다. 롤리타 필은 누구보다 삶을 즐기는 듯하지만 한편으론 냉소적이고 허무주의에 빠진 채 행복과 사랑, 고통의 의미를 끊임없이 자문하는 두 연인의 이야기를 통해 이 시대 젊은이들의 방황하는 내면을 아프게 그려 보인다.
언론 서평
독자의 신경을 건드리는 오만한 주인공의 이면에 초라한 세상의 거짓말과 덫을 꿰뚫어보는 재능 있고 명석한 한 소녀가 있다. 르 몽드
롤리타 필에게서는 악마를 몰아내려는 듯한 글쓰기의 진정한 격정이 느껴진다. 그녀는 소설 속에서 알베르 코엔과 조르주 바타유를 읽기도 하고 보들레르와 레오 페레를 인용하기도 한다. 이 문학적 열정이 좀더 성숙해질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프랑스 아마존
파리의 상류층 사회에서 전개되는 이야기, 광고 문구처럼 톡톡 튀는 대화… 자신의 소설 주인공처럼 부잣집 딸인 롤리타 필은 가장 섹시한 순간까지 웃음을 터뜨린다. 그러나 그 웃음은 구치 선글라스와 코카인 가루 아래에서 균열을 일으킨다. 디망슈
* 2010년 3월 29일 발행
* ISBN 978-89-546-0979-1 03860
* 128*188(양장) | 212쪽 | 9,500원
* 담당편집 : 허주미(031-955-2657, magnolier@munh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