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에게 저당잡힌 글쓰기 사십여 년,
지치지 않는 필력, 우리시대의 소설가 한승원의 새로운 성장소설
고향인 전남 장흥의 율산 마을에서 바다를 시원(始原)으로 한 작품들을 꾸준히 써오고 있는 소설가 한승원의 새로운 장편소설이 출간되었다. 『아제아제 바라아제』 『추사』 『원효』 『다산』 등 굵직한 작품들을 발표해오던 그가 새롭게 써내려간 『보리 닷 되』는 1997년 출간한 『해산 가는 길』을 잇는 성장소설로, 등단 사십 년을 넘긴 작가의 진솔한 문학적 자서전이라 할 만하다. ‘한승원’이라는 이름과 등단작 「목선」을 그대로 노출한 이 소설의 솔직함은 끊임없는 필력으로 아직도 활발한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의 유년 시절의 집약이며, 새로운 글쓰기를 위한 또하나의 출발점이다. 아직 끝나지 않은 서사의 길 위에서 그의 모험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첫사랑에 아파하고 글쓰기에 목마르던 청보리의 한때
이제 막 고등학교에 입학한 승원은 골목길에서 종종 보곤 하던 군수집 딸 초영에게 마음을 빼앗긴다. 그녀의 마음을 그에게로 쏠리게 하고 싶지만 방법은 오리무중. 시와 소설을 쓰며 그녀와 함께하고 싶었던 승원이지만 초영의 오빠 이주성도, 친구인 문영철도 그에게 그 꿈을 포기하라고 말한다. 승원의 감각이 예민하지 않고 작가적 자질도 타고나지 못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의 어머니는 그가 힘들어할 때마다 크고 탐스러운 유자를 보았던 태몽을 이야기하며 그를 격려한다.
승원은 교련시간을 피하기 위해 든 악대부에서 클라리넷을 불게 된다. 그런 승원을 못마땅해하는 엄한 아버지와 보듬어주는 자애로운 어머니. 점점 엇나가던 형은 아버지에 대한 불만과 동생에 대한 열등감으로 학교에 자퇴서를 내고 하사관학교에 들어가버린다.
한편 초영이 동생 주인을 통해 승원에게 책을 빌려주며 둘의 사이가 진전되기 시작한다. 하지만 그녀는 미래가 불투명해 보이는 그에게 실망하고 곧 연락을 끊는다. 이후 서라벌예대를 졸업하고, 군대를 갔다 와서 자신만 바라보는 한 여자와 결혼도 하게 된 승원은 국민학교 교사가 되어 평범한 나날들을 보낸다.
그해 늦은 여름의 어느 날 초영의 동생인 주인이 찾아와 초영의 소식을 전하고, 그는 문득 삭발을 하고 한 자 한 자 써내려간다. 마침내 승원은 단편소설 「목선」으로 신춘문예에 당선된다.
내 속에 알 수 없는 시커먼 어떤 한 놈이 들어 있었다.
이것은 내 영혼을 그 시커먼 놈에게 저당잡히고 쓴 소설이다.
이제 고백하는데, 토굴에 똬리를 튼 첫날밤에 득량만 바다의 늙은 도깨비 한 놈이 찾아와서 말했다.
“악마에게 영혼을 저당잡히고 젊은 한생을 새로이 산 파우스트처럼, 너도 그런 삶을 한번 살고 싶지 않으냐?”
환장할 것 같은 환희에 젖어든 채 내가 대답했다.
“그래!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고 싶다.”
―‘작가의 말’에서
한승원은 ‘작가의 말’에서 이 소설이 도깨비에게 영혼을 저당잡히고 쓴 소설이라고 적었다. 글쓰기를 위해서라면 기꺼이 영혼이라도 팔겠다는 젊은 작가들에게서도 찾아보기 힘든 집념, 이 결연한 소설가의 각오는 사뭇 비장하기까지 하다.
그렇게 영혼을 저당잡히고 쓴, 클라리넷 소리처럼 아련하게 다가오는 이 유년 시절의 이야기는 누구나 겪었으며 누구나 얘기하고 싶은 가장 아름다운 시절의 기록이다. 여물지 않은 마음을 풋바심하다 많은 실패를 경험하지만 결국 머리를 깎고 신춘문예에 당선된 작가의 모습은 모든 문학청년의 자화상이다. 한승원이 해산토굴에 숨어들어 득량만의 바다를 바라보며 건진 옛 고향땅의 이야기는, 우리 시대의 현재와 괴리된 이야기가 아니라 현재가 확장된 이야기로서의 과거인 것이다.
껍질이 잘 벗겨지지 않아 먹기가 사나운 겉보리처럼 조금 모자라고 모자란 만큼 순진한, 시시포스처럼 절망하면서도 쓰고 또 썼던 어린 한승원. 하지만 겨울에 봄을 준비하지 않은 나무들은 다음해 봄에 건전하게 싹틀 수 없는 법이다. 그래서 그는 충분히 앓고 나서야 쓴다. ‘바다에서 건져올린’ 그의 작품이 여전히 힘있는 까닭이다.
* 초판발행 | 2010년 6월 10일
* 145*210 | 268쪽 | 값 10,000원
* ISBN 978-89-546-1136-7 03810
* 책임편집 | 조연주 이경록 (031-955-8865, 35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