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 열광하는 처녀귀신 이야기의 정수!
30여 편 귀신이야기로 되짚어본 조선시대 마이너리티의 한과 카타르시스
처녀귀신이 입을 열 때 두려워 말고 그의 이야기에 집중해보자. 공포스런 귀곡성의 본질은 사실, 약하고 힘없던 여인이 현세에서 미처 못 다한 말이다. 그렇기에 귀신의 목소리는 무섭다기보다는 슬프고 처연하다. 그러므로 귀신이 채 입을 열기도 전에 가슴이 먼저 놀라 기절해버리는 일은, 귀신에 대한 "예의"가 아니다. 그들은 당신에게 말을 걸기 위해 저승에서 이승으로, 내세에서 현세로 찾아온 귀한 손님들이다. 이제 이야기로 남은 그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일 때다. 『기문총화』 등 문헌에 전해오는 귀신 이야기의 정수를 모아 오늘날 독자들에게 전한다.
◆ 왜 하필 처녀귀신인가
올해도 처녀귀신은 재림한다. 수십 번 영화나 드라마에 등장한 구미호는 이번에도 "구미호, 여우누이뎐(KBS 2TV 수목드라마)"으로 돌아오고, 개봉을 앞둔 영화 "귀(鬼)"에서도 사랑에 배신당한 처녀귀신 코드는 여전히 유효하다. 그런데 왜 하필 좀비도, 흡혈귀도, 마녀도, 유령도 아닌 처녀귀신일까? 한국의 처녀귀신은 우리가 미처 돌보지 못한 "타자의 슬픔"을 상징한다. 그들은 살아생전 억울한 누명을 쓰거나, 사랑의 배신을 맛보거나, 심지어 강간당해 죽은 억울한 여인들이다. 못 다 푼 한 때문에 그들은 차마 저승으로 가지 못하고 구천을 떠돌며 저승과 이승 사이를 배회한다. 처녀귀신이 무서운 진짜 이유는 그들이 우리 마음속의 죄책감을 환기시키기 때문이다. 어쩌면 내가, 우리가, 저 무고한 여인을 죽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죄책감. 여인을 억울한 죽음으로 내몬 것이 어쩌면 약자에게 가혹한 사회의 책임일지도 모른다는 그 서늘한 깨달음이 우리 모두 처녀귀신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 없게 만든다. 때늦은 각성의 순간, 등골에 식은땀이 흐른다.
◆ 젠더, 마이너리티 문제 아우른 인문학적 고찰
이 책은 특히 한 번 소비하고 마는 처녀귀신의 공포를 젠더와 마이너리티 문제로 아우른 인문학적 고찰이 눈에 띈다. 저자는 30여 편 귀신 이야기를 들려주며, 그 속에 담긴 불편한 진실을 읽어낸다. 남자 귀신은 죽어서도 존경 받는 저승의 관리가 된 데 비해, 여자 귀신은 구천을 떠도는 원귀(寃鬼)가 됐다고 분석한 시각이 새롭다. 고소설에 나타난 남녀의 자살률을 분석한 것도 흥미로우며, 남자에게 과감히 사랑을 고백하거나 대담하게 먼저 청혼했다가 거절당한 여인들이 스스로 목숨을 끊어 귀신이 된 이야기들(5장, "원혼의 저주와 복수극")도 대중에겐 잘 알려지지 않은 것이다.
◆ 자살한 원귀를 향한 연민의 윤리학
귀신 이야기는 무섭고 재미있을 뿐 아니라 당대 사회의 고민을 보여주고, 모순을 고발하기에 더욱 의미가 있다. 처녀귀신의 귀곡성을 이해하면, 비로소 그들에게 공감하며 연민을 느끼게 된다. 살아서는 약자인 여성의 호소에 냉담기만 하던 사람들도 처녀귀신의 귀곡성에는 귀 기울였다. 나쁜 관리를 벌해 죽은 자의 누명을 벗겨주고, 죽은 여인을 동정했다. 귀신 이야기를 하고, 듣는다는 것은 우리 사회의 건강성을 상징한다. 이야기라는 장치를 통해 마이너리티의 억울함을 되돌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처녀귀신은 그래서, 해마다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