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나 탈출할 수는 있다…하지만 누구나 나비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벗어나고 싶은 감정. 그런 감정이 어떤 시기에는 더 간절하고 절박하다. 이십대 후반, 열심히 산 것 같은데, 또 어찌 보면 소꿉장난을 해온 것 같기도 해서 머릿속이 복잡할 때, 탈출의 필요성은 높아만 간다. 벗어남의 형식은 사람마다 다르다. 여행처럼 유쾌한 일탈일 수도 있고, 삶을 포기하는 극단적 비극일 수도 있다.
여기 거품처럼 끓어오르는 무기력한 일상에서 독특한 탈출을 시도한 한 예술가의 내면일기가 있다. 『바람이 말해요, 여기 왔다고-지구별 제주도, 가볍게 빈집에서 살기』는 설치미술가이자 출판 일러스트레이터로 마포와 홍대를 오가며 살아가던 지은이가 두 달간 제주도 서귀포의 빈집에 들어가 ‘바람’과 ‘어둠’을 친구로 하여 지낸 날들의 기록이다. 가장 복잡하고 활력이 넘치는 공간에서 심리적으로나 물리적으로나 멀리 떨어진 조용한 공간으로의 갑작스러운 ‘거주지 변경’. 이러한 지은이의 작은 모험은 젊은 예술가들에게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주는 레지던시residency 프로그램 덕분에 가능했고, “원래 살던 곳에서 멀리 살고 싶은” 지은이의 열망이 찾아낸 탈출구였다.
제주도 서귀포 월평동 월평로 171번지. 새로 생긴 집은 『어린왕자』에 나오는 ‘소혹성 b612호’ 같았다. 자신만의 공간에서 저자는 서울에서 살 때보다 훨씬 더 가깝게 ‘사물’과 ‘자연’을 대하고, 거기에 반응하는 ‘나’를 발견한다. 이 책은 그 하루하루를 기록한 일기이다. 사람보다 바람이 더 많고, 아무도 없는 빈집에서 너무나 날것의 어둠과 매일 마주해야 하는 제주도에서 그는 어떻게 바뀌어가는가. 섬세한 내면적 문체 속에 담아낸 이 심리적 변화를, 거품을 걷어내고 내 안의 진짜 육성을 찾아가는 과정을, 마치 또 다른 나를 지켜보는 것처럼 바라보는 게 이 일기의 독법 중의 하나일 것이다.
또한 지은이는 나뭇가지나 돌멩이, 조개껍질, 모래, 떨어진 과일, 각종 쓰레기까지 주변에서 구할 수 있는 ‘장소의 산물’을 이용해서 ‘본업’에 진지하게 열중함으로써 다양한 설치미술을 탄생시킨다. 그 결과 자신의 빈집에서 전시회까지 열게 되는데, 고용관계에 가까운 서울의 인간관계-지은이는 편집자와 일감으로 소통하는 일러스트레이터이다-에서 벗어나 제주의 예술가 동료들과 영감을 주고받으며 표현의 자유를 누리는 이 과정이 일기에 고스란히 반영돼 있고, ‘이미지 에세이’라는 별도의 챕터에서는 ‘글자 하나 없이’ 오직 ‘이미지’만으로 그 경험의 특수성을 하나의 흐름으로 담아내고 있다.
그리고 이 책의 마지막에는 부록으로 ‘일상진화’라는 독특한 목적 아래 이루어진 ‘작은 실험들’이 소개되어 있다. ‘바람사용법’이 바로 그것인데, ‘일상의 소리를 채집해 음악 만들기’ ‘쓰레기에 불지르기’ ‘땅바닥에 누워있기’ ‘비닐봉지에 공기 담기’ ‘효소음료 만들기’ ‘바닷물의 색 확인하기’ ‘겨울옷으로 카펫 만들기’ 등 제주도가 아니었다면 해보지 못했을 행위들을 총 20개로 추려내서 독자들과 공감하고자 했다. 사진과 함께 단계별로 제시한 이 재미있는 일탈들은 따라 읽는 것만으로도 상쾌한 존재의 해방감을 맛보게 해준다. 이건 마치 손가락 하나 까딱 해서 지구를 들어올리는 일과 같으니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