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쿠르 상 수상에 빛나는 모디아노 최대의 걸작!
현대 프랑스 문학이 거두어들인 가장 탁월한 작가로 평가받는 파트릭 모디아노의 공쿠르 상 수상작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가 출간되었다. 문학평론가 김화영 교수의 유려한 번역으로 1993년 국내에 처음 출간되었던 이 책을 문학동네가 역자의 세심한 교정을 거쳐 새로운 장정으로 다시 출간하게 된 것이다.
파트릭 모디아노는 그간 국내에 번역 소개된 다수의 책으로 인해 한국 독자들에게 가장 사랑받는 프랑스 작가 중 한 명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여섯번째 소설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출간과 동시에 프랑스의 모든 일간지와 주간지의 서평란에서 격찬을 받은 작품으로 모디아노의 최대의 걸작으로 꼽힌다. 프랑스의 가장 뛰어난 작가로 인정받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매해 공쿠르 상의 후보로서만 만족해야 했던 모디아노는 1978년 마침내 이 작품으로 프랑스 최고의 문학상인 공쿠르 상 수상의 영예를 안음으로써 그 명성을 확고히 떨치게 되었다.
2차 세계대전의 참화 속에서 태어나 모든 과거를 상실한 세대로 자라난 대표적인 프랑스 작가인 모디아노는 이 소설을 통해 ‘기억 상실’로 상징되는 프랑스의 비극적 현대사의 한 단면을, 나아가 인간 존재의 ‘소멸된 자아 찾기’라는 보편적인 주제의식 을 명징하게 보여주고 있다. 즉 소멸된 과거, 잃어버린 삶의 흔적, 악몽 속에서 잊어버린 대전(大戰)의 경험을 주제로 한 어떤 기억 상실자의 이야기인 이 소설에서 모디아노는, 프루스트가 말한 존재의 근원으로서의 ‘잃어버린 시간’을, 슬픔이 가득 담긴, 그러나 아름다운 기억의 어둠으로 존재하는 자기 안의 ‘잃어버린 시간’을 신비와 몽상의 언어로 탐색하고 있는 것이다.
바스러지는 과거, 지워져버린 생의 흔적들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 기억의 어두운 거리를 헤매는 슬픈 영혼의 발걸음!
장편소설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모디아노의 다른 모든 소설들과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삶의 흔적, 바스러지는 과거, 악몽 속에서 잊어버린 세계대전의 경험을 주제로 한 어느 기억 상실자의 이야기이다.
흥신소에서 탐정 일을 하다 퇴역한 ‘나’는 자신에 대한 일체의 기억을 잃어버린 인물이다. 자신에 대한 존재 증명을 상실해버 린 ‘나’는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 그날 저녁 어느 카페의 테라스에서 나는 한낱 환한 실루엣에 지나지 않았다. 나는 벌써 나의 삶을 다 살았고 이제는 어느 토요일 저녁의 따뜻한 공기 속에서 떠돌고 있는 유령에 불과했다”라고 쓸쓸히 읊조린다. 그리고는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인물을 찾는 것처럼 자신의 과거에 대해 추적하기 시작한다. 유일한 실마리는 한 장의 귀 떨어진 사진과 부고(訃告). 그것을 단서로 그는 바의 피아니스트, 정원사, 사진사 등 자신과 관련된 기억을 한 가지라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을 한 명씩 만나면서 점점 자신의 기억 속으로 들어간다. 그 기억 속에서 ‘나’는 한편으로는 뚜렷해지면서도 한편으로는 더욱 불확실해지는 자신의 ‘잃어버린 시간’과 대면한다. 1940년대, 밀수와 가짜 증명서와 배반으로 가득 찬 어느 집단, 그 집단 속의 인물인 ‘페드로’는 ‘나’와 정녕 같은 인물인가? ‘나’는 과연 저 신비스러운 ‘드니즈’, 패션모델 일을 하다가 전쟁 말기에 스위스로 잠적한 ‘드니즈’를 사랑한 일이 있는가? 과연 그것은 그의 과거인가? 아니면 다른 어떤 사람 의 과거인가? 어디선가 맡아본 듯한 향기, 어느 거리에 가면 들리는 듯한 낯익은 발소리, 어느 순간 오랫동안 기다렸던 장소 같은 창문, 그리고 익숙한 느낌들…… 만나는 사람들의 단편적이고 불확실한 증언과 잡힐 듯한 아련한 추억으로 구성되는 ‘나’의 기억, 그 허구 같은 과거 속으로 ‘나’는 조금씩 들어가 살기 시작하는데, 존재의 증명은 되살아나는 듯 아니면 영구히 미궁 속으로 잠기는 듯 여전히 불투명하다. 그리고 소설은 과거의 애매성 속으로 또다시 소멸해간다.
‘나는 누구인가’, 인간 실존에 대한 본원적 질문을 집요하게 제기한 작품!
이처럼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점점이 흩뿌려진 과거의 아련한 기억들을 따라 존재의 흔적을 찾아나선 ‘나’의 쓸쓸하면서도 아름다운 도정을 몽상적인 언어 속에 담고 있다. 모디아노는 이 작품을 통해 언뜻 지나치며 본 한 장면, 끊어진 한 토막의 대화, 어렴풋한 소리들을 포착해내는 예민한 감각과 간결하고 탈색된 언어로 그만의 독특한 서정적 문학 세계를 아름답게 일구어내고 있다.
문학평론가 김화영 교수가 “과거를 모두 기억할 수 없다면 살아서 무엇 하나? 그러나 살지 않는다면 추억해서 무엇 하나? 가장 헛되이 바스러지는 망각의 무(無)로 변하는 우리들 삶을 가장 감동적으로 서술하고 있는 이 소설은 바로 이런 점에서 어떤 모랄을 손가락질하고 있는 것 같다”라고 평가하고 있는 것처럼, 이 소설이 모디아노의 여타 다른 작품에 비해 그의 문학 세계의 순금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잘게 부서져 날아가버릴 듯한 흔적들, ‘잃어버린 시간’을 추적하는 기억의 미학”을 너무나 황홀하게 성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누구인가’라는 인간 실존에 대한 본원적 질문을 집요하게 제기하면서 희뿌연 안개 속에 감추어진 존재의 투명한 빛을 탁월한 언어로 빚어놓은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는 모디아노 최대의 걸작임에 틀림없다. 기억의 흔적을 더듬고 있으면서도 이 소설에서는 역설적으로 활발한 생의 숨소리가 묻어난다.
우리가 이 소설로부터 단 한 걸음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은, 소멸 속에서 오히려 생의 긴장을 강렬히 포착하게 만드는 모디아노만의 매력적인 문장 때문이다.
나는 천천히 읽을 수 있는 아름답고 낯선 글을 좋아한다. 주변이 소란스럽거나 삶이 뻔하게 느껴져 신물날 때, 나는 프랑스 소설 몇 권과 함께 틀어박히는 일로 멋을 부리곤 한다. 새 번역으로 나온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를 읽었다. 기억을 상실한 주인공은 자신의 과거를 추적하지만, 그렇게 해서 찾아간 존재의 마지막 지점은 바스러진 무(無)일지도 모른다는 것. 매혹적인 소설이다. _은희경(소설가)
파트릭 모디아노의 작품 속에서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과거를 추적한다. 그리고 집요한 추적을 강행하는 그의 인물들은 하나같이 정서적으로 심각하지 않다. 그들은 공허에 길들여진 자들이며 수증기처럼 이미 승화된 자들이다. 오히려 심각한 것은 무화되는 기억의 장애물들을 넘어 끈질기게 책장을 넘겨야 하는 지상에 붙박인 독자들이다. 그런데 다시 책을 읽으며 한 독자로서 그 지루하고 우수 어린 추적에 동행하여 헛수고를 반복한 끝에 한순간 깨닫게 된 것이 있었다. 그것은 뜻밖에도 현재라는 것의 매혹이다. 모디아노가 말하려는 것과는 상관도 없이, 바로 이 순간에 햇빛에 쨍하고 튀어오르는, 현재라는 이름의 사금파리를 보게 되는 것이다. 삼 초의 지속에 불과한, 연약한 영사막과도 같이 줄지어 지나가는 현재들의 축복을. _전경린(소설가)
지은이_파트릭 모디아노Patrick Modiano
바스라지는 과거, 잃어버린 삶의 흔적으로 대표되는 생의 근원적인 모호함을 신비로운 언어로 탐색해온 현대 프랑스 문학의 거장. 1945년 불로뉴 비양쿠르에서 태어났다. 열여덟 살 때부터 소설을 쓰기 시작해 1968년 첫 소설 『에투알 광장』으로 로제 니미에 상, 페네옹 상을 받으며 화려하게 데뷔했으며, 이후 발표하는 작품마다 평단과 언론, 독자들의 격찬을 받고 있다. 『외곽도로』(1972)로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대상을 거머쥐고, 『슬픈 빌라』(1975)로 리브레리 상을,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1978)로 공쿠르 상을 수상했다. 이 외에도 『추억을 완성하기 위하여』(1977) 『잃어버린 거리』(1984) 『8월의 일요일들』(1986) 『도라 브루더』(1997) 『신원미상여자』(1999) 『작은 보석』(2001) 『가계도』(2005) 등의 작품을 잇달아 발표했다.
옮긴이_김화영
서울대 불문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프랑스 엑상프로방스 대학에서 알베르 카뮈론으로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한 그는 고려대 불문과 교수로 재직하면서 개성적인 글쓰기와 유려한 번역, 그리고 어느 유파에도 구속되지 않는 자유로운 활동으로 우리 문학계와 지성계에서 독특한 위치를 점해왔다. 『시간의 파도로 지은 城』 『바람을 담는 집』 『문학 상상력의 연구―알베르 카뮈의 문학 세계』 『소설의 꽃과 뿌리―나의 시대의 소설가』 『행복의 충격』 『공간에 관한 노트』 『발자크와 플로베르』 등 십여 권의 저서와, 알베르 카뮈 전집,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 『잃어버린 거리』 『오늘의 프랑스 철학사상』 『짧은 글 긴 침묵』 『예찬』 『내 생애의 아이들』 『섬』『마담 보바리』 등 팔십여 권의 번역서가 있다.
* 2007년 5월 31일 발행
* ISBN 978-89-546-0328-7 03860
* 128 * 188 | 312쪽 | 11,000원
* 책임편집: 김지연(031-955-886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