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들은 늘 괜찮다고 말한다.
사실, 당신의 엄마는 괜찮지 않다. 그리고 당신은 그것을 알고 있다.
다만 외면할 뿐이다. 못 본 척하는 것으로 마음의 짐을 덜고 싶은 것뿐이다.
멋 훗날, 오늘 잠시 편하자고 두고 온 것이 회한으로 돌아올 것을 알면서도,
당신은 엄마를 돌아보지 않고, 바쁘다며 걸음을 재촉한다.
이렇게 우리는 엄마에 대해 알 수 있는 기회를 자꾸 흘려버린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엄마를 잘 안다고 착각하고,
엄마의 ‘진짜 얼굴’을 마주보는 기쁨을 끝내 알지 못한다.
엄마가 엉엉 울다니
서른하고도 중반. 혼자 여기까지 왔다고 착각하며, 마냥 가뿐하고 자유롭게만 살고 싶었던 아들이 어느 날, 엄마가 우는 것을 본다. 환갑이 멀지 않은 엄마가, 아들의 단칸방에 들렀다가 한밤중에 왈칵 눈물을 쏟은 것이다. 아들은 엄마가 왜 우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살면서 엄마가 ‘진짜’ 우는 걸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게다가 지금껏 엄마는 자신을 위해 운 적이 없었으니까. 훌쩍 커버린 자식 앞에서 훌쩍 지나가버린 자신의 인생 때문에 눈물짓는 것이리라, 막연히 짐작만 할 뿐이다.
다음 날, 그의 엄마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긍정의 표정을 하곤 집으로 돌아간다. 수화기 너머 목소리도 명랑하기만 하다. 아들은 또 짐작을 한다. 엄마는 아마 눈물을 보인 게 미안해서, 아무 일 없었다는 듯 현실의 집으로 돌아간 것이리라.
그날 이후, 아들은 문득 가끔씩 엄마가 왜 울었을까, 엄마가 좋아하는 것은 뭐더라 하는 생각에 잠긴다. 답을 얻지 못한 채 시간은 자꾸 지나고, 그는 다시 잊어버리고, 어쩌다 한 번씩 엄마의 인생에 대한 물음표를 떠올린다. 늘 그렇듯 엄마에 대한 것들은, 혹은 아버지에 대한 것들은 시간이 지나야 알게 된다. 다만 그게 조금 덜 늦었기를, 돌이킬 수 없는 것만 아니기를 바랄 뿐이다. 곧, 별 수 없게도 아들은 자신이 할 수 있는 게 많지 않다는 걸 알게 된다.
“우리는 다 컸으니 이젠 엄마의 인생을 살아요”라는 말이 엄마에게 얼마나 도움이 될까. 희생이 인생의 습관이 된 마당에 그런 돌연변이 같은 일이 일어날 리 만무하다. 아무리 ‘당신만의 인생’을 챙기라 이야기해도 엄마들은 주섬주섬 자식들에게 보낼 밑반찬부터 챙긴다. ‘이런 게 내 인생인가’ 하고는 회한에 젖다가도 다시 ‘이게 내 인생이지, 보람이지’라며 스스로를 납득시킨다.
아들에게 다행인 건 엄마가 울었다는 것이다. 마침내 그는 엄마가 좋아하는 건 ‘아들인, 나’일 것이라 믿고,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결심한다. 처음엔 엄마의 운동길, 산책길에 따라나서는 것으로 시작한다. 그저 한두 시간 가볍게 같이 걷는 것만으로도 엄마는 아들이 옆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웃는다. 고작 서너 번 길동무 노릇을 했을 뿐인데, 황송하다는 듯한 엄마의 반응에 아들은 괜히 큰일이라도 한 듯 뿌듯해진다. 기실은 엄마가 봐주는 것일 텐데 말이다. 짧은 나들이의 즐거움을 알게 된 아들은 차차 엄마와 함께 가보고 싶은 곳들을 마음에 표시가 나도록 꼭꼭 접어놓는다.
이윽고, 바보 같이 나이만 먹은 아들은, 바보 같이 자식들만 알고 살아온 엄마를 집 밖으로 불러낸다. 운전을 못한다는 핑계로, 출장길에 엄마를 기사로 대동하고 고향 마을부터 시작해 조금씩 먼 곳으로 엄마와 함께 여행을 떠난 것이다.
“내게는 참 다행한 일이 일어난 셈이었다. 엄마가 울다니. 아이처럼 엉엉 울다니. 그래서 엄마에 대해 생각하게 됐으니 기적 같은 일이다.
우선 여행을 가기로 했다. 엄마랑 같이 여행을 떠나야지. 내가 그나마 잘하는 나의 ‘일’이니까. 엄마라면 출장의 길동무로 나쁘지 않겠지.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계절마다 한 번이라도. 그도 안 되면 1년에 한 번, 단 한 시간이라도 엄마와 같이 떠나야지. 아무리 생각하고 며칠씩 고민해도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고작, 엄마랑 같이 여행을 가는 것 정도였다. 엄마에게 잠깐의 일탈을 안기는 것. 집에 가기 싫으면 집을 떠나는 것도 방법이겠지.” (본문에서)
엄마와 함께 여행을 떠나다
나이 드신 부모와의 여행은 의무로 다가온다. 못난 자식들은 모시고 챙겨드릴 것이 한 가득일 것이라 지레짐작하고, ‘다음으로’ 미루곤 한다. 자식의 시간과 돈이 늘 아까운 부모는 앞서 내키지 않는다는 듯 말하며 부담조차 지우지 않으려 하는데 말이다.
이렇게 ‘다음으로’ 미루고 또 미루는 것은 비단 여행만은 아니다. 우물쭈물하다 지나쳐버리는 삶의 비경들이 어디 한둘이던가. 그 사이로 시간은 모래처럼 빠져나간다. 엄마의 속내를, 엄마의 인생을, 엄마의 이야기를 알게 될 기회는 그만큼 줄어든다. 엄마가 진짜로 어떤 꿈을 꾸는 사람인지, 또는 소녀 시절 어떤 아이였는지 알 길은 자꾸 없어진다.
함께 산책을 하거나 여행을 한다는 것은 같이 시간을 나눈다는 것이다. 좁은 차 안에서 어깨를 나란히 하고 달리다 보면, 산으로 난 오솔길을 앞서거니 뒤서거니 걷다 보면, 입이 열린다. 평소에 하지 않던 이야기를 꺼내게 되는 것이다.
“엄마와의 산책은 첫걸음을 떼기 어려워 그렇지 내게도 제법 즐거운 일이다. 고향의 길을 밟으면 봄날의 밤기운을 맞이할 때처럼 들뜬다. 고향이라는 ‘땅’의 기운이 모락모락 피어나 코끝으로 밀려온다. 그 길을 엄마와 걷노라면 적잖은 대화가 오간다. 길의 힘이다. 아니 엄마의 힘인가? 하기야 자식과의 이야기를 싫어하는 엄마가 어디 있겠나. 그 반가움이 지나쳐 자식에게 ‘쓸데없는 잔소리’라는 핀잔을 듣기도 하고, 그마저도 기꺼움의 표시인 것을 자식인들 모르지 않지만, 부모가 자식을 대하는 ‘무조건’이란 전제 앞에 대부분의 자식은 그리도 매정하다.”(본문에서)
조곤조곤 나누는 대화에는 조금씩 마음이 투영된다. 그런 시간이 쌓이면 알게 된다. 눈앞에 있는 이가 어떤 사람인지. 지은이는 집 앞 둔치를 걸으며, 엄마의 고향을 걸으며, 멀리 제주로 여행을 떠나며 비로소 엄마라는 사람을 알게 됐다고 말한다. 엄마의 이름을 부를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말한다. 보이지 않은 곳에서 엄마가 어떻게 살아왔는지 그림을 그려볼 수 있게 된 것이다. 마음으로나마 엄마를 안아줄 수 있게 된 것이다.
“지금껏 엄마는 더 많은 것을 보고,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더 많은 세계를 거닐지 못했을 뿐이지, 어쩌면 그녀의 가슴에는 나 따위는 상상도 못할 커다란 꿈이 자라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자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헛되지만은 않을 거라는 위안이 생겼다. 나란히 걸어온 서천의 강변이, 죽령의 옛길이, 단양의 산성이, 울진의 숲길이, 엄마에게도 나에게도 무상한 시간의 이어붙이기만은 아닐 것이다. 고마웠다. 그냥 고마웠다. 같이 걸어준 엄마가 고마웠다.”(본문에서)
지은이는 여전히 1년에 대여섯 차례 고향에 내려간다. 보통의 아들과 딸 들이 고향을 찾는 횟수와 별반 다르지 않다. 엄마와의 여행도 많아야 두 달 건너 한 번씩 갔을 뿐이다. 이 여행이 마냥 착한 효자 아들이라 가능했던 것은 아니라는 뜻이다. 가벼운 동네 나들이로 시작해서, 엄마와 함께 시간을 보내며 서로의 마음을 읽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 그는 엄마란 존재가 늘 멀찌감치 서서 자신을 지켜보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문득 그 시선과 마음을 느낄 때만이라도, 똑같이 따뜻하고 다정하게 엄마를 바라보는 것이 자신에게도 지고의 행복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 짧은 여행기가 담고 있는 것은 이처럼 지극히 평범한 이야기다. 평범해서 잊기 쉬운 존재, 즉 엄마는 변함없이 당신을 기다릴 것이다. 돌아보기만 하면 그곳에 있을 테니, 함께 여행을 떠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