능청맞고 독특한 상상력, 환상적이면서도 철학적인 이야기로 프랑스 문단에서 에드거 앨런 포,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마르셀 에메의 계보를 잇는 역량 있는 작가로 평가받는 베르나르 키리니의 소설집 『육식 이야기』가 출간되었다. 벨기에 출신인 그는 2005년에 발표한 첫 소설집 『첫 문장에 대한 불안』으로 데뷔해 19세에서 30세 사이의 젊고 재능 있는 프랑스어권 작가에게 주는 보카시옹 상을 수상하며 문단의 기대를 모았다. 그리고 2008년, 독특하고 기발하면서도 깊이 있는 상상력을 가진 작가라는 인식을 확실히 심어준 두번째 소설집 『육식 이야기』로 벨기에의 공쿠르 상이라 불리는 최고의 문학상 빅토르 로셀 상과 독특한 스타일의 글을 쓰는 작가에게 주는 스틸 상을 비롯해 프랑스와 벨기에의 여러 문학상을 수상했다.
단편으로는 문학적 역량을 잘 평가하지 않는 분위기의 프랑스 문단에서 예외적으로 두 소설집만으로 평단의 대대적인 호평을 받으며 이름을 알리는 데 성공한 베르나르 키리니는 기 드 모파상과 마르셀 에메 이후 별다른 맥을 이어오지 못한 프랑스 환상문학에 큰 활력을 불어넣었다. 그의 소설은 특히 독특한 발상과 초현실적 상황, 환상적이고도 미스터리한 분위기, 철학적인 주제의식을 특징으로 한다. 또한 편지글, 일기, 회고록, 희곡 같은 등장인물들의 대사, 작은 에피소드 모음 등 그가 소설에서 사용한 다양한 묘사 방식은 읽는 즐거움을 더한다. 베르나르 키리니는 마르셀 에메와 에드거 앨런 포, 그리고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등 문단의 거장들이 선보인 다양한 매력을 솜씨 좋게 아우르면서도 쉽게 잊히지 않는 독창적인 이야기로 천부적인 이야기꾼의 면모를 여실히 내보여준다.
어긋난 세계, 잊을 수 없는 캐릭터, 이야기마다 서려 있는 광기!
「밀감」은 베르나르 키리니가 기차에서 한 여자가 오렌지 껍질을 까는 모습을 보고 구상한 작품이다. ‘나’는 요양차 들른 호텔에서 만난 남자가 오렌지주스에 피를 섞어 마시는 걸 보고, 무슨 사연이 있는지 묻는다. 그 질문에 남자는 이런 이야기를 들려준다. 오래전, 벨기에 브뤼셀 시내를 걷던 그는 거리에서 묘한 분위기의 아름다운 여인을 우연히 만나 함께 산책하고 저녁까지 먹게 된다. 그녀에게 반한 그는 자기 아파트에서 그녀와 하룻밤을 보내게 되는데, 옷을 벗겨보니 손끝과 발끝 그리고 목 위를 제외한 온몸이 오렌지 껍질로 덮여 있었다. 그가 그녀 피부의 오렌지 껍질을 벗기자 그녀는 쾌감에 황홀해하고, 그들은 사랑을 나누고 잠이 든다. 하지만 다음 날 일어나서 그녀를 본 그는 경악하고 만다. 여자의 오렌지 껍질 피부를 하나하나 벗겨내는 행위 그리고 오렌지 냄새가 가득한 방 안에서 사랑을 나누는 장면의 환상적이고 감각적인 묘사는 베르나르 키리니 소설의 특징을 잘 보여준다.
「아르헨티나 주교」는 육체와 영혼의 관계에 대한 깊은 주제의식과 미스터리한 분위기가 잘 드러난 작품이다. 남편을 잃은 한 여자가 아르헨티나의 교구청에서 주교의 침실을 청소하는 일을 맡는다. 그녀는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주교에게서 이상한 점을 발견한다. 주교의 침실에 침대가 두 개 놓여 있는 것부터 시작해서 주교의 손에 난 상처가 갑자기 없어지는가 하면, 부에노스아이레스로 출장 간 주교가 교구청 앞마당에서 벌거벗은 채 그녀와 마주치기도 한다. 여자는 궁금증에 못 이겨 주교의 방을 몰래 엿보게 된다. 그녀의 이러한 행동에 주교는 점점 더 궁지에 몰리고, 결국 여자에게 자신의 몸에 관한 비밀을 털어놓는다.
「귀 있는 자는 들을지어다」는 ‘남들은 나를 어떻게 생각할까?’라는 인간의 본능적인 궁금증에서 시작한 소설이다. 평범한 회사원 에두아르는 어느 날 갑자기 회사 상사와 사장이 자신을 험담하는 소리를 듣게 된다. 그것도 자기 집 식탁에서! 이후 자기에 대한 모든 얘기가 귀에 들려오기 시작하고, 그는 이 능력을 이용해 사람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되면서 인간관계에 회의를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그를 짝사랑하는 한 여자가 혼자 그를 향해 얘기하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한다. 그녀의 애절한 사랑 고백에 알지도 못하는 그녀와 사랑에 빠진 에두아르는 그녀가 누군지 찾기 위해 혈안이 된다.
「착각의 나라(야푸족은 어떻게 말하는가)」는 어느 야생 부족의 특이한 언어 습관을 연구하는 언어학자의 이야기이다. 야푸족의 언어는 수많은 학자들의 연구 대상이었지만, 아무도 그 언어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래서 학자들은 이 부족의 언어를 미친 언어라고 규정했다. 하지만 ‘나’는 그 언어를 연구한 끝에 이런 결론을 내렸다. 야푸어는 오해와 모호함을 전제로 한 언어이며, 야푸족은 그런 언어를 사용하며 즐거워한다고. 이런 야푸족 사회에 매력을 느낀 ‘나’는 ‘우리’라는 이름의 야푸족 여자와 결혼하기에 이른다. 어쩌면 어려울 수도 있는 ‘언어학’이라는 주제를 독특하고 재미있게 풀어나간 이 단편에서 베르나르 키리니는 언어는 사회의 공동 규칙으로 정해진 객관적이고 논리적인 것이라는 생각을 뒤집고, 모호한 언어를 사용하면서도 잘 유지되는 사회를 그림으로써 사회와 언어에 대한 관습적 사고를 꼬집는다.
「기름 바다」는 베르나르 키리니의 작품에 자주 등장하는 ‘광기 어린 캐릭터’가 인상적인 단편이다. 항구에서 수로 안내인으로 일하는 ‘나’는 낡아빠진 배를 보며 “무르익었다”고 좋아하는 한 남자를 알게 된다. 알고 보니 그는 바다에 배가 침몰하여 기름이 유출되는 것을 미학적으로 판단하고 감상하는 전문가였다. 처음에 ‘나’는 그의 이상한 감식안을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연히 기름 바다 사진을 찍어 서로 즐기며 좋아하는 이들의 모임에 참가했다 자기도 모르게 기름에 범벅이 된 바다에 조금씩 빠지게 된다. 생태학적으로는 너무나 끔찍한 사고이며 일어나서는 안 될 일이지만, 이미 일어나 어쩔 수 없을 경우에 그 사건을 미학적으로 다뤄보자는 이들의 해괴한 주장에 완전히 매료된 ‘나’는 이들과 함께 스페인에서 발생한 심각한 기름유출사고 현장을 보러 떠난다. 베르나르 키리니는 이 작품에서 보통 사람은 이해할 수 없는 아름다움에 미친 사람들을 통해 미학적 평가와 도덕적 행위의 관계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육식 이야기」에 등장하는 식물학자 라투렐은 식충식물에 매료되어 일상생활의 다른 즐거움도 모두 잊은 채 미친 듯 식충식물의 연구에만 매달린다. 어느 날 그는 희귀 식물을 연구하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우연히 보통보다 몇 배는 더 큰 거대한 파리지옥들을 발견하여 그것을 채취해 연구실로 가지고 온다. 그는 그 거대한 파리지옥에 완전히 마음을 빼앗기지만 그 파리지옥들은 라투렐이 조금이라도 가까이 갈라치면 팔이든 목이든 잡고 물어서 상처가 나기 일쑤였다. 라투렐과 파리지옥의 이런 기묘한 동거 생활을 지켜보던 조수는 점점 더 광기로 치닫는 라투렐의 행동을 견디다 못해 그를 떠난다. 그리고 몇 년 뒤 조수는 라투렐이 의문의 죽음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는다. 전반적으로 그로테스크하고 음울한 이 단편은 서간체 형식으로 쓰여 더욱 신비감을 더한다.
환상이란 일상의 틈에 갑작스레 침입하는 신비
『육식 이야기』에 실린 열네 편의 단편을 통해 베르나르 키리니는 마치 입담 좋은 재담꾼이 허무맹랑한 이야기를 짐짓 능청맞게 청중들에게 이야기하듯, 자신이 포착한 일상 속의 비현실적 틈에서 이야기의 단초를 하나하나 잡아내 그 발상을 솜씨 좋게 환상적인 이야기로 꾸려나간다. 그 이야기 속에서 등장인물들은 특히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 거대 파리지옥에 열광하는 사람, 오렌지 주스에 피를 섞어 마시는 사람, 신비한 청각 능력을 갖고 있는 사람 등 베르나르 키리니가 그리는 인물들은 어딘가 미쳐 있거나 비정상적이다. 이들은 모두 이성적이고 논리적인 세계에 사는 우리 안에 자리잡고 있지만 표출되지 못한 근원적인 파토스를 드러내고 있다. 그 억눌린 감정들이 살아 숨 쉴 수 있게 해주는 도구로 베르나르 키리니는 ‘환상’이라는 방법을 택했고, 그 때문에 이야기를 읽다보면 일상적이지 않은 데서 오는 낯선 감정과 함께 묘한 쾌감이 느껴진다.
환상이란 일상을 전제로 하면서도 우리 안의 무의식을 건드린다는 점에서 의미 있는 문학적 시도이다. 독자들에게 『육식 이야기』는 시공간을 초월해 인간 마음속 깊이 내재돼 있는 그 어둡고 기묘한 감정을 들여다볼 기회를 마련해줄 것이다.
해외 언론 서평
라틴아메리카적 난센스로 가득한,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이야기. 『육식 이야기』는 시간과 유행을 완벽하게 뛰어넘은 책이다. 한마디로 자유롭고 기교가 뛰어나며 흥미롭고 활력이 넘친다. 르 피가로
독자들은 자유롭게 하늘을 나는 듯한 베르나르 키리니의 상상력을 질투하며 왜 그보다 먼저 이런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한탄할 것이다. 확실히 그는 재능 있는 작가다. 특허를 받아도 좋을 만큼! 마가진 리테레르
『육식 이야기』는 환상적인 세계를 통해 세기말적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시간을 초월한 듯하면서도 빠른 전개로 독자들을 사로잡는 작품. 리브르 엡도
『육식 이야기』의 초현실적 시정은 마르셀 에메를, 엄정한 문체는 에드거 앨런 포를 떠올리게 한다. 리르
옮긴이 임호경
서울대학교 불어교육과와 동 대학원 불문과를 졸업한 후 파리 8대학에서 마르셀 프루스트 연구로 불문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현재 전문 번역가로 활동 중이며, 옮긴 책으로 『승자는 혼자다』 『백 년의 악몽』 『신』(5, 6권) 『밀레니엄』 『움베르토 에코 평전』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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