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초등학생 소녀 유리코는 어느 날, 모범생이던 오빠 히로키가 반 친구 두 명을 칼로 찌르고 도망쳤다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게 된다. 실종된 오빠를 애타게 찾는 가족들과 주위의 싸늘한 시선에 괴로워하던 중 오빠의 방에서 낡은 책 한 권을 발견한 그녀에게 이상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네 오빠는 영웅에 홀려버렸어.” 책들의 세계로 들어가 오빠를 구하는 여행에 나선 유리코는, 세상의 모든 이야기가 태어나고 돌아오는 신비한 장소 ‘이름 없는 땅’에서 놀라운 광경을 목격하고, 평온해 보였던 오빠의 학교생활에 숨겨진 안타까운 사연을 알게 된다.
생쥐로 변한 어린 사전 ‘아쥬’와 사악한 영웅을 쫓는 늑대 ‘애시’, 그리고 인간 시절의 죄를 갚기 위해 끝없는 노동을 계속하는 무명승 ‘소라’. 유리코는 새로운 동료와 함께 모험을 시작하고, 애시의 고향이자 히로키가 휘말려든 사건의 나라 헤이틀랜드로 옮겨가 피와 저주로 얼룩진 그 땅의 역사에 동참하게 된다. 인간의 영역을 뛰어넘는 힘과 권력을 간절히 바랐던 한 남자, 빛과 어둠을 동시에 지니고 있는 ‘영웅’의 이면. 그들은 영웅의 힘을 선한 쪽으로 되돌릴 수 있을까? 그리고 아직 유리코도 알지 못하는 이 모험의 진짜 목적은?
수천 년에 걸쳐 전해져온 책들과 그에 깃든 수많은 이야기들
그것은 씻기지 않는 인간의 죄업이었다?
『영웅의 서』의 주무대가 되는 곳이자 미야베 미유키가 창조해낸 책들의 세계 속 ‘이름 없는 땅’은, ‘모든 이야기가 태어나고 회수되는 곳’ ‘영웅의 그림자 부분을 봉인한 장소’다. 인간의 욕망과 분노로 어두운 힘을 축적하는 ‘영웅’이 오랜 봉인을 깨고 사악한 힘을 휘두르게 된 것이 이야기의 시작이며, 유리코의 오빠 히로키는 바로 그 ‘영웅’이 실체를 얻는 결정적인 순간의 희생물이 된 것. 희생자의 혈육이자 어린아이만 접근할 수 있다는 그 땅에 발을 들인 순진한 초등학생 유리코는, 소설뿐 아니라 인간에 의해 씌어지고 말해지는 모든 이야기가 죄로 취급된다는 사실에 할말을 잃는다.
“이야기는 즐거운 거예요. 아름다운 거예요. 사람을 행복하게 만드는 거라고요!”
“하지만 ‘영웅’을―그 어둡고 추악한 황의를 입은 왕을 만들어내는 것은 다름아닌 이야기입니다.”
유리코는 떨고 있었다. 추위 탓이다. 몸에 두른 담요를 세게 끌어당긴다.
“그런데 이야기란 무엇입니까? ‘인을 받은 자’여.”
유리코가 대답하기 전에 대승정은 의연한 목소리로 딱 잘라 말했다. “거짓말입니다.”
죄업의 대륜은 계속 돌아간다. 무명승들은 끊임없이 민다. 그 옆에서 유리코는 떨고 있다.
“있지도 않은 일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말한다. 기록으로 남기고 기억을 퍼뜨린다. 거짓말입니다.”
있지도 않은 세계를 만들어 내고 말한다. 그것도 거짓말이다.
그 눈으로 본 적도 없는 옛날 일을, 남겨진 기록의 단편을 이어붙여 이야기로 만든다. 그것도 거짓말이다.
“그런 거짓말이 없으면 인간은 살 수 없습니다. 인간 세상은 성립되지 않습니다. 이야기는 인간에게 필요한, 인간을 인간답게 만드는 필수적인 거짓말입니다. 하지만 거짓은 거짓. 거짓은 죄입니다.”
_본문에서
『영웅의 서』는 크게 사회파 미스터리와 모험 판타지로 나뉘는 미야베 미유키 작품세계의 각각의 장점을 두루 지니고 있다. 잃어버린 소중한 것을 되찾기 위해 모험을 떠나는 설정은 전형적인 성장소설의 플롯으로 읽히기도 하지만, 이야기의 중반에 접어들어 겉으로는 원만하고 평온한 학교생활을 보내는 듯 보이던 히로키가 왜 ‘영웅’에 매료되었는지, 그를 통해 초현실적인 힘을 얻고 싶어한 이유가 무엇이었는지 밝혀지면서부터, 학원폭력과 집단따돌림 등의 사회문제를 다루는 작가 특유의 날카롭고도 인간적인 시선이 빛을 발한다. 그리고 2권에서 본격적으로 중세 유럽을 떠올리게 하는 전형적인 판타지 세계로 무대를 옮겨, 『반지의 제왕』 등의 판타지 명작을 떠올리게 하는 박진감 넘치는 연출과 개성적인 캐릭터들로 한층 이야기의 결을 풍부하게 만든다.
인간이 지어내는 모든 이야기는 죄업이며,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즐긴 자는 영원히 그 죄를 갚는 노동을 해야 한다는 것은 작가로서 자신의 정체성까지 뒤엎는 발상이라 할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동시에 모든 종류의 ‘이야기’가 가지는 거대한 힘을 역설적으로 드러내는 것이기도 하다. 어린 시절부터 괴기소설 팬이었다는 미야베 미유키는 크툴후 신화에 등장하는 주물이자 읽는 사람을 파멸로 이끄는 무시무시한 희곡 ‘황의를 입은 왕’의 이름을 빌려와, 빛과 어두움, 선과 악을 동시에 지닌 불가사의한 존재 ‘영웅’을 책이라는 형태로 재창조해냈다. 단순한 모험담에서 벗어나 동서양을 아우르는 세계관과 철학적인 메시지를 담아낸 『영웅의 서』는 미야베 미유키의 또다른 야심작이라 봐도 좋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