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인의 평범한 일상, 소외된 존재를 다루는 ‘하찮은 사물들의 변호사’
1970년대부터 작품 활동을 시작한 빌헬름 게나치노는 편집자로 일했던 경험을 토대로 삼부작 소설 『압샤펠』 『불안의 근절』 『거짓된 세월』을 내놓으며 문단의 주목을 받았다. 일하기 싫어하는 평범한 회사원 압샤펠의 고독한 내면세계를 다룬 ‘압샤펠’ 삼부작을 통해 게나치노는 70년대의 독일 소시민 계층과 그들이 일을 통해 겪는 자기소외의 현실을 보여주었다. 1989년 발표한 소설 『얼룩, 재킷, 방, 고통』에서 게나치노는 1인칭 화자의 등장과 작은 이야기들이 서로 연결되는 새로운 형식을 시도하며 침묵하는 것, 눈에 띄지 않고 숨겨진 것, 사라져가는 것에 대해 변론했다. 게나치노의 문학 작업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는 이러한 ‘작은 사물들의 문화’는 이후 그의 작품 속에서 다양하게 형상화된다. 그는 주목받지 못하는 작은 존재들에 시선을 돌리는 관찰자, 옹호자로 ‘하찮을 정도로 작은 사물들의 변호사’라는 별칭을 얻는다. 평범하고 하찮은 일상, 반(反)영웅, 기인(奇人)이 주로 등장하는 그의 작품은 섬세하고 감각적인 묘사를 통해 내면세계와 현대사회를 비판적으로 그려낸다.
게나치노는 소설 『얼룩, 재킷, 방, 고통』으로 브레멘 시 문학상을 받은 후, 2004년 『이날을 위한 우산』으로 독일에서 가장 중요한 문학상인 게오르크 뷔히너상을 수상했다. 그 외에도 폰타네 문학상, 클라이스트 문학상 등 독일의 주요 문학상을 휩쓸었다.
때로는 유머러스하게 때로는 진지하게 삶을 긍정하는 아주 특별한 시선
『이날을 위한 우산』은 2001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독일 문학비평계를 대표하며 신랄한 비판을 주저하지 않는 마르셀 라이히라니츠키를 비롯해 많은 비평가들에게서 “경이롭고 철학적인 책” “매혹적인 소설, 가볍고 명료하다”는 극찬을 받았다.
20세기 말 독일 소시민의 일상을 잔잔히 그려낸 이 소설은 음울한 분위기를 띠면서도 그 속에는 웃음을 자아내는 익살스러움이 배어 있다. 이 소설에서는 어떤 특별한 일화나 사건이 드러나지 않는다. 등장인물들 역시 흔히 말하는 ‘성공한 인생’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다. 수제화의 착용감을 시험하기 위해 새 구두를 신고 시내를 활보하는 주인공은 스스로를 “교육만 많이 받은 아웃사이더” “현대판 거지”라 칭한다. 그의 여자친구였던 리자는 교사였으나 아이들과 함께하는 생활에 적응하지 못해 일찍 은퇴했다. 주인공의 친구인 힘멜스바흐는 사진작가를 꿈꾸었으나 목표에 도달하지 못했고 몇 년 전 주인공에게 5백 마르크를 빌려가서 아직도 갚지 않고 있으며 취직자리를 구걸하는, 그야말로 ‘루저’의 전형이다. 주인공의 새 여자친구가 되는 수잔네는 이루지 못한 배우의 꿈을 여전히 간직하며 살아간다.
이처럼 특별할 것 없는 인물들이 만들어나가는 평범하고 틀에 박힌 일상이지만, 게나치노는 주인공의 눈을 빌려 낯선 시선, 철저한 이방인의 시선으로 삶을 바라본다. 그가 바라보는 세계는 평범한 사람들, 작고 하찮은 사물들과 일상이며 암울하고 우스꽝스럽다. 민망할 만큼 세세하고 감각적인 그의 묘사를 통해 독자는 소소한 세상과 만나게 된다. 우리의 방랑자는 마치 낯설고 기이한 모습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이방인처럼 평범하면서도 진부한 작은 세계를 온몸으로 지각한다. 몸으로 하는 그의 ‘감각 산책’을 통해 독자의 눈앞에는 마치 사진첩을 보듯 일상의 모습이 조용히 펼쳐지고, 그 가운데 세상은 자신의 소소함과 기이함을 명료하게 드러낸다.
하지만 세상을 보는 주인공의 시선이 그저 회의적이지만은 않다. 그의 시선에는 평범한 삶에 대한 긍정이 담겨 있다. 소용돌이치는 삶 속에 몸이 휘감기고 내동댕이쳐진 채 살아가는 존재들과 우스꽝스럽기까지 한 삶의 단면을 통해 독자는 우울하고 염세적인 기분에 빠져들기보다는 오히려 삶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감을 느끼며, 그래도 산다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라고 긍정하는 힘을 갖게 된다. 『이날을 위한 우산』은 고통으로 가득 찬 먼지투성이의 삶을 묵묵히 몸으로 견뎌내는 사람들, “자신의 삶이 하염없이 비만 내리는 날일 뿐이고, 자신의 육체는 이런 날을 위한 우산일 뿐이라고 느끼는 그런 사람들”을 위한 책이다.
이 책에 쏟아진 찬사
빌헬름 게나치노는 시대를 주의 깊게 관찰하면서 섬세하고 고집스럽게, 그리고 아름다운 음악과 같은 산문을 통해 눈에 띄지 않는 개개인의 일상에 우리 시대를 비춘다. _게오르크 뷔히너상 선정 이유
자기 내면의 동의 없이 이 지상에서 살아가는 존재의 고뇌를 유머러스하게 그린 작품. _노이에 취르허 차이퉁
『이날을 위한 우산』은 삶에 대한 회의와 우울을 경쾌하게 그려낸다. 삶에 대한 깊은 이해가 녹아 있고 반어적이며 탁월한 언어의 기교를 보여준다. _알게마이네 차이퉁
줄거리
마흔여섯 살의 주인공은 한 번도 탄탄하고 안정된 직업을 갖지 못한 채 짬짬이 구두 테스터 일을 한다. 고급 수제화를 신어본 다음 평가서를 작성해 구두 한 켤레당 소정의 돈을 받는 것이다. 스스로를 ‘교육만 많이 받은 아웃사이더’라고 말하는 그는 새 구두를 신고 그저 도심을 걸어다니며 유년 시절의 친구들을 만나 상념에 잠기기도 하고 사람들과 갖가지 사물, 일상의 모습을 세밀하게 관찰하며 내면의 동의 없이 존재하는 자신의 삶에 대해 성찰해간다. 구두 테스터 일에서 즐거움을 찾고 그 속에서 편안함을 느끼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여자친구와의 이별을 겪고, 자신이 유일하게 지속적으로 잘해왔던 직업을 잃을 위기에 직면하는데……
본문 발췌
내 생각엔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잊지 못하는 것은 함께한 경험 때문이 아니라, 그 사람들을 마지막으로 보고 나서 오랜 시간이 흐른 후에야 비로소 우리의 머릿속에 선명히 떠오르는 세부적인 신체 부위들 때문이다. _ 본문 11쪽
내 교육 수준으로 보자면 나는 중요한 사람일 수 있고 내 지위를 보자면 그렇지 않은 것이다. 진짜로 중요한 사람들이란 오직 자신들의 학식과 지위를 삶 속에서 서로 융화시켜나갈 수 있는 사람들이다. 단지 교육만 많이 받은 나 같은 아웃사이더들은 어디에 몸을 숨겨야 할지 아무도 말해주지 않는 현대판 거지에 불과하다. _본문 84쪽
갑자기 난 내가 기본적으로 늘 품고 있는 어떤 느낌 속으로 빠져든다. 나 자신이 항상 제자리를 잡지 못하고 어정쩡하게 살아가고 있고, 그 때문에 마치 실수로 살아가는 듯한 느낌 말이다. 그때 부드러운 수잔네의 육체가 내게 어린아이가 갖는 신뢰를 느끼게 한다. 실수로 살아간다는 느낌은 제어가 되지 않는 탓에 굴욕적인 작은 실패에 대한 생각으로 바뀐다. 그러한 느낌도 내게는 친숙하다. 난 실패 속에서 계속 살아가는 것에 익숙해져 있다. 한동안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그리고 어떻게 거기서 벗어날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난 삶을 계속 이어간다. _본문 158쪽
◈ 발행일: 2010년 12월 10일
◈ 쪽수: 208쪽
◈ 판형: 140*210 (무선)
◈ 가격: 9,000원 (무선)
◈ ISBN: 978-89-546-1311-8 04850 (무선) | 978-89-546-0901-2 (무선 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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