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 길이 떠올랐다』 『구석』 등의 시집으로 전통적인 서정의 힘을 보여주었던 정윤천 시인이 사 년 만에 시화집 『십만 년의 사랑―마흔한 편의 사랑노래와 한 닢의 편지』를 선보인다. 일상의 풍경에서 시를 길어올리는 시인의 섬세함은, 그 서정의 풍경을 화폭에 담아내는 화가 한희원의 그림 열네 점과 함께 더욱더 특별한 빛을 발한다. 총 4부로 구성된 이번 시화집은 주로 사랑에 대한 이야기로, 고독과 그리움이 그 주된 정조이다. 시인은 입말을 그대로 살린 구성진 언어로 사랑의 진풍경을 우리 앞에 펼쳐보인다.
너에게로 닿기까지 십만 년이 걸렸다
십만 년의 해가 오르고
십만 년의 달이 이울고
십만 년의 강물이 흘러갔다
사람의 손과 머리를 빌어서는
아무래도 잘 헤아려지지 않을 지독한
고독의 시간
십만 년의 노을이 스러져야 했다 _「십만 년의 사랑」 중에서
사랑의 진풍경을 보여주고자 하는 진득함
그리워하고 기억하는 마음이 남아 있다면 “멀리 있어도 사랑이다”라고 이야기했던 시인은, 사랑이라 이름 붙일 수 있는 모든 것들을 불러와 그 사랑의 풍경을 되살려낸다.
나는 우선 여기에 당신의 목소리를 멀리서도 알아차리는 내 귀의 엄연한 위치와 그것의 운명에 대하여 사랑이라는 이름을 붙이기로 하고, 또 그걸 애써 받아적고는 하였던 오래된 습벽을 시詩라고 호명하기로 한다. _‘自序’에서
여기 한 쌍의 거미가 있다. 암거미가 수거미의 배 위로 올라타 교미를 한다. 교미가 끝나면 암거미는 수거미의 배를 집게발로 헤집어 구멍을 낸 뒤 그 속에다 산란을 한다. 시인은 “사억 년을 이어온 사랑의 방정식”(「고수의 사랑」)인 이 풍경이 어쩌면 “사랑의 진풍경일지” 모른다고 말한다. “함부로는, 썩 엄두가 나지 않는 그런 일”이기 때문에 ‘고수의 사랑’인 것이다. 한편, 이런 풍경도 있다. 접시에 두 쪽으로 갈라놓은 사과가 있다. “잠시 떨어져 있어야만 하는 서로의 사이를/떠올리게 해주던 사과”(「사과를 깎았던 저녁」) 한 조각을 먹고 나니 접시에는 나머지 한 조각이 남게 된다. 한 조각만 남아 있는 사과는 이내 “너를 보내놓고 혼자서만 돌아왔던 저녁”의 풍경을 불러온다. 이 또한 사랑이다. 사랑은 이렇듯 시시각각 모습을 달리하여 시인의 예민한 눈과 귀를 더욱더 깊어지게 한다. 이번 시집에서 시인은 깊어진 감각으로 마주한 “사랑의 진풍경”을 진득하게 풀어놓고 있다.
지구는 추운 별이어서
멀리 있는 당신에게 편지를 쓰게 한다…
시 속의 ‘당신’ 혹은 ‘너’는, 풍경이자 이름 붙일 수 없는 어떤 감정이며 일 초인 동시에 십만 년도 될 수 있는 존재이다. 이 ‘마흔한 편의 사랑노래와 한 닢의 편지’는 세계 안의 존재인 동시에 세계 그 자체인 ‘너’에게 쓰는 한 편의 연서이다.
새들도 편지를 쓰네. 허공의 빈칸 위에 콕콕 찍어서, 어딘지 조금은 화들짝스러워 보이는 새들의 글씨. 그렇게 짐작이라도 해보면, 사랑의 독백 몇 마디 스미어 있을 것도 같았네. 무리를 지어 먼 곳을 함께 나는 그들도 결정적인 순간 앞으로, 새들도 한번씩은 외로워져버리는지. 가야 할 곳의 주소를 일러주지 않은 채 새들은 떠나가지만,
얼마든지 기꺼웠을 허공의 문자만으로, 어디선가 그것을 받아 읽어내는 까마득한 수신지가 있었다는 것처럼. _「새들의 문자 같은」 전문
수신지는 까마득하더라도, 아무리 기다려도 너는 오지 않아 “너로 인해 나는/없어”(「나는 없다는」)지더라도, “지구는 추운 별이어서”(「지구는 추운 별이어서」) “까마득한 수신지”로 편지를 쓰게 한다. 시인이 부르는 이 간절한 서정의 힘으로, 편지는 “당신의 역 앞에 무사히 도착해 있”(「그리고 한 닢의 편지」)을 것이다. 그리움과 고독의 힘으로 솟아오르는 그의 시는, 쉽게 지나쳤을 풍경을 되살려 사랑이라 이름 붙이고 그 따뜻한 황홀을 우리에게 건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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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리 있어도 사랑이다”라며 사랑의 방랑자를 자처하던 정윤천 시인이 마침내 로맨티스트가 되어 돌아왔다. 오래고 먼 것들의 지척을 지나 미지의 기미를 어루만지는 사랑의 가객이 되어, “너를 한눈에 알아보고 나면” 사랑은 삼천 년 전에도 “삼천포”라 하는가. 그곳에서 이미 나는 너이고, 일 초는 그렇게 십만 년을 거슬러 도착을 거듭하였다. “한번은 소나기”로 “한번은 무지개”로도, 그러므로 연모는 역모이자 토악질마저 안간힘의 물기였어라. 문득 “경첩” 속의 쇠나비 한 마리가 “산수유, 화염나비떼” 되어 날아오르면, “너에게로 영원히 건네지려” 하는 나! 이 시집을 진정 ‘목숨에 빚을 져도’ 좋을 “사랑의 방정식”이라 외워도 가슴이 마냥 벅차오를 것 같았다. _정끝별(시인, 명지대 교수)
「십만 년의 사랑」에서 나는 재 낭송, 또 재 낭송, 십만 년 동안 재 낭송해도 모자랄 사랑의 영원을 자욱하게 느낀다. 보라색 사랑이 무지개 속에 들어가 천변만화의 꽃을 피웠다. “여기까지 오는 데 십만 년이 걸렸다 (……) 한번은 소나기로 태어났다가/한번은 무지개로 저물기도 하였으리라” 이후로도 십만 년 동안 재 낭송될 시의 소재는 역시 사랑이겠다. _임의진(시인, 목사)
* 초판발행 | 2011년 1월 15일
* 125*175 | 136쪽 | 값 9,000원
* ISBN 978-89-546-1377-4 03810
* 책임편집 | 조연주 박지영 (031-955-8865, 886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