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의 산문시집 『들풀』을 중국의 대표 판화가 자오옌녠의 사실주의적 판화와 이욱연 교수의 맛깔스러운 번역으로 만난다. 자오옌녠은 판화라는 새로운 표현 형식을 통해 꾸준히 루쉰의 작품을 새롭게 해석하고 형상화해왔다. 그는 중국 판화계에서 루쉰 작품을 가장 깊이 있게 연구한 작가로 특히 목각에서 가장 탁월한 예술적 성취를 거둔 것으로 평가받는데, “궁극의 목각은 흑백을 정통으로 삼는다”는 루쉰의 명언에 따라 작품 대부분을 흑백 목각으로 제작하며 중국 흑백판화 분야에서 선두 역할을 해왔다. 그는 ‘중국 근대문학의 기적’이라 불리는 중국 근대문학사 최초의 산문시집이자 중국사회에 대한 예리한 통찰과 철저한 자기반성을 통한 루쉰의 인생철학을 보여주는 『들풀』에 매우 감각적이면서도 글의 핵심을 관통하는 예술성 높은 판화를 그려 넣었다.
『들풀』은 중국 인민문학출판사가 자오옌녠의 판화를 넣어 출간한 루쉰 작품집을 번역 저본으로 삼았다. 앞으로 이 작품집에 포함된 『아Q정전』과 『광인일기』 『새로 쓴 옛이야기』, 그리고 자오옌녠이 직접 이 네 권에 수록된 판화에 대한 예술적 구상과 목각 기법을 설명한 『루쉰 작품 도감』을 추가로 펴낼 예정이다.
중국 근대문학사 최초의 산문시집 『들풀』
루쉰의 작품 중 가장 완성도가 높다고 평가받는 『들풀』은 당시(唐詩) 이래 중국 전통시의 운율 전통과 프랑스 상징주의를 동시에 수용해 인생과 현실에 대한 근본적 사색과 통찰을 간접적이고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래서 작가의 정신세계를 소설보다 더욱 응축해 드러낸다는 점에서 루쉰을 이해하기 위한 필독서로 여겨지기도 한다.
이 작품을 쓸 당시 루쉰은 중국 현실과 복잡한 개인사의 이유로 위기이자 기로에 서 있었다. 삶과 죽음, 희망과 절망, 빛과 어둠 같은 대립하는 단어들이 자주 등장해 긴장을 형성하는 것도 루쉰의 이러한 상황을 반영한 것이라 볼 수 있다. 또한 현실의 첨예한 문제를 주로 다루던 루쉰이 「죽은 불꽃」 「잃어버린 좋은 지옥」 등 사후세계나 지옥 같은 상상의 세계와 환상을 소재로 한 글을 많이 쓴 이유이기도 하다. 여기에서 루쉰은 고뇌하고 방황하고 스스로를 되돌아보는 내용을 환상과 상징의 수법, 낯선 언어를 통해 표현했다.
『들풀』에는 중국을 변혁하기 위해서는 잠들어 있는 민중의 활력을 일깨우고, 마비된 민중을 참다운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는 루쉰의 지론을 우화 형식으로 담은 글도 여럿 있다. 민중의 불행한 처지를 안타까워하면서도 그들의 노예근성은 가차 없이 비판한 「총명한 사람과 바보 그리고 노예」나 중국 민중이 구경꾼이 아닌 무대의 주역으로 나설 때 변혁이 가능하다고 역설한 「복수」 등의 글이 그것이다.
『들풀』은 이렇듯 당대 중국 현실을 두고 루쉰 내면에서 일어난 고뇌와 상처의 흔적, 그리고 루쉰이 끊임없이 천착해온 중국사회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감 없이 보여준다. 루쉰은 자신이 어떤 때는 개인주의자가 되고 어떤 때는 휴머니스트가 되는 모순된 면을 가지고 있다고 술회한 바 있는데, 『들풀』에 실린 글들은 희망 없는 현실에서 싸우고 고민하던 루쉰의 그런 양면성을 확인하게 해준다. 이렇듯 루쉰이 기존에 펼쳐온 문화운동으로서의 문학과 큰 차이를 보이는 『들풀』은 일면 독자들에게 낯설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그러나 루쉰의 삶과 정신세계를 좀더 깊이 들여다보는 데 있어 『들풀』은 빼놓을 수 없는 주요한 작품이다.
추천사
중국 현대문학 작품 중 지금까지 『들풀』을 뛰어넘는 작품은 없었다. 쑨위스(베이징대 중문과 교수)
그린이 자오옌녠(趙延年)
중국의 대표적 판화가. 1924년 저장 성 후저우(湖州)에서 태어났다. 1938년 상하이미술전문학교에 입학해 조각을 배웠고, 광둥성립전시예술관(廣東省立戰時藝術館)(광둥성예술전문학교 전신) 미술과를 졸업했다. 편집자이자 작가로 저장성 미술학교 교수를 역임했고, 현재 중국미술학원 교수, 중국판화가협회 고문, 저장성미술가협회 고문, 저장성판화가협회 명예회장 등을 맡고 있다. 1991년에 중국미술가협회와 중국판화가협회에서 시상하는 ‘중국신흥판화걸출공헌상(中國新興版畵傑出貢獻賞)’을 수상하기도 했다. 작품으로 <나무를 진 사람(負木子)>, <루쉰 선생(魯迅先生)> 등이 있고, 『자오옌녠 판화선집』을 출간했다.
옮긴이 이욱연
고려대 중문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했고, 현재 서강대 중국문화전공 교수이다. 논문으로 「노신의 소설 창작과 기억의 서사」 등이 있고, 저서로 『중국이 내게 말을 걸다—이욱연의 중국문화기행』 『포스트 사회주의 시대의 중국문화』가, 옮긴 책으로 『아침 꽃을 저녁에 줍다—루쉰 산문선집』 『인생은 고달파』 등이 있다.
* 담당편집 : 류현영(031-955-8858, sanja95@munhak.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