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르트르, 카뮈의 작품에 앞서 실존주의 경향을 보여준 작품
1900년에 태어나 1998년에 사망한 쥘리앵 그린은 20세기 전체를 가로지르며 격변의 시대를 살았다. 문학을 비롯하여 많은 문화 영역에서 지난 세기의 가장 큰 화두를 실존주의적 사유와 현실 참여라고 한다면, 쥘리앵 그린의 삶에서는 다른 작가들에게서 볼 수 있는 현실 문제에 대한 치열한 대응이 드러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시대의 흐름에서 한 발 물러나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현대의 가장 첨예한 문제에 대한 날카로운 인식과 그에 대한 성찰의 결과를 작품화한 작가이다. 가장 20세기적인 주제라고 할 수 있는 비극적 실존 앞에서 고뇌하는 인간의 모습이 그의 작품 전체를 관통하는 것이다.
쥘리앵 그린의 삶을 지배했던 두 가지는 바로 종교와 글쓰기이다. 20대 초반에 중편소설을 쓰기 시작해 많은 소설과 희곡을 집필한 그린은 26세부터 사망 직전까지 거의 1년에 한 권씩 저서를 선보였고, 청년 시절부터 써온 일기로 16권의 일기 모음집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의 작품은 주로 인간 운명의 나약함과 신을 통한 인간의 구원이라는 종교적 주제를 다루었는데, 1932년에 발표한 『잔해』는 그린이 한동안 종교 생활과 멀어져 있을 때 집필한 작품으로, 다른 작품과는 달리 종교적 색채가 거의 드러나지 않는다. 초기 3부작이자 그린의 대표작으로 평가받는 『몽시네르』 『아드리엔 므쥐라』 『레비아탕』에서 나타나는, 억압받는 현실에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주인공의 모습과 대조적으로 『잔해』의 주인공인 필리프는 현실의 권태로움을 온몸으로 자각하는 무기력하고 소심한 부르주아의 모습으로 그려진다. 필리프는 자신의 삶을 비롯하여 모든 것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드러내고 현실과 유리되어 떠돌아다니는 ‘이방인’이자 ‘잔해’이다. 이는 사르트르의 『구토』나 카뮈의 『이방인』의 주인공이 보이는 삶의 태도와 비슷한 양상이다. 존재의 무상함과 인간의 실존 문제를 다루었다는 점에서 『잔해』는 쥘리앵 그린의 문학에서 하나의 전환점을 이루며, 사르트르, 카뮈의 작품에 앞서 실존주의 경향을 보인다는 평가를 받는다.
세상의 언저리를 맴도는 ‘인간 잔해’의 자아 찾기
쥘리앵 그린은 작품을 쓰기 시작한 1929년 어느 날의 일기에 『잔해』에 대해 ‘우리 시대의 파리에서 밤의 모험을 찾는 사람의 이야기’라고 설명했다. 소설은 필리프라는 서른한 살의 남자가 어느 날 밤 파리의 센 강변을 산책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그곳에서 우연히 살인 장면을 목격한 필리프는 아무런 행동도 취하지 못한 자신의 비겁함을 인식하고 삶 전체를 돌아보게 된다.
필리프는 그 자신이 부르주아이며 부르주아의 도시인 파리에 살면서도 그 세계에 참여하기를 거부하고, 습관에 갇혀 무관심하고 냉담한 태도로 살아가는 인물이다. 무기력하고 권태로운 삶이 이미 일상화되었기 때문에 그는 그런 삶에서 벗어나려는 욕망도 갖지 못한다. 가정과 사회, 어느 곳에서도 자신의 자리를 찾지 못하고 세상의 언저리를 떠도는 ‘인간 잔해’인 그는 센 강변에서 살인 장면을 목격한 이후 변화를 겪게 된다.
자신의 내부에 잠재한 비겁한 본능과 무기력함을 인식한 필리프는 극심한 내면의 고통 속에서 존재의 고독과 끊임없이 반복되는 인간 운명의 무상함을 느끼게 된다. 강박관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는 정화의 매개체를 찾아 나서는데, 작품 전체를 가로질러 흐르는 센 강이 그 역할을 한다. 센 강은 필리프의 의식에서 계속 모호한 양상으로 드러나지만, 마지막에 이르러 필리프의 상징적 재생을 돕는 기제가 된다. 결국 센 강을 따라가는 필리프의 여정은 고독한 운명 속에서 진정한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과정이다.
관련 서평
우리는 카뮈의 소설 근원에 『잔해』의 직접적인 영향이 없었는지 자문하게 된다. _브라이언 피치(작가)
『잔해』는 이른바 실존주의 소설과 기본 인식을 공유한다고 할 수 있다. 실존주의 소설의 주인공들은 자신의 삶에 대해 무관심한 태도를 드러낸다. 『구토』의 로캉탱이 그렇고, 『이방인』의 뫼르소가 그렇다. 이 작품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실존주의 소설로 간주하는 사르트르나 카뮈의 작품에 앞서 실존주의의 중요한 경향을 미리 보여준다. _김종우(옮긴이)
줄거리
소심하고 무기력한 부르주아 필리프는 어두운 밤 센 강을 산책하다가 철교 밑에서 한 쌍의 남녀가 다투는 모습을 우연히 관찰한다. 여자의 다급한 구조 요청을 듣고도 그냥 지나쳐버린 필리프는 자신의 비겁함과 무기력함을 새삼 발견하게 된다.
그는 부부이지만 남남처럼 지내면서 매주 가난한 정부(情夫)를 찾아가는 아내 앙리에트, 자신을 짝사랑하는 처형 엘리안과 삼각관계를 형성하며 한집에 살고, 앙리에트와의 사이에서 태어났지만 도저히 정을 붙일 수 없었던 아들은 멀리 기숙학교에서 생활한다.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재산을 물려받고 광산회사의 대표 자리에 있으면서도 아무런 의욕을 느끼지 못하고 그저 모든 것이 권태롭다고만 생각한다. 가정에도, 사회생활에도 발을 붙이지 못하고 현실의 언저리만을 떠돌던 필리프에게 센 강에서 자신이 그냥 지나쳐버린 사건은 무거운 마음의 짐이 되었고, 이를 계기로 삶 전체를 돌아보게 되는데……
본문 발췌
자기 자신에게도 이방인으로 남아 있는 판국에 도대체 어떻게 혼자가 아니기를 바랄 수 있겠는가? 존재 이유를 알 수 없는 이 세상에서 각자는 자신이 영원히 알지 못할 비밀스러운 운명을 맹목적으로 따라간다. _본문 57~58쪽
로베르와 둘만 남게 되자, 필리프는 책장의 유리문 앞에서 서성거리면서 곁눈질로 아이를 힐끔거렸다. 아들과 함께 있는 것이 거북해서 그는 평소와 같이 자연스럽게 행동하지 못했다. 불현듯 자신이 아버지 역할을 연기하려 하면서도 잘 소화해내지 못하는 초라한 배우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_본문 132쪽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 강이 그의 온 인생을 끌어당겼다. 센 강을 따라 산책하는 동안 필리프는 때때로 강이 자신에게 말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가 그토록 자주 오는 것을 본 강이 결국 자신의 비밀을 들어주고 있다는 덧없는 생각이 들었다. _본문 35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