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게 삶이든 죽음이든 집으로 돌아가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귀가도』에는 모두 여섯 편의 소설이 담겨 있다. 그중 ‘귀가도’라는 동명 제목으로 세 편의 단편이 연작으로 묶여 있는데 「철학잉어」, 「도시철도 999」, 「아직은 밤」이 그것이다. 이들 모두 수조라는 사각의 물 안, 지하철, 버스라는 굴레 속에 갇혀 사는 우리들의 삶을 대변하고 있는바, 그럼에도 매일매일 인생이라는 행로에서 저마다의 ‘집’을 향해 가는 우리들의 귀갓길, 그 귀가 풍경을 소소하면서도 예사롭지 않게 그려내고 있다.
‘귀가도’의 ‘도’를 ‘圖’로 달아놓은 것은 그것이 길이 되었든 풍경이 되었든 우리 사는 모습의 보임, 그 그림이 곧 인생사이기 때문이다. 윤영수 소설의 기본 미덕은 이렇듯 그림처럼, “3인칭 시점에서든 1인칭 시점에서든 작가가 사건이나 인물에 대한 관찰자의 위치를 좀처럼 벗어나지 않는 데 있다. 그녀의 소설들이 우리에게 단정하면서도 어떤 고전적인 품격을 느끼게 한다면 그것은 아마도 서사의 흐름을 직조해나가는 작가의 섬세한 균형감각과 절제의 태도에 힘입은 바 클 것이다.”(박혜경)
다시 말해 윤영수의 소설은 우리에게 어떤 가르침이 아니라 어떤 가리킴이다. 소설 속 사건과 인물에 대해 따뜻하면서도 날카롭게 묘사해놓을 뿐 그 이상의 그 이하의 감정적인 혹은 단정적인 여지를 남기지 않는다. 때문에 판단의 몫은, 결론의 몫은 모두 독자의 것이 된다. 그러나 산다는 게 뭔지, 그 누가 정답을 찾을 수 있을까. 다만 우리는 우리가 믿는 정답을 향해 살아있음으로, 살아감으로 실마리를 찾아 몸으로 밀 뿐.
“차가 흔들릴 때마다 약속이나 한 듯 같은 방향으로 고개를 끄덕거린다.
밤잠을 잤는데도 전철만 타면 왜 이렇게 졸리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윤영수 소설의 장점이라 할 수 있는 읽기의 재미, 그 이야기의 힘은 이번 소설집에서도 오롯하게 발휘된다. 「떠나지 말아요, 오동나무」, 「바닷속의 거대한 산맥」도 그렇거니와 특히 「문단속을 제대로 하지 않으면」과 같은 경우 ‘유순봉’이라는 인물과 ‘기천웅’이라는 인물의 묘한 대비와 맞물려 읽는 데 그 탄력을 더하고 있다.
이쯤에서 생각하게 된다. 윤영수의 소설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왜 그토록 하나같이 선명하게 기억되는가, 하고 말이다. 그들은 모자람도 없고 넘침도 없이 아주 평범하다. 사실 평범하다는 것이 따지고 보면 얼마나 어려운 정의인가. 그들은 멀리 있지 않다. 그들은 나이기도 하고 너이기도 한 우리들이다. 우리들 한 사람 한 사람을 떠올려보면 누구 하나 쉽거나 편하지가 않다. 사실 만만하다는 것 또한 얼마나 어려운 정의인가.
흔히 윤영수의 소설을 ‘착하다’라고 쉽게 단정 짓고는 해왔다. ‘착한 사람 문성현’이라는 소설의 제목이 너무 크게 어필한 바도 있겠으나 사실 착하다는 것의 기준을 어디에서부터 어떻게 잡아야 하는지 확실하게 답해줄 이는 아마도 없을 것이다. 부당한 폭력성을 드러내는 기천웅은 그렇다면 못됐나. 그의 폭력을 그저 받아들이기만 하는 유순봉은 그렇다면 착한가. “선은 세계를 좋게 만든다고 주장하지 않는 한에서만 선이다.” 라는 바디우의 말을 주목하게 되는 연유가 그래서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늘 착하지만은 않다는 것이고, 우리가 늘 못되기만 한 것은 아니라는 거다. 우리는 그 사이에서 늘 요동치고 반동한다. 우리는 때론 착하고 때론 못됐다. 그래서 사람이다.
“서로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다만 곁에 있어주기.
그 덕에 산은 산맥이 되어 세월을 버틴다.”
그럼에도 윤영수의 소설에서 발견할 수 있는 희망은 어쨌거나 우리는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일 테다. 타인에게 서로의 등을 내밀어 함께 고통과 체온을 나누는 공존의 윤리를 지키자는 것일 테다. 그것의 다른 이름이 무얼까. 바로 사랑이 아닐까. 이 책을 덮고 났을 때 뭔지 모를 애틋함으로 나와 내 가족과 내 이웃을 돌아보게 된다면, 그것이 곧 사랑의 실천일 게다. 사랑은 앞서 끌어주기 이전에 함께 발을 맞춰 걸어주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