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의 모든 가능성이 여기에 있다!
『방울져 떨어지는 시계들의 파문』에서는 전작 『센티멘털』에서 시도된 바 있는 언어적 실험이 한층 심화된 모습으로 나타난다. 초현실적인 이미지의 표제는 첫 작품「백주白晝」의 한 구절을 따온 것인데, 그의 작품에서 꾸준히 보이는 ‘시간’에 대한 집요한 천착과 하나하나의 배열까지도 치밀하게 의도된 말의 조각들, 토막난 언어가 가진 유기체적 호흡을 만나볼 수 있다. 실험성이 돋보이는 파격적인 프레임을 보여주는 「갇힌 소년」은 앞에서부터 읽어도 뒤에서부터 읽어도 같은 문장이 이어지는 데칼코마니 형식의 특이한 구조가 눈길을 끈다. 「빈사의 오후와 파도치는 물가의 어린 형제」는 각각 독립된 두 편의 단편이 마지막 문장을 통해 교묘하게 수렴하며 서로를 보완하는 독특한 구조의 작품. 이외에도 도시 일상의 에피소드를 담은 「볼거리」, 소년의 죽음이라는 같은 소재를 다섯 편의 이야기로 배열한 「les petites Passions」, 고골리를 연상시키는 인상적인 엽편(葉篇)「재채기」등의 작품들을 통해 작가가 숨겨놓은 역설의 의미를 찾는 짤막한 즐거움을 경험할 수 있다.
「<바벨의 컴퓨터>」는 보르헤스의 단편 「바벨의 도서관」을 모티프로 한 예술작품 <바벨의 컴퓨터>에 대해 씌어진 메타픽션. 독특한 발상과 철학적인 서술로 발표 당시 화제를 불러모았던 작품이다. 화자는 도서관을 알파벳으로 가능한 모든 조합이 나열된 거대한 한 권의 책으로 보는 보르헤스의 관점에는 치명적 결함이 있다며, “컴퓨터는 모든 ‘씌어지지 않는 말’을 구제하고 기록한다”고 말한다. 사실 ‘책’이란 ‘씌어질 수 있는 말’의 아주 특수한 하나의 형태에 지나지 않는다. <바벨의 컴퓨터>가 구현하려는 이상은, 완성되지 않은 문자들과 의미가 없는 단어들을 자르고 붙여 쏟아내는 언어 과잉의 시대에 ‘소설은 어떤 모습으로 가능할 것인가’라는 작가의 영원한 테마와도 일치하는 부분이 아닐까.
현실과 환상 사이, 모호한 하이퍼리얼리티의 세계
파격과 품격이 공존하는 21세기형 소설의 새로운 도전
아홉 편 모두 현대 일본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이번 단편집에서는 보다 현실적인 주제로 작가의 시선이 옮겨갔음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히키코모리’라는 일본 특유의 병리적 사회현상을 다룬「최후의 변신」이 눈길을 끈다. 지극히 정상적인, 오히려 엘리트에 가까운 성격의 한 평범한 회사원 남자가 갑작스러운 계기로 방 안에 틀어박히게 된 후 폐쇄적인 인터넷 공간에 써내려간 수기의 형식을 취한 이 작품에서는, 카프카 문학세계를 관통하는 ‘역할’이라는 주제를 21세기로 끌어와 사회현상에 적용시킨 작가의 성숙한 시선이 엿보인다. 주인공의 상황은 프란츠 카프카의 소설 「변신」의 주인공 그레고르 잠자와 놀랍도록 겹쳐지는데, 작가는 소설 속의 상황을 ‘그’와 대비시켜 그가 자신의 ‘역할’을 변경할 수밖에 없었던 원인을 심리적, 사회적인 층위에서 심도 있게 접근한다. 이어서 현대 젊은이들이 지니고 있는 병리적 현상이 어쩌면 거대한 공통의 ‘적(敵)’이 부재하는 사회에서 진짜 자신을 은폐하며 수없이 많은 역할들을 감당해야 하기 때문이 아닌지를 묻는다. 아이로니컬하게도 잠자가 벌레로 변했을 때야 그로테스크한 사회의 거대한 본질을 알게 되듯, 그들 역시 자신들의 방 안에 틀어박혀 지적 자살을 감행한 후에야 인터넷이라는 비대한 자의식의 세계를 만나게 되는 것이다. 물질문명과 사회적 규제 속에서 자라난 현대인이 필연적으로 지니게 되는 일종의 성장 콤플렉스와, 가상현실 속에서 분열하는 자아의 정체를 파헤치는 특유의 날카로운 심리 묘사도 돋보인다.
이 단편집에서 가장 전통적인 소설 작법을 선보이고 있는「칠일재」는, 임종의 순간부터 부고, 납관, 화장으로 이어지는 장례 절차 속에서 죽음을 현실로 대하는 상주의 내면을 담담하게 그려내고 있다. 전형적인 일본 가정의 장남으로 묵묵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며 살아온 고조,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신 다음날 밤 집 안에 갑자기 고양이 한 마리가 든다. 심약한 고모는 밤새 고양이 울음소리를 들었다며 몸서리를 치지만 정작 어디에서도 고양이의 모습은 찾을 수 없다. 그는 분향하는 내내 죽은 이에 대한 기억에 잠겨든 채, 2차대전 때 버마로 출정했다 살아 돌아온 아버지의 ‘여생’에 대해 생각한다. 고조는 처음으로 죽음을 그토록 가까이 대하며, 아버지의 침묵을 이미 죽은 자의 삶으로 이해하게 되는데…… 「칠일재」에서 흐르는 시간 속의 밤은 차고 이지러지는 달의 모호함, 예측할 수 있는 불안을 닮아 있다. 고양이가 가지는 영묘한 이미지를 빌려 펼쳐지는 기억과 꿈, 죽음을 둘러싼 신비롭고도 긴박한 호흡이, 동시대 작가들을 압도하는 히라노 게이치로 고유의 문체미학을 보여준다.
『일식』 『달』 『장송』으로 대표되는 초기 3부작에서 거대한 과거의 시간을 탐색하던 작가의 시선은 서서히 현대로 옮겨와 이윽고 개인의 문제에서 테크놀로지와 문명사회에 대한 성찰로 이어지고 있다. 전위적이고도 밀도 있는 형식적 모험, 일견 고전적으로 느껴지는 ‘시간’이라는 주제에 천착하는 작가의 다음 행보가 21세기형 소설의 어떤 가능성을 제시할지 지켜보아도 좋을 것이다. 최근 한국일보(2008. 1. 30)를 통해 대산대학문학상 수상자들과 대담을 가지기도 한 그는 올 가을 서울에서 열리는 제1회 한중일 동아시아문학포럼에 일본 측 조직위원으로 방한할 예정이다.
『일식』은 좋아하지만 『센티멘털』은 별로였다는 사람, 혹은 그 반대인 사람, 다시 한번 『달』 같은 소설을 읽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사람, 『일식』을 중간까지 읽다 만 사람, 그리고 아직 한 번도 제 작품을 읽어본 적이 없는 사람…… 그런 모든 독자들에게, 이 작품집은 히라노 게이치로라는 작가가 ‘대체 무엇을 하려 하는지’를 보다 구체적으로 밝혀주지 않을까 합니다.
―작가 홈페이지www.k-hirano.com에서
작가의 전략적 의도하에 씌어지고 배열된 단편 전체가 언어 예술로서의 문학의 가능성을 새로운 각도에서 보여주고 있다는 점에서, 『방울져 떨어지는 시계들의 파문』은 지금까지의 히라노 문학과는 다른 또하나의 신선한 매력으로 독자들에게 다가가리라 확신한다.
―옮긴이의 말에서
옮긴이 신은주
한국외국어대학교 일본어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일본 오차노미즈 여자대학 대학원 인간문화연구과에서 비교문화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일본 학술진흥회 외국인 특별연구원을 거쳐 현재 니가타 국제정보대학 정보문화학과 조교수로 재직중이다. 『어두운 그림』, 『그늘의 집』(공역), 『나쁜 소문』(공역), 『곰의 포석』(공역)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홍순애
일본 나고야 출생. 성균관대학교 사학과를 졸업하고 현재 나고야 대학 국제언어학부 및 기후 대학 지역과학부 강사로 재직중이다. 번역 서클 ‘꿈 2001’ 회원. 『그늘의 집』(공역), 『나쁜 소문』(공역), 『곰의 포석』(공역) 등을 우리말로 옮겼다.
* 2008년 2월 1일 발행
* ISBN 978-89-546-0506-9 03830
* 128*188 | 360쪽 | 12,000원
* 담당편집 : 양수현, 유정민(031-955-886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