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랑하라 팜 파탈』『말할 수 없는 애인』의 시인, 김이듬이 장편소설을 썼다. 총 세 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 시집 말고는 다른 책을 낸 적이 없던 시인이 장편소설을 쓰다니. 평론가 정영훈의 말대로 “자기 몸에 익숙해진 글쓰기 방식을 고수하는 대신 이질적인 어법에 스스로를 적응시켜 무엇인가를 이야기하고자 했다면 그건 무엇인가 절박한 것이 있었다는 뜻”일 거다. 무엇이 김이듬으로 하여금 소설을 쓰도록 이끈 것일까.
“우리가 미숙하고 불충분했을 때,
무언가에 몰입하지 않으면 돌아버릴 것 같았을 때.”
『블러드 시스터즈』는 외로움을 이야기한다. 소설의 배경은 1980년대의 대학가이고, 주인공은 대학생이다. 80년대라니, 우리나라의 이십대 청춘들이 가장 뜨거웠던 시기가 아닌가. 그러나 소설은 무엇을 주장하거나 회상하려 드는 것이 아니다. 다만, 저마다의 방법으로 그 시대를 살아내야 했던 민감한 청춘들의 내밀한 자기고백과 수다, 그리고 이십대 특유의 날카로운 ‘관계’에 주목한다. 소설 속에는 여자 선후배 간의 미묘한 동성애적 관계, 친구 간의 우정, 남녀 간의 호감까지 다양한 관계가 등장하지만, 그중 어느 관계도 서로를 완전히 충족시켜주지 못한다. 즉, ‘더’ 사랑하는 쪽과 ‘덜’ 사랑하는 쪽이 존재하는 것이다. 애정의 이러한 불공평한 속성을 받아들이기엔, 소설 속 등장인물들은 너무나 서툴고 미숙하다. 그래서 늘 관계 때문에 휘청거리고, 절박함에 설익은 고백을 내뱉는다. 그리고 이는 곧 외로움으로 이어진다.
『블러드 시스터즈』의 인물들은 모두 어딘가 결핍되어 있다. 누구보다 사회 문제에 관심이 많았지만 개인의 문제는 극복하지 못하고 자살하는 지민, 사랑하는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가는 것을 슬퍼했지만 정작 자신의 곁에 머물던 지현에게는 마음을 내어주지 못하던 여울, 상처투성이인 내면을 짐짓 밝은 ‘척’으로 가리고 사는 솔까지. 하나같이 사랑받길 원하지만, 이들에게 정작 자기애는 없다. 헛헛한 내면을 부여잡고 사랑을 손짓하는 인물들의 가련한 몸짓이라니…… 채워질 수 없는 애정을 갈구하는 이들을 보고 있노라면 어느덧 연민과 함께 내면 깊은 곳에서 공감이 일어난다. 이 공허한 몸짓은 ‘지금’을 살아가고 있는 우리도 마찬가지일 테니 말이다.
“마음의 홈이나 혹,
금 가거나 상처 난 데 영혼이 깃든다고 나는 믿는다.”
『블러드 시스터즈』는 결국 우리의 심장을 깊숙하게 찌른다. 너와 내가 느끼는 외로움은, 결국 스스로의 마음이 비어 있는 데서 오는 것이 아니겠느냐고 말이다. 그러나 이 깨달음은
아픈 동시에 묘한 위로가 된다. 흠이 가 있는 마음, 상처 받은 마음에 곧 ‘영혼’이 깃든다고 믿는 작가의 말 때문이다. 그렇다면 김이듬은 이 ‘사랑’을 이야기하기 위해, 다만 새로운 어법으로 조금 더 길게 이야기하기 위해, 소설을 쓰게 된 것이 아닐까.
줄거리
‘정여울’은 독문학을 전공하는 여대생이다. 부모의 외도와 이혼, 남동생의 죽음 등으로 엉망이 된 집에서 뛰쳐나와 학교 선배인 지민의 자취방에서 살고 있다. 학생운동에 관심을 보이기도 하지만, 순전히 지민을 좋아하기 때문에 그녀가 참여하는 운동에도 관심을 두는 것뿐이다. 어느 날 밤, 여울은 아르바이트하는 카페에 갔다가 선균이 어떤 여자와 섹스하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 이후로 여울은 선균을 혐오하고, 선균 또한 여울을 심상치 않은 눈빛으로 바라본다. 한편 여울은 카페에 자주 오는 치과 의사에게 독일어를 가르치며 친해진다.
크리스마스가 얼마 남지 않은 저녁, 지민은 자취방에서 자살한 채 발견된다. 여울은 지민이 선균에게 강간당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화가 나서 선균을 찾아가지만 오히려 자신이 강간당할 위기에 처한다. 여울은 간신히 그곳을 빠져나오지만 크게 다치고, 자신을 걱정하며 간호해주는 치과 의사와 더욱 가까워지게 된다. 여울은 잠시나마 평화를 느끼지만, 그녀를 둘러싸고 있는 불안감은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책 속에서
아, 지겨워, 또 그 소리! 그땐 다들 그랬어. 너나없이 호헌철폐를 부르짖었다고! 어깨 걸고 거리로 나갈 수밖에 없는 시국이었잖아. 안 그랬으면 완전 매국노로 몰렸을걸? 지금은 달라. 난 그때도 그냥 선배가 하자는 대로 따라간 것뿐이야. 그저 선배가 좋아서 잘 보이고 싶었어. 정치적 신념 같은 거 없어. 나한테 스터디 그룹에 들어오라느니 이 책 읽어봐라, 저기 같이 가자며 의식화시키려고 들지 마. 그럴수록 난 냉담해질 거야. 현실로부터 갈 수 있는 데까지 멀리 갈 거라고. (p.16~17)
나는 엎질러진 유리컵, 흥건한 물, 입에서 흘러나온 흰 거품이 되어 물방울처럼 날아간다. 어둠 속에서 너무나 환하다. 어둠 속에서 모든 게 투명해진다. 어둠 속에서 나는 나를 앞서 날아가는 흰 그림자를 보고 있다. 말도 안 돼, 장난치는 거지? 나는 몸이 떨려서 움직일 수가 없다. 나는 몸이 날아가서 움직일 수가 없다. 어둠 속에서 웅크린 무언가가 소리를 지른다. 폭풍이 부는 어둠 속에서 탄식인지 비명인지 절규인지 모를 찢어지는 소리가 몰려나온다.
“선배, 죽지 마……!” (p.46)
아, 별이 아름답다, 끔찍하게. 반짝반짝하는 저 별 말고 별 뒤의 깜깜한 장막 뒤엔 뭐가 있을까? 나뭇가지 사이로 하늘과 땅이 서로 달라붙어서 번개도 불도 스며들지 않는 암흑, 암흑이 끝나면 더 짙은 암흑이 있는 건 아니겠지? 눈을 비벼도 여기가 어딘지 확실치 않다. 난 세상이라는 이상한 감옥에 갇힌 것 같다. 하지만 어딘가 출구는 있을 거다. (p.2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