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 「광어」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한 백가흠의 첫 소설집 『귀뚜라미가 온다』가 재출간되었다. 등단 십 년, 그사이 그는 두번째 소설집 『조대리의 트렁크』를 펴내고, 장편소설 『향』의 연재를 끝냈으며, 세번째 소설집의 출간을 기다리고 있다. 그의 첫 소설집을 출간 육 년 만에 다시 펼쳐본다. 생생하고 신선하다. 갓 잡아올린 광어처럼 펄떡펄떡 살아 움직인다.
극단의 삶에 기댄 우울한 몸부림, 사랑
한 지붕 아래 두 집이 살고 있다. 하나는 스물여섯의 남자와 서른넷의 여자가 사는 ‘바람횟집’이고 다른 하나는 달구와 그의 어머니가 꾸려가는 ‘달구분식’이다. 바람횟집의 남자와 여자는 “서로에게서 떨어지지 않으려” 각자의 나이를 속인 채 사랑을 하고, 여자는 수입이 일정하지 않은 장사 때문에 항상 안절부절못하며 전어철이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린다. 한편 달구분식에서는 하루가 멀다 하고 술을 마시곤 어머니를 패는 달구 때문에 어머니는 그 누구도 들어갈 수 없는 좁은 틈으로 몸을 감추며 매일 밤을 보낸다. 태풍 ‘귀뚜라미’가 오던 날, 바람횟집 여자는 어렵게 구한 전어가 태풍에 휩쓸려가자 그것을 건지려다 자신도 같이 파도에 밀려 사라지고, 달구 노모 역시 달구에게 맞을 때면 늘 숨던 그 좁은 틈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물 속에 잠기고 만다(「귀뚜라미가 온다」).
작가는 쳇바퀴 굴러가듯 반복되는, 가난한 삶을 가진 주인공들에게 그들이 처한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노력도 희망도 주지 않는다. 자신이 마련한 돈을 가지고 사라져버리는 여자를 붙잡지 않는 남자 (「광어」), 생계수단으로 부인의 포주 노릇을 하는 남편과 이를 수용하는 부인(「밤의 조건」), 자신의 가족을 잔인하게 죽이고 처음 본 여자의 집에서 자살하는 남자(「구두」) 등 그들만의 세상에서 앞으로 나아가기란 어쩌면 죽을 만큼 힘겨운 일일지도 모른다. 세상과 내면이 이미 황폐해져버린 주인공들에겐 모든 일이 불가항력으로 다가온다. 작가는 극단의 모습들에서 벌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우리를 처절한 삶의 이면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끝이 보이지 않는 주인공들이 세상과 소통하고 잠시나마 그곳을 뛰어넘게 만드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다름아닌 사랑이다. 그리고 백가흠이 선택한 이 ‘사랑’은, 낭만적이고 감미로운 감정상태의 그것과는 물론, 조금 다르다.
그들만의 기이한 사랑 방식과 선택기준 : 남자가 사랑에 빠졌을 때
「광어」의 주인공은 자신이 사랑하는 여자를 임신시킨 남자에게 돈을 받아 술집에서 그녀를 빼내 함께 떠날 것을 꿈꾼다. 「귀뚜라미가 온다」의 스물여섯 남자 역시 사랑하는 서른넷 여자와 가정을 꾸리려 하고, 「배(船)의 무덤」의 주인공은 말이 통하지 않는 이국의 여자와 사랑에 빠지고도 태어나 처음으로 행복을 느끼며 「밤의 조건」에 등장하는 여동생은 남과 다름없는 오빠에게 청혼을 받고 눈물을 흘린다…… 백가흠의 이야기들 속에서 주인공들은 더이상 극단적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가장 일반적이고 평범한, 혹은 낭만적인 형태의 사랑을 소망한다. 이로서 짧은 시간이나마 자신들이 속한 세상에서의 일탈과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백가흠과 그 주인공들이 보여주는 사랑의 방식은, 그리고 그 선택기준은 우리가 알고 있는 그것과는 조금 다르다. 평론가 김형중에 따르면, 경쟁이 치열한 대상, 이른바 ‘순결하다’ 할 수 없는 대상, 주인공들이 구원해줄 수 있는 대상, 혹은 모성을 느낄 수 있는 대상이 바로 그것이다. 백가흠 소설의 모든 주인공은 남자이며 철저하게 남성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진행된다. 모성에의 원형적인 질투에 기인한 경쟁과 소유욕으로 점철된 잔인한 폭력성이 ‘피학적 헌신’ ‘가학적 폭행’ ‘강간’ ‘신성모독’ 등으로 사랑을 표현하게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과연 이런 것들을 두고 사랑이라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누가 뭐래도 사랑이다. 그것도 최종심에서 모든 남성의 사랑을 결정하는 아주 간절하고도 원형적인 (그러나 동시에 유아적이고 퇴행적인) 사랑이다. (……) 백가흠은 지금, 남성 판타지와 그것의 폭력성에 대한 심리학적 탐구에서, 철학적 탐구로 이행해가는 도정에 있다. 그리고 그 이행은 그의 소설적 탐구가 깊어지고 넓어지고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김형중, 해설 「남자가 사랑에 빠졌을 때」)
그 무엇보다 고요한 눈을 간직한 태풍은, 그 피해가 작기를 바라며 ‘귀뚜라미’ ‘개미’와 같은 작은 곤충들의 이름 혹은, ‘사라’와 같은 여자의 이름을 붙인다. 그리고, 우리의 기대를 보기 좋게 무너뜨리며 혹은 배반하며 백가흠은 그렇게 다가왔다. 태풍 ‘귀뚜라미’처럼.
「광어」는 우선 날렵한 문장부터가 돋보인다. 탁월한 묘사력으로 팽팽한 긴장감을 유지하며 전편을 장악하고 있는 숙수의 솜씨는 감탄할 만한 것이었다. 광어가 죽으면서 내는 ‘가냘픈 바람 소리’까지도 일깨워주는 섬세의 정신은 우리 소설에서 더욱 천착되어야 마땅할 덕목이다.
―윤후명, 오정희(소설가,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 소설 심사평 중에서)
● 백가흠 | 전북 익산에서 태어나 명지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01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광어」가 당선되어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소설집 『조대리의 트렁크』가 있다.
* 145 * 210 | 296쪽 | 값 10,000원
* 개정판 1쇄 발행 | 2011년 5월 9일
* ISBN 978-89-546-1596-2 03810
* 책임편집 | 조연주(031-955-88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