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죽고 나면 내 가련한 작품들이 어떻게 될지 걱정이다. 정말 힘들게 모았는데, 결국 모두 흩어져서 사라지고 말겠지. 이렇게 전부 한 곳에 있어야 비로소 내가 어떤 예술가였는지 조금이나마 알려줄 수 있을 텐데. 이 그림들 사이에서 잠이 들면 얼마나 행복했던가."
_귀스타브 모로
화가에게 집이란 무엇인가
화가에게 집이란 무엇일까. 많은 화가들에게 집이란 생활하는 공간, 작업을 하는 공간 그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화풍이 라이프스타일을 인도하는 현장을 그들의 집에서 발견하기도 한다. 집은 화가에게 예술적 영감의 원천이며 작업의 연장이자 무대가 되기도 한다. 마침내는 집 자체를 예술 작품으로 보고 접근하거나, 미학적 성찰의 무대로 완성시키기도 한다. 이처럼 화가의 집이 갖는 의미와 범주는 끊임없이 확장되고 있다. 그 범주는 종종 예상을 뛰어넘는 것은 물론이요, 때로 우리의 이해를 넘어서기도 한다.
이탈리아 파도바에 있는 안드레아 만테냐의 저택은 주거지를 모방·복제하는 차원에서 현실 자체보다 숭고한 그 무엇으로 고양시키려는 만테냐의 야심찬 미학적 기획을 증언하고 있다. 산 세폴크로에 있는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의 저택에 가보면 그가 어마어마한 확장 공사를 거쳐 낡은 저택을 예술가의 집으로 변모시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피렌체의 기벨리나 거리에 있는 미켈란젤로의 집은 건물 자체는 간결해도 내부 곳곳에 전시되어 있는 그의 걸작들과 조카 손자 소(少) 미켈란젤로의 손으로 이루어진 인테리어는 미켈란젤로 가문의 영광을 찬양하고 있다. 알브레히트 뒤러가 생을 마친 우아한 저택은 뉘른베르크에 남아 있으며, 톨레도에 있는 엘 그레코의 집은 안뜰에 포석이 깔려 있어 그의 부귀를 자랑하고 있다.
아레초에 있는 조르조 바사리의 저택은 커다란 거실 전체가 르네상스의 수많은 화가, 조각가, 건축가의 초상화로 덮인 도상학적 프로젝트의 완결판이다. 17세기 초 부와 권력을 거머쥐고 수많은 기술자와 문하생을 거느린 아틀리에를 운영했던 페테르 루벤스는 거대한 정원이 달린 넓은 저택을 지었는데, 저택의 절반은 당대 플랑드르 양식을 따라 만든 주거 공간, 나머지 절반은 그의 방대한 미술 컬렉션을 보관하는 화려한 궁전이었다. 루벤스는 로마의 판테온을 연상시키는 홀에 진귀한 고대의 조각품들을 모아두기도 했다. 아름다운 자연을 손수 설계한 정원에 끌어들여 자신만의 도원향을 만든 모네의 집 역시 화가의 집을 말할 때 빼놓을 수 없다. 그런가 하면 사회 통념에서 벗어나 자유분방한 생활을 한 화가들의 거처는 상대적으로 초라하고 빈한했다. 바르비종에 있는 장 프랑수아 밀레의 누추한 집을 보면 알 수 있듯 인상파 화가 대부분은 이렇다 할 재산이 없었다. 최소한의 가구만을 갖추고 살던 아를 시절의 고흐를 보면 알 수 있듯, 집이란 아틀리에를 연장한 임시 공간에 불과하기도 했다.
『화가의 집』에서 다루는 작가들은 비교적 현재에 가까운 이들이다. 이들의 집과 아틀리에, 정원은 지금 당장 누군가 살아도 될 정도로 생활의 냄새가 짙게 남아 있다. 그래서 더욱 호기심을 유발하고, 공간을 유심히 살펴보게 만든다.
프랑스 샹부르시에 있는 앙드레 드랭의 집 ‘장미원’은 일종의 유배지다. 파리에서의 화려한 사교생활을 뒤로하고, 급작스레 샹부르시로 모든 것을 옮긴 앙드레 드랭은 자신의 정신마저 그곳으로 유배시켰다. 공작새를 비롯해 온갖 동물이 거닐던 정원 깊숙한 곳의 저택에서 그는 다시금 영감을 되찾았다. 버니지아 울프, 버네사 벨, 던컨 그랜트 등이 속한 블룸즈버리 그룹의 작가들은 찰스턴 농장을 구석구석 자신들이 지향하는 미학을 구현하는 거대한 무대로 탈바꿈시켰다. 오스탕드의 음울한 기운으로 뒤덮인 제임스 엔소르의 집은 그의 그림에 숱하게 등장하는 ‘가면의 카니발’ 그 자체라 할 수 있다.
『화가의 집』은 이들의 작업실, 침실, 거실, 부엌, 복도를 천천히 거닐며 그들의 정신과 손길이 닿은 부분을 세밀하게 훑는다. 창밖으론 어떤 풍경이 보이는지, 햇살이 어떤 식으로 들어오며, 한낮에는 얼마나 더운지, 화가들의 작업도구는 어떤 식으로 배치돼 있는지, 그들이 소장한 작품들은 어떤 것이 있는지 적확하게 보여준다. 무엇보다 예술 작품들이 어떤 공간에서 태어났는지, 그 밑그림이 새겨진 공간을 통해 작품 세계에 대한 이해의 폭을 한층 더 넓고 깊게 만들어준다. 미술사가인 지은이와 인테리어 공간 사진을 전문적으로 촬영해온 사진작가는 화가의 공간과 꼭 맞는 합일을 이루며, 화가의 자취를 좇는다. 이런 흥미로운 추적을 통해 화가의 집이 단순히 생활공간이 아니라 예술적 영감의 원천 또는 작업의 연장이자 무대라는 것을 실감나게 보여주는 것이 이 책의 매력이다.
이 책은 또한 각 작가의 작품 세계와 생애에 관한 개론서 역할도 충실히 하고 있다. 전기적 자료조사도 훌륭하지만, 선별한 화가의 예술세계를 잘 이해하고 그 특징이 잘 살아 있는 요소들을 거주공간에서 찾아내는 안목이 뛰어난 덕분이다. 사진에 담긴 내용은 어느 하나도 우연히 찍힌 것이 없다. 지은이의 해설을 읽고 난 다음에 사진을 보면, 화가의 공간이 가진 핵심을 압축해서 보여주고 있다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화가에게 집이란 번잡한 세상을 피해 창작에 전념할 수 있는 도피처를 제공하기도 하고, 당대에 이해 받지 못한 작가의 작품을 후대에 전하는 미술관 역할을 하기도 하지만, 거주지가 작품세계와 서로 영향을 주기도 하고(모네가 식당에 걸어놓은 일본 판화들이나 그가 공들여 조성한 정원은 모네의 그림에 나타나는 특유의 색감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 집 자체가 캔버스가 되거나 예술작품으로 탈바꿈하기도 한다. 그래서 책을 다 읽고 나면 이렇게 집과 예술가가 관계 맺는 방식의 다양한 스펙트럼이 한눈에 들어온다.”_옮긴이의 글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