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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릴라 아티스트 케리 스미스가 ‘책을 파괴하자’고 독자들을 꼬드긴다. 어린 시절 페이지마다 크레용으로 낙서를 하거나, 지루한 수업시간을 버티려고 귀퉁이마다 그림을 그려 넣던 교과서처럼, 마음껏 낙서를 하고 망가뜨릴 수 있는 책이라니, 어쩐지 해방감이 느껴지지 않는가? 책의 제목마저 ‘이 책을 파괴하라’이다.
이 책은 아름다운 것을 만들라고 얘기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반대로 엉망으로 만들라고 권한다. 이처럼 우리가 배워온 것과 정반대되는 일을 한다면 어떨까? 어떤 사람은 이 책에서 큰 해방감을 느낄 수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이 책 때문에 뿌리 깊은 금기가 마음속에 자리 잡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도 있겠다. ‘파괴’의 대상이 바로 ‘책’이기 때문이다. 책이란 특히 유교 문화권인 우리나라에서는 신성시되기까지 하는 대상이 아니던가. 어릴 때부터 우리는 책을 망가뜨리면 안 된다고, 소중히 다뤄야 하는 것이라고 배워왔다. 책장을 접지 말아라, 책에다가 뭘 쓰지 말아라, 젖게 하면 안 된다 등등. 이 책은 바로 이러한 것들을 즐기라고 시킨다.
책에 대한 유쾌한 신성모독
뭔가 다른 것을 해보고, 망치는 데 특별한 준비는 필요 없다. 이 책을 채워나가고 ‘파괴’하는 데 쓸 재료는 주위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상관없다. 몰스킨 같은 멋진 표지에 질 좋은 종이로 된 노트를 하나 사서 첫 페이지에 무언가 쓸 때 느끼는 두려움이나 저항감 같은 것(‘망치면 어떡하지?’)도 이 책을 앞에 두고 있으면 전혀 들지 않는다. 뭔가 제대로 된 미술재료를 구할 필요는 없다. 옆에 있는 연필, 커피, 그것도 아니면 바닥에 굴러다니는 먼지, 심지어 주머니 속 보푸라기까지도 재료가 될 수 있다. 이중에서 아무것도 발견할 수 없다면, 행위, 동작도 재료가 될 수 있다.
지은이가 이 책을 망가뜨리기 위해 요구하는 것, 마음가짐은 다음과 같다.
1. 어디를 가든지 이 책을 갖고 다닐 것
2. 매 페이지마다 적혀 있는 설명대로 따라할 것
3. 순서를 따를 필요는 없음
4. 설명은 해석하기 나름이니 마음대로 할 것
5. 실험하라!
이 다섯 가지를 염두에 두고 이 책에서 권하는 ‘파괴’의 행위는 이런 것들이다.
- 책 위에 올라서서 신발을 이리저리 닦고 위아래로 뛰기.
- 커피를 붓고, 쏟고, 흘리고, 뱉고, 퍼붓기
- 날카로운 물건을 이용해서 긁기
- 갈래로 조각내어 갈기갈기 찢기
- 잘근잘근 - 페이지를 찢어내어 둥글게 구겨 공을 만든 다음, 책을 세워서 그 사이에 통과시키기
- 책을 목욕탕에 갖고 들어가 같이 샤워하기
- 책에 끈을 묶어서 산책할 때 질질 끌고 다니기
- 주머니 속의 보푸라기를 모아서 붙이기
- 화려한 색깔의 사탕을 먹은 다음 책을 핥기
- 한 페이지를 뜯어서 ‘의도적으로’ 잃어버린 다음 그 손실을 마음속으로 받아들이기
- 심지어, 책등을 갈라버리기
『이 책을 파괴하라』는 책의 신성함에 대한 역발상의 도전이자 책의 권위에 짓눌린 창조성과 상상력을 마음껏 발산하자고 권한다.
내면에 감금된 창조성을 깨우자
이 책의 지은이 케리 스미스는 늘 창의적인 것에 대해 고민하는 직업을 가진 게릴라 아티스트이자 일러스트레이터로서, 대중을 상대로 창의성에 대해 강의하는 일도 하고 있다. 그러던 중 그녀는 창조성에 관해 읽는 것도, 쓰는 것에도 염증을 느끼게 되었다. 좋은 말들이 잔뜩 적혀 있는, 하지만 읽기만 하고 거기 쓰여 있는 대로 행동하지 않는 책들을 얼마나 많이 읽었는가? 그래서 그녀는 독자가 수동적인 관찰자로 머무는 것이 불가능한 무언가를 만들어보기로 했다.
몇 달 동안 케리 스미스는 작은 저널을 어디를 가든지 들고 다니면서 당시 간 곳과 관련된 즉흥적인 문구를 적어 넣기 시작했다. 언제든지 어디서든 쓸 수 있는 것을 사용하자는 아이디어였다. 특별한 미술재료나 도구 같은 건 전혀 필요 없도록. 공원에 있다면 발의 풀이나 자갈, 혹은 흙을, 사무실에 있다면 사무용품을 쓰면 된다. 창조 행위는 어떠한 환경에서도 가능한 것이니까.
‘그냥 앉아서 생각만 하는 대신 실제로 행동하게 하는 책을 만들면 어떨까?’ 바로 이런 생각에서 이 책은 탄생했다. 일상의 모든 것들에서 창조성과 영감을 발견하고, 어떤 것이든, 무엇이든 하고 싶어지는 동기를 부여하는 것, 두려움 때문에 갇혀 있던 내면의 창조성을 일깨우는 것이 그녀의 목표였고, 이 작은 책을 통해 그녀의 ‘음모’는 실현되고 있는 듯하다. 2007년 미국에서 처음 출간된 『이 책을 파괴하라』는 출간 이후 많은 독자들의 사랑을 받았다. 대표적인 사진 공유 사이트인 ‘플리커(flickr.com)’에 이 책의 제목을 치면 수많은 독자들이 자유롭고 창의적으로, 자신만의 방법으로 이 책을 ‘파괴’한 이미지들이 1만 3,000건 이상 검색된다. 한 권을 다 ‘파괴’하고 나면 또 다시 한 권을 구입해서 새로운 파괴를 시작하는 독자들 또한 심심치 않게 발견할 수 있다.
빈 페이지를 보면 두려움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이 책을 집어 들고 파괴하기 시작하라! 일단 무엇이든 저지르는 데 익숙해진다면, 실수를 두려워하지 않게 될 것이다. 책의 ‘주의사항’에 적혀 있는 대로 ‘어쩌면 좀 더 닥치는 대로 살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이 책은 다이어리나 스케치북을 시작하거나 채우는 것, 완성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는 모든 사람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의도적으로 책을 파괴하도록 강제함으로써, ‘사물로서의 저널’은 그 소중함을 잃고 완성할 기분이 들게 하는 것입니다. 이 책은 다른 예술가들의 저널을 보고 ‘나도 저렇게 할 수 있었으면. 수십 권쯤 시작해봤지만 계속할 수가 없었어’ 혹은 ‘저널은 그 자체로 아름답잖아. 그걸 내 아이디어/손글씨/드로잉으로 망치고 싶지 않아’ 혹은 ‘뭔가 괜찮은 걸 써야만 할 것 같아’라고 말하는 모든 사람들을 위해 만들어졌습니다.
이 책에는 좋은 것이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목표는 이 책을 채우고 빈 페이지에 대한 당신의 인식을 바꾸고 이 책 자체가 실험을 위한 장이 되도록 하는 것입니다. 절대로 하지 말라고 배웠던 것들을 하면 됩니다. (엉망으로 만들고, 파괴하고, 페이지를 접고, 책에 쓰고, 흙장난을 하는 것이다.)” _케리 스미스의 인터뷰 중
책을 번역하고 케리 스미스의 손글씨의 맛을 살려 한글 캘리그래피로 옮긴 munge(박상희) 역시 『이 책을 파괴하라』의 열혈 팬이었기에 이 책을 한국 독자들에게 알리는 일에 뛰어들었다. 덕분에 케리 스미스의 손글씨와 가장 비슷한 느낌을 전달하는 한글판 『이 책을 파괴하라』가 탄생할 수 있었다.
“이 책에 오랫동안 탐닉하고 있던 제가 한국판 출간 과정에 직접 참여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릅니다. 커피에 관련된 책을 준비하던 중 우연히 『이 책을 파괴하라』의 독자가 올린 사진 한 장을 발견하게 되었고, 저도 이내 이 책이 갖고 싶어졌습니다. ‘POUR, SPILL, drip, SPIT, fling your coffee HERE’라고 손으로 쓰인 텍스트 위에 물기가 흥건한 커피 백을 손가락으로 누르고 있는 사진은 호기심을 자극했고, 그림처럼 그려진 캘리그래피에 관심이 있었던 저로서는 첫눈에 반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진정으로 이 책에 빠지게 된 계기는 Flickr.com을 통해 수천 명에 달하는 독자들이 이 책을 얼마나 흥미롭게 가지고 놀고 있는지를 알게 된 후였습니다. 이 책에 빠져든 독자들은 한 권을 채우기가 무섭게 또다시 한 권을 주문하여 다시 새로운 콘셉트로 책을 채워나가곤 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는 이 책의 진정한 매력에 또 한 번 놀라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한국의 독자들도 『이 책을 파괴하라』의 마력에 흠뻑 빠져들어 재밌게 놀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_munge
추천의 글
“언제나 새 스케치북을 마련하면 가슴이 설렌다. 그건 앞으로 새 스케치북에 두고두고 벌어질 알 수 없는 ‘사건’에 대한 기대와 희망 때문이다. 『이 책을 파괴하라』는 그런 체험을 극대화한 일종의 스케치북이다. 편리하게도 각 페이지엔 어떻게 하라는 지시까지 적혀 있다. 하지만 정답은 없다. 누구나 창작자가 될 수 있음을 증명하는 스케치북이다.”
_이우일(만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