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알려져 있는 대로 정영문은 한국문학에서 매우 독특한 영역을 가진 작가다. 특유의 문체로 죽음과 구원, 존재의 퇴조 등 인간 본연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들어온 그는 독특하고 실험적인 글쓰기로 자신만의 세계를 확고히 구축해왔고, 그렇게 견고하게 세워진 그의 세계는 계속해서 그 자장을 넓혀가고 있는 중이다.
중얼거리다
그의 소설은, 그의 소설 속 인물들은 끊임없이 중얼거린다. 천천히 산책하듯 그 중얼거림에 귀를 기울이고 있다보면, 그 독백들은 작가 자신의 것이 되었다가 다시 소설 속 인물의 것이 되며 그것은 또 전혀 다른 누군가의 음성이 되기도 한다. 그것은 실제와 상상의 경계를 넘나들며, 시종일관 길고 얇은 생각의 끈을 따라가는 꿈속을 헤매듯, 두서없이 계속된다. 때문에 그의 소설을 읽을 때는, 정색을 하고 텍스트에 집중하기보다는, 오히려 적당하게 긴장을 풀고, 라디오를 듣듯 그의 음성에 의식을 맡겨두어야 한다. 작가와 소설 속 인물들의 의식의 흐름에 내 것을 맡겨두고 있다보면 얼핏 끊임없이 되풀이되기만 하는 듯 보이던 그의 언어들은 크고 작은 변주를 거듭하며 새로운 의미를 낳는다. 처음에 분명하던 것들은 희미해지고, 모호하던 의미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새롭게 떠오르는 것이다.
어떤 희망도 욕망도 없이 최소한의 삶만을 유지하면서도 오히려 즐거워 보이기까지 하는 그의 인물들은 얼핏 낯설어 보이지만, 이렇게 그들의 낮은 중얼거림을 천천히 뒤따라가다보면 어느 순간 예기치 않은 유머를 발견하게 되기도 한다. 의도하지도 기대하지도 않았기에 더욱 반가운 이 즐거움은 소설의 어느 부분에서 후드득, 떨어질지 모르니 내 의식의 한쪽 끝은 꼭 붙들고 있을 것!
「브라운 부인」 캐나다 노바스코샤에 있는 경비행기 조종학교. 나는 브라운 부인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그녀는 담배가 타들어가는 것도 잊어버린 채 이야기에 열중하는 눈이 매력적인 여인이다. 그녀는 어느 날 그녀와 남편이 살던 호숫가의 한적한 집으로 찾아왔던 두 어린 손님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한다. 서류가방에서 꺼낸 권총으로 예의바르게 위협을 했던 사내아이와 뒤이어 등장한 졸린 눈의 여자아이. 이 두 사람은 권태롭던 브라운 부인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꿔놓는다. 과연 그들에게는 무슨 일이 일어났는가.
「여행의 즐거움」 “K와 함께 왔으면 좋았을걸.” 그녀가 이렇게 말한 건 이번 여행에서 두번째다. 그녀와 나는 포도밭에 와 있다. 여행을 제안한 K는 어쩐 일인지 약속장소에 나타나지 않았고 우리 두 사람은 T반도로 가는 길 위에 잠깐 멈춰 서 있는 중이다. 유럽여행에서 만난 그녀와 어떤 섬을 여행하다 만난 K. 두 사람은 나를 통해 서로를 알게 됐지만 그녀는 나보다 K를 더 좋아하는 듯하다. 양성애자인 K는 어떨까? 알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K를 생각하며, 또 우리가 했던 여행과 다른 이들의 여행을 이야기하며 여행을 계속 이어간다.
「목신의 어떤 오후」 우리 세 사람은 호숫가의 공터에 소풍을 나왔다. 파이프 담배를 문 그와, 그의 사촌인 그녀, 그리고 그녀와 함께 살고 있는 나는 〈풀밭 위의 점심〉의 인물들처럼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눈다. 그의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와 그녀가 어린 시절 연인과 사랑을 나누다 상대 남자의 아버지에게 발각된 일, 그녀와 내가 살고 있는 집에 들려오는 음악소리 등 우리는 익히 알고 있는 일들을 다시 한번 이야기한다. 그런 우리들 주위에는 무언가를 끝까지 기다릴 듯한 까마귀들이 배회하고 곧 비를 쏟을 듯한 먹구름이 몰려온다. 그때 숲 저편에서 개끈을 손에 쥔 낯선 남자가 나타난다.
「목가적인 풍경」 말을 키우는 목장의 주인 남자는 오로지 말에만 미쳐 사는 사람이고, 주인 여자는 아무것에도 관심이 없는 듯 보인다. 주인 남자는 서재에 틀어박혀 말에 대한 책을 읽고, 목장 한가운데에 천막을 치고 말 그림을 그려댄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남자의 말 그림은 알아보기가 힘들어지고…… 어느 날 갑자기 남자는 말 그림을 내팽개치고 천막 안으로 여자를 들이기 시작하지만, 역시 아내도 목장의 다른 사람들도 관심이 없기는 마찬가지다. 늘 그렇듯 계절은 바뀌고, 코스모스가 피고, 날벌레들이 날아다니고, 바람과 구름은 불안정하게 움직이고…… 그사이에도 목장에는 남자가 틀어놓은 왈츠곡이 은은하게 울려퍼진다.
「동물들의 권태와 분노의 노래」
노래하는 동물들의 눈, 그리고 그들의 권태와 분노의 노래. 그것들이 나로 하여금 이 침대를 떠나는 것을 막았다. 나는 여기서 평생을 살 것이다. (폴 엘뤼아르의 시 중에서, 「동물들의 권태와 분노의 노래1」, 221쪽)
세 편의 연작소설은 이번 작품집에서 작가의 호흡이 가장 뚜렷하게 드러나는 작품이다. ‘물속의 알람 소리’라는 부제를 가진 1편에서는 강가에서 물고기를 잡아먹으며 사는 한 남자를, 2편에서는 토끼가죽 코트를 입고 담비가죽 모자를 쓴 채 바닷가의 동굴에 사는 인물을, 3편에서는 2편에서 주인공과 조우했던 한 노인과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시간과 공간이 일그러진 채 묘사되는 풍경은 주인공의 의식세계와 겹쳐져 현실과 환상의 경계를 허물어뜨린다.
시간을 가게 하는 것, 그래서 나의 시간이 다하게 하는 것, 그것만이 문제가 되었다. 내가 어디에서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내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동물들의 권태와 분노의 노래2―동굴 생활자」, 273쪽)
주인공은 삶의 시간을 오로지 무의미하게 소비하는 데 열중하고 있으며, 거기에 타자의 개입은 철저히 배제되어 있다. 모래놀이를 하거나, 물속에 빠진 시계의 알람 소리를 듣거나, 동굴 속에서 벽을 향해 테니스 공을 치는 등의 유희 역시 삶을 무의미하게 소비하는 한 방식을 보여줄 뿐이다.
정영문은 우리의 내면에서 아무 맥락 없이, 때로는 맥락이 있다 하더라도 여전히 두서없는 부침을 되풀이하는 토막난 의식들을 나열 또는 중첩시키는 독특한 문체를 개발했다. 「목신의 어떤 오후」는 그의 독특한 문체만이 가 닿을 수 있는 이 세계의 불가지성을 유감없이 드러내는 수작이다. 서영은(소설가)
정영문의 「목신의 어떤 오후」는 작가의 특징이 잘 드러나 있는 소설이다. 언제나처럼 철학적 사유로 어떤 세계를 이룩하려는 집념을 읽을 때, 그는 독특하다. 윤후명(소설가)
* 초판발행 | 2008년 5월 15일
* 145*210 | 304쪽 | 값 10,000원
* ISBN | 978-89-546-0579-3 038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