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둘, “전설의 그녀”가 왔다!
전아리의 이름과 소설은 청소년들에게 여전히 ‘전설적’이다. 문학사상사 청소년문학상 대상, 푸른작가 청소년문학상, 대산청소년문학상 금상, 최명희청년문학상…… 중고교 재학 시절 웬만한 문학상은 죄다 휩쓸면서 문학청소년들 사이에서 ‘그녀를 모르면 간첩’이란 말까지 나왔다._동아일보 2007년 6월 7일자 ‘21세기 신천재론’
1986년생, 스물두 살, 책 한 권 내지 않고도 ‘문학천재’로 불리며 수년간 언론의 주목을 받아온 전아리가 두 권의 책을 동시에 출간했다.
2007년 봄부터 2008년 봄까지, 청소년 문예지 『풋,』에 연재했던 첫 장편소설 『시계탑』과, 그간의 각종 수상작들에서 작가가 직접 고른 열 편의 단편이 수록된 첫 창작집 『즐거운 장난』이 바로 그것.
“지금까지 어떤 상을 받았는지 기억도 못”한다는(세계일보 2008년 5월 1일자)는 그녀를 둘러싼 전설은 셀 수 없이 많다. 그러나 그 어떤 화제의 토픽들보다도 그녀의 작품, 그녀의 문학 자체보다 놀랍지는 않을 것이다. 자, 이제 그 전설의 실체를 확인할 시간이다.
전아리 첫 장편소설 『시계탑』
“나의 고등학교 시절은 유별나고 즐거웠으나 언제나 교복 윗주머니에는 풋내 나는 외로움이 담겨 있었다. 나는 쑥스러워서 그 외로움을 꺼내 보이지 못했다. 그래서 외로움은 아직 외로운 채로 거기 그대로 남아 있다.”_‘연재를 시작하며’(『풋,』 2007년 봄호)
“갖고 싶은 것을 갖지 않는 것은 멍청한 일이다.
나는 내가 원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손에 넣는다. 물론 때로는 아랫도리가 저려올 만큼 간절히 원하지만 절대 얻지 못하는 것도 있긴 하다. 예를 들면 우리 집 개의 희고 따뜻한 털이라든가 눈꺼풀을 덮지 않고도 잠들 수 있는 금붕어의 까만 눈알 같은 것. 찰흙반죽처럼 말랑말랑한 나의 뇌를 아무리 주무르며 생각해봐도 내 것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곧 갖고 싶은 것들의 목록에서 제외된다. 여우의 신 포도에 관한 우화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이야기이다. 어차피 먹지 못할 것에 대해 적당한 모욕을 날려주고 미련 없이 돌아서는 여유.”_본문 중에서
열한 살, ‘나’는 가진 것은 없어도, 갖고 싶은 건 꼭 가져야 직성이 풀리는 아이다. 그래서 ‘나’는 물건을 훔친다. 동네 미용실 언니의 스타킹도, 부잣집 반장네 화장실에 놓여 있던 은시계도, 갖고 싶은 건 다 가져온다. 다니던 공장이 망한 뒤론 술만 마시는 아버지를 견디다 못한 엄마는 집을 나갔다. ‘나’와 함께 여행을 떠나기로 약속해놓고선…… 단짝 ‘꼬붕’ 병욱이와 역 광장의 시계탑 앞에서 엄마를 기다려보지만 아무리 기다려도 엄마는 오지 않는다. 애써 손을 뻗어도 딸 수 없는 ‘신포도’처럼 엄마도 이제 내 손이 닿을 수 없는 곳으로 가버린 것 같다.
『시계탑』의 주인공 ‘나’-연이는 다른 사람의 물건을 훔치는 것에 별다른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 소녀다. 그러나 동시에 “내 것이 될 가능성이 없다고 판단되는 것들은 곧 갖고 싶은 목록에서 제외시”킬 줄 아는 아이이기도 하다.
『시계탑』은 갖고 싶은 것은 훔쳐서라도 손에 넣던 이 열한 살 소녀가 “원하지만 결코 갖지 못할 것에 대한 미련을 빨리 버릴 수 있는 좋은 방법은, 지금 내게 그것이 없고 앞으로도 또한 없을 것임을 편히 인정하는 것”임을 깨달아가며 열아홉 살, 어른의 문턱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담담하게 그려 보인다.
열아홉, 그리고 어느 날 저녁, 집으로 걸려온 전화 한 통.
아빠에게 전한다. “엄마 돌아가셨다는데.”
열아홉 살 끄트머리에 선 지금도 ‘나’는 갖고 싶은 건 가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내 주머니에 맞춰 그것들을 자르고 구길 필요는 없다는 걸, 지금은 알고 있다.
세상을 다 안다는 듯, 심드렁한 한 소녀의 이야기는, 그러나 어느새 이야기는 작은 위로로 바뀐다. 억지 포즈를 취하지 않고 담담하고 담백하게 써내려간 한 소녀의 성장일기는, 그래서 더욱 매력적이다. 자신의 상처나 외로움을 포장하지 않는 것처럼 타인의 그것 역시 한발 떨어져서 지켜볼 줄 알기에. 때론 손길을 나누고, 숨결을 나누는 것보다 멀리서 지켜봐주는 것이 더 큰 힘이 된다는 것을, 어떤 상처나 외로움은 그 자리에 그대로 두어야 한다는 것을 스물셋의 작가는 어떻게 알았을까.
"멍청하게도 눈물이 나려고 하는 순간 재빨리 노래를 지어 부르기 시작한다. 아, 이 개 같은 눈물, 아, 이 개 같은 눈물." 놀랄 정도로 젊은 작가가 그리는 한 소녀의 이 성장이야기는 어둡고도 밝으며, 늙었으면서도 젊으며, 아주 오래된 것이면서도 낯설기만 하다. 이 세상 전부와 맞서 싸우리라고 마음먹는데도 웬일인지 주먹을 쥔 두 손에서는 힘이 빠지는 걸 느끼는 소녀를 지켜보고 있는 느낌이다. 문장은 감정을 폭발시키지 않고 절제한다. 시선은 사건만을 묘사한다. 그럼에도 다 읽고 나면 우리를 영악하고도 나약한 십대로 만드는 잔인한 동시에 지루한 시간의 흐름을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김연수(소설가)
* 초판발행 | 2008년 5월 23일
* 133*200 | 176쪽 | 값 9,000원
* ISBN 978-89-546-0582-3 04810
978-89-546-0587-8(세트)
* 책임편집 | 조연주, 최유미(031-955-886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