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의(靑衣)」
「청의」는 중국의 고대전설 ‘항아분월’을 알레고리로, 한 경극 여배우의 분열적인 운명을 섬세한 필치로 그려나간다. 화려했던 과거와 비루한 현실 사이에서 길을 잃는 주인공 샤오옌추는 첸 카이거 감독의 영화 <패왕별희>의 두지(장국영 분)와 마찬가지로 극중 캐릭터와 자신을 끊임없이 동일시하며 ‘흘러간’ 배우로서의 위태한 일상을 이어나간다.
1959년에 이미 극본이 완성되었으나 공연 전 리허설을 관람한 한 장군이 내뱉은 한마디에 막을 내려야 했던 경극 <분월(奔月)>을 다시 무대에 올릴 수 있게 된 1979년, 항아를 연기하며 최고의 인기를 구가해가던 열아홉 살의 샤오옌추는 어느 날, 라이벌인 선배에 대한 질투에 사로잡혀 그녀의 얼굴에 뜨거운 물을 끼얹는 돌이킬 수 없는 실수를 저지르고 무대를 떠나 조그만 연극학교 교사로 일하게 된다. 그리고 항아를 잃어버린 <분월> 역시 오랫동안 무대에 오르지 못한다. 그로부터 이십 년 뒤, <분월>의 재공연을 기획하던 연출자는 한 연회 자리에서 만난 담배 회사 사장으로부터 샤오옌추를 주인공으로 한다면 자신이 공연에 필요한 돈을 대겠다는 제의를 받고 기뻐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십 년의 공백기를 가진 마흔 살의 샤오옌추가 과연 다시 무대에 설 수 있을지 망설이던 연출자는 그녀를 만나자마자 자신의 걱정이 기우였음을 깨닫고 <분월>의 공연을 착착 진행시킨다. 그러나 모두가 기대감에 사로잡혀 있는 상황에서 샤오옌추는 아무도 모르게 번민을 키워나간다.
자신의 늙음에 몸서리치며 제자이자 대역 배우인 춘라이의 젊고 싱싱한 몸을 더듬다가 소스라치게 놀라는가 하면, 연출자와 만나 무대에 오르기로 한 날 너무나 기쁜 나머지 피임하지 않고 남편과 섹스를 한 결과로 얻은 뱃속 아이를 공연을 위해 스스로 낙태시킨다. 패닉 상태에 빠진 그녀는 공연 당일, 자기 대신 춘라이가 항아 분장을 마치고 무대에 오르는 모습을 보고 자신만의 무대를 찾아 극장 밖으로 나온다.
……샤오옌추는 얇디얇은 무대 의상 하나만 걸친 채 눈보라 속으로 걸어 나갔다. 극장 정문 앞으로 나온 그녀는 가로등 아래서 걸음을 멈추었다. 그녀는 눈이 내리는 큰길을 한 번 쳐다본 후 스스로 박자를 세고 파리를 흔들며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그녀는 이황을 부르고 있었다. 눈꽃이 흩날리는 가운데 극장 앞으로 수많은 사람과 차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은 점점 더 많아졌고, 자동차들은 꼬리를 물고 길게 늘어섰다. 하지만 샤오옌추의 주변을 에워싸고 있는 사람과 자동차의 무리는 조용했다. 샤오옌추의 눈에는 아무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극장 안에서 또 한 차례 폭발적인 환호성과 박수 소리가 터져 나왔다.
샤오옌추가 춤을 추며 노래를 부르고 있는 동안 이상한 점을 발견한 구경꾼들이 있었다. 그들은 샤오옌추의 바짓가랑이를 타고 무언가가 흘러내리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가로등 불빛을 타고 흘러내리는 액체가 눈 위에 점점이 검은 얼룩을 만들고 있었다. _「청의」 본문 114~115쪽
무엇이 그녀로 하여금 다시 무대에 서게 했을까…… 그런 의문을 곱씹다보면 그 속에 우리 삶의 쓸쓸함과 비의가 자리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추수이(楚水)」
두번째 작품 「추수이」는 일제 강점기를 배경으로 중국의 전통문화와 일본인들의 이율배반적인 정복욕이 치열하게 격돌하는 현장을 자유롭고 적나라하게 비판하면서 비페이위 특유의 탁월한 언어 미학을 보여준다.
어수선한 시국에 양학까지 공부한 펑 씨 집안의 망나니 도련님 펑제중은 베이징으로 유학을 떠났다가 몰래 추수이로 돌아와 숨어 지내던 중 그 사실이 아버지 펑 씨에게 발각되자 베이징에서 진 빚을 갚을 수 있을 만큼의 돈을 주면 돌아가겠다고 되레 강경한 태도를 취한다. 결국 두 손 두 발 다 든 아버지의 탐탁치 않은 허락으로 추수이에 남게 된 펑제중은 여자들을 만나며 쾌락에 탐닉하는 동시에 숨겨놓은 집안의 보물, 돈이 될 만한 것을 찾아 나선다. 한편 펑제중이 추수이로 돌아올 때 같이 들어온 이들이 있었다. 검은색 바지와 제복, 가죽혁대와 모자를 눌러쓴 일본군 병사들이었다. 때마침 닥친 홍수로 풍비박산이 나버린 집을 떠나기로 결심한 펑제중은 장사를 해보기로 한다. 마을의 미혼 여자들을 속여 도시로 끌고 나가 일본군 부대 앞에 기생집을 여는 것이다.
주인공 펑제중의 기회주의적인 속물근성과 중국문화에 대한 자부심, 일본인 시오자와 대위의 제국주의적 우월감과 문화적 열등감 등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깃든 모순심리가 치밀하게 묘사된 작품이다.
「서사(敍事)」
이 소설집의 대미를 장식하는 작품 「서사」는 비페이위 자신의 역사관이 잘 드러난 작품으로, 자신의 가족 삼대(三代)의 혈연관계를 연구하면서 역사라는 것 자체가 일개 집단이 자신들의 해석으로 풀어낸 이야기에 불과하다는 것을 폭로한다. 유머와 환상이 뒤섞인 한 가족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는 일그러진 역사의 뒷모습을 발견할 수 있다.
‘나’는 어느 날, 자신의 뿌리에 대한 깊은 의문을 품고, 임신한 아내와 박사학위의 주제인 ‘가족사 연구’도 접어둔 채 어디론가 떠나기로 결심한다. 꿈인지 현실인지 모를 이 여정은 육지를 떠난 주인공이 배에 몸을 싣고 넘실거리는 밤바다를 항해하는 이미지로 표현된다. 언뜻 요나콤플렉스를 연상케 하는 이런 이미지는 소설 전반에 걸쳐 빈번하게 나타난다. 주인공은 유유히 떠가는 그 배에서 아인슈타인과 노자가 이야기를 나누는 꿈을 꾸기도 하는데, 물리학과 무위사상의 대립 속에서 꿈속의 두 사람은 상대가 좌익이냐 우익이냐를 묻는다. 꿈에서 깬 후 구토를 하던 ‘나’는 몸속에 흐르는 강줄기 같은 시간들을 추억하며 일본인의 피가 섞인 자신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풀기 위해 할머니 완이를 중심으로 삼대의 역사를 되짚어나간다.
일본인 장교에게 겁탈당한 소녀 완이(할머니)의 기구한 운명, 천재였지만 동시에 바보일 수밖에 없었던 아들(아버지)의 절망, 자신의 몸속에 일본인 장교의 피가 흐르고 있다는 것, 부정하고 싶지만 끝내 부정할 수 없는 이 사실에 대한 손자(자신)의 존재 불안이 소나기처럼 흩뿌리는 생의 단상들, 캄캄한 밤바다의 너울로 몰아친다. 고요하고 아름다운 새벽이 되어서야, ‘나’는 여행을 끝내고 배에서 내린다. 그리고 가로등 불빛으로 환한 육지에 발을 내딛는 순간 뱃멀미하듯 속이 거북해짐을 느낀다. 어쩔 수 없이 다시 ‘역사’의 한복판에 올라선 것이다.
훌륭한 소설들은 아래를 향해 낙하하는 것이 아니라 허공을 향해 뛰어오른다. 비페이위는 제한적이고 왜소한 문장 공간 속에서 자신의 도약력과 표현력을 밑천으로 소설의 방대한 주제들에 손을 대는 것이 습관처럼 몸에 밴 작가이다. 쑤퉁(소설가)
작지만, 완벽한 소설! 타임스
몸짓이 살아 있는 대단히 감동적인 소설. 르 몽드
이 소설을 읽는 독자들은 암호로 가득 찬 중국 경극의 세계로 빨려들어가 호기심에서부터 여주인공에 대한 조소와 연민, 동정심까지 다양한 감정을 경험한다. 이것이 바로 진정한 즐거움이다! 아시아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