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6년부터 1788년까지 괴테는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이탈리아 남부의 아름다운 지중해 섬 시칠리아에서 한 달을 머문다. 그리고 여행에서 돌아와 1775년 초고를 시작해 10여 년 가까이 쓰지 못하고 있던 『파우스트』를 마침내 완성하는데, 괴테는 죽기 직전에 두려움에 휩싸인 채 떨리는 손으로 써내려간 <마지막 나날에 대한 고백록>에서 여행을 마친 뒤 『파우스트』를 완성할 수 있었던 이유를 비로소 밝힌다.
『파우스트』는 아주 오래전 1787년에 이탈리아로 처음 여행을 갔을 때 겪은 끔찍한 경험의 상당 부분, 아니 모든 경험을 옮겨놓은 책이다.(17쪽)
괴테가 죽기 직전에야 겨우 고백할 수 있었던 이 경험의 실체는 과연 무엇일까?
평론가이자 시인, 소설가로 이탈리아에서 그 재능을 인정받은 젊은 작가 플라비오 산티는 어릴 적부터 ‘악’에 관심이 많았고, 지금은 십대 커플 에리카와 오마르의 존속살해 사건으로 유명해진 노비 리구레와 뱀파이어에 대한 기억과 두려움을 간직한 도시 프리울리를 오가며 살고 있다. 이러한 배경이 『보스코네로 가의 영원한 밤』을 쓰게 된 동기가 되었을 것이다. 또한 그가 이 소설을 쓴 곳은 우연하게도 메리 셸리가 『프랑켄슈타인』을, 그리고 존 폴리도리가 『뱀파이어』를 썼던 제네바의 디오다티 별장이 내려다보이는 집이었다. 바로 ‘고딕 문학’의 탄생지였던 것이다.
플라비오 산티는 괴테를 앞세우고 어둠에 물든 18세기 시칠리아 섬으로의 기이한 여행을 떠난다.
“삶은피를 먹고 산다……”
1787년 4월 6일 저녁, 가벼운 동남풍을 맞으며 시칠리아 섬에 도착한 괴테는 귀족이나 사제의 수다에 질려 서민들의 이야기를 직접 들어보려고 유명한 선술집을 찾는다. 그리고 그곳에서 얼굴에 깊게 파인 흉터가 있는 중년의 한 사내를 만난다. 그 사내는 괴테에게 ‘어두운 숲의 문장’을 지닌 보스코네로 남작 가문의 이야기를 해주겠다고 말한다. 어둠의 숲에 둘러싸인, 18세기 내내 두려움의 원성이 자자했던 그 집안에 대해.
보스코네로 가에 남은 사람은 집안의 둘째 아들 페데리고뿐이다. ‘방탕한 작자’였던 아버지 루시퍼는 광기에 들린 큰아들 아담의 손에 죽고, 아담은 정신병원에 수감된다. 페데리고 또한 그 광기의 흔적인지 끊임없이 그를 덮치는 수면발작증과 기억상실증에 시달린다. 그로 인해 꿈인지 현실인지 분간할 수 없는 하루하루를 살아가는 페데리고가 유일하게 기억하는 건 그의 가정교사였던 수도사 텔라모니오가 해준 “삶은 피를 먹고 산다……”라는 말뿐이다. 그 말은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 걸까? 이를 알아내기 위해 페데리고는 텔라모니오를 찾아 팔레르모로 돌아온다.
팔레르모에는 최근 벌어진 온갖 끔찍한 살인 사건에 대한 소문이 떠돌고 있다. 인간의 소행이라 하기엔 믿기지 않을 정도로 처참하게 살해된 시체들. 불탄 여자아이의 머리, 공포에 질린 검은 눈과 움푹 패인 콧잔등에 상체만 남은 몸통, 끔찍하게 훼손된 시체 여섯 구…… 이 살인 사건들을 조사하던 모이오 경감이 어느 날 행방불명되고, 이것이 악의 소행이라 믿는 트란케디니 검사는 서서히 미쳐간다. 팔레르모의 하늘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지고, 2년 만에 정신병원으로 형 아담을 만나러 간 페데리고는 아담이 사라졌다는 소식을 듣게 된다.
사내의 이야기에 점점 빠져들던 괴테는 문득 궁금해진다. 이 사건들과 페데리고가 관련이 있을까. 그러나 사내는 대답을 미루고 떠오르는 아침 햇살을 등진 채 모퉁이를 돌아 사라진다. 밤새 이야기를 듣느라 녹초가 된 괴테는 선창가에 쓰러져 잠이 든다. 그리고 다음 날, 괴테는 평생 가슴에 품고 있어야만 했던 공포스런 경험의 서막을 여는 ‘악’의 초대를 받는다.
시칠리아에서 재현된 ‘발푸르기스의 밤’. 악마는 바로 우리 가운데에 있다!
바로 페데리고 보스코네로의 초대였다. 지난 밤 이야기 속에 등장했던 인물이 현실에 나타난 것이다.
해가 지자마자 괴테는 보스코네로의 저택으로 찾아간다. 이야기에 등장했던 인물들이 하나 둘씩 모습을 드러내고, 사건의 전말이 서서히 베일을 벗는다. 안토나치 변호사의 지하실에 감금된 한 여자와 두 남자의 정체, 분명 죽은 줄 알았는데 멀쩡히 살아 돌아온 하인 바르첼로나, 그리고 페데리고 보스코네로의 진짜 정체가 밝혀진다.
“이 정도면 당신도 진실을 알아차려야지.”
나는 떨었다. 그도 떨고 있었다. 그는 주저했다. 말을 멈추고는 허공에 대고 입만 벙긋거렸다. 드디어 그다지 고통스러워하는 기색 없이 그가 말문을 열었다. “이보시오, 사랑하는 볼팡고. 심오한 징후, 악의 세력, 거미, 흡혈귀. 그게 바로 나요……”(289쪽)
괴테는 경악한다. 자기 눈앞에 악의 현현인 뱀파이어가 실체를 드러내다니! 인간의 이성과 지성을 신뢰하고 자연과학 연구에 몰두했던 그가 그토록 부정했던 초현실적인 존재가 조롱이라도 하듯 그 앞에 나타난 것이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페데리고가 괴테를 초대한 진짜 이유는 따로 있었다. 그에게는 증인이 필요했다. 팔레그리노 산에서 벌어질 ‘발푸르기스의 밤’, 즉 최고의 뱀파이어를 가리기 위한 결투를 증언할 단 한 명의 증인이. 13일의 금요일, 페데리고의 형 아담을 포함한 네 뱀파이어의 혈투를 두렵게 지켜보던 괴테는 끝내 기절하고 만다.
사흘 만에 기력을 되찾은 괴테는 타는 듯한 더위와 번갈아 나타나는 한여름의 눈을 맞으며 공포의 시칠리아 섬을 뒤로하고 떠난다. 그리고 ‘진짜 지옥’을 목격한 섬에서의 경험을 잊으려, 침묵에 붙이려 애썼지만 그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고 그의 영혼을 사로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결국 종이에라도 이 비밀을 털어놓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괴테는 마지막으로 우리에게 경고한다. ‘악은 우리 가운데에 존재하고 아무도 이를 떨쳐버릴 의도가 없다’라고.
멋지다. 잘 쓰인 멋진 소설이다. 우연히 집어들자마자 정신없이 빠져들었다. 베스트셀러로서의 모든 조건을 갖춘 책이다._ 이탈리아 독자 리뷰
토마시 디 람페두사, 에드거 앨런 포와 견줄 만한 뛰어난 책이다. 시칠리아 사라이건 아니건 읽어보기를 권한다._ 이탈리아 독자 리뷰
지은이 플라비오 산티(Flavio Santi)
소설가이자 시인, 평론가인 플라비오 산티는 1973년 이탈리아 알레산드리아에서 태어났다. 현재 그는 존속살해 사건이 벌어졌던 노비 리구레와 뱀파이어에 대한 기억과 두려움을 간직한 프리울리를 오가며 살고 있다. 그리고 대학에서 강의를 하며 문학작품 번역과 창작 활동에도 매진하고 있다.
산티의 첫번째 소설 『붉은 장미의 일기』(1999)는 이탈리아 소설가 제수알도 부팔리노와 날카로운 비평을 서슴지 않는 알도 부시의 호평을 받았다. 신세대 작가 중 가장 촉망받는 시인이기도 한 산티는 여러 권의 시집을 냈는데, 첫 시집 『비티치』(1998)는 산드로 펜나 상을 수상했다.
그 외 작품으로 프리울리 사투리로 쓰인 시 모음집 『리미스 테 사케테』(2001), 시집 『아세트』(2003)이 있으며, 2004년 발표한 소설 『소년 X』는 이탈리아에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다.
2006년에 발표한 『보스코네로 가의 영원한 밤』은 뱀파이어를 등장시킨 고딕소설로, 이탈리아에서 그가 속한 세대의 현주소를 알레고리 방식으로 보여주는 걸작이다.
옮긴이 주효숙
한국외대 이탈리아어과와 동대학원을 졸업하고, 이후 이탈리아 페루자 국립언어대학에서 이탈리아어 교사자격증을 취득했다. 현재 한국외대 비교문학 박사과정에 있으며, 서강대와 한국외대에서 강의를 하고 있다.
옮긴 책으로는 『새천년, 세계는 어디로 가는가』 『돈까밀로와 양떼들』 『돈까밀로와 작은 세상』 『돈까밀로의 사계』 『돈까밀로와 뽀강 사람들(뽀강의 돈까밀로)』 『힘내세요, 돈까밀로』 등이 있다.
* 2008년 7월 1일 발행|ISBN 978-89-546-0545-8 03880|140*210 | 380쪽 | 11,000원
* 담당편집 : 류현영(031-955-8858, sanja95@munhak.com)